2003년 이라크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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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전쟁 | |||
바그다드 폭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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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 지휘관 | |||
| 병력 | |||
| 263,000명 | 1,375,000명 | ||
| 피해 상황 | |||
| 사망자: 4125명 미군 3,823명 영국군 170명 그 밖 132명 |
민간계약 요원 사망자: 1012명 이라크 치안부대 사망자: 8,000~10,000명 전쟁 포로 수십만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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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영어: Iraq War, 아랍어: الحرب على العراق)은 2003년 3월 20일 미군과 영국군이 합동으로 이라크를 침투해 일어난 전쟁이다.
2003년 4월 9일에 이르면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함락하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 13일, 1979년부터 24년간 집권해 오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체포됨으로써 끝났다.
목차 |
[편집] 전쟁의 까닭
- 이라크는 대량 파괴 무기의 보유를 과거에 선언하는 한편, 지금도 그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세계의 안보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국내에서 쿠르드인을 탄압하는 등 많은 압정을 실시하고 있다.
- 거듭되는 유엔 사찰의 방해 때문에, 대량 파괴 무기의 폐기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 거듭되는 사찰 방해 때문에, 걸프 전쟁의 정전 결의인 유엔 안보리 결의 687이 찢어지고 있다.
- 유엔 안보리 결의 1154와 "앞으로의 어떠한 안보리 결의 위반도, 이라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과를 부른다."라고 하는, 걸프 전쟁 정전 협정(위의 687) 파기 조건의 결의, 즉 마지막 경고 결의가 진행 중이었다.
대체로 위와 같은 까닭으로 이라크를 중동의 위협이라고 단정하고, 이라크의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한 무력행사라고 주장하여,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 독일 등은 전쟁을 시작한다면 1441 이외로 새로운 안보리 결의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미국과 영국 및 동맹국은 그러한 필요가 없음을 밝히고 위의 까닭에만 기초를 두어 전쟁을 단행했다.
또, 미국과 영국 측이 승전을 선포한 뒤의 2004년 10월, 미국이 파견한 조사단이 "이라크에 대량 파괴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마지막 보고를 제출하였다. 전쟁을 시작한 근거가 된 대량 파괴 무기의 정보의 신빙성도 희박한 것이었던 것이 밝혀져 이 전쟁의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편집] 전쟁의 이름
전쟁의 이름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과 같이 전쟁의 장소가 된 지명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출처 필요]. 이라크 전쟁이라는 이름은 미국의 입장에서 "이라크를 적대시하는 태도일 뿐이다."라는 의견도 있다[출처 필요]. 또, 전쟁에 이른 경위를 생각하여 제2차걸프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출처 필요]
[편집] 여러 나라의 반응
- 대한민국은 3월 21일, 600 명 이내의 건설 공병 지원단과 100 명 이내의 의료 지원단을 파견하는 것을 결정한다. 그 뒤 의회의 반대로, 여당이 분열되는 등으로 인해 파견이 실현되는 것이 불투명했다. 4월 2일 국회 연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시 파병의 승인을 의회에 요청한다.
-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수상은 정부 성명으로서 미국의 무력 행사를 지지한다.
-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수상은 기자 회견에서 "미국의 무력행사를 이해하며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 오스트레일리아는 공군의 전투 공격기, 해군의 프리게이트, 특수부대를 파견한다.
- 필리핀은 지지한다. 중국, 러시아, 유럽 연합, 아랍 연맹은 비난한다.
- 이스라엘은 이라크로부터의 미사일 공격에 대해 즉시 보복하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국내에서는 비상사태 체제에 들어가, 생물, 화학 병기를 준비한다.
- 이라크 정부는 이 싸움을 성전(crusade)이라고 했다.
- 국제 연합의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은 강한 유감의 뜻을 표명한다.
- 미국 국내에서는 비상 용품, 권총, 라이플, 산탄총의 매상이 급증했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자국 내에 위치한 맥도날드 등 미국인의 업체에 테러를 가하는 등의 강경한 폭력 반미시위가 벌어졌다.
[편집] 전쟁결과
징병제로 100만명이 넘는 이라크군은 숫적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으며 특히 이라크병사들의 군기는 엉망이였다. 결국 후세인의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과 쿠사이 후세인이 열화우라늄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1] 이후 후세인은 미군에 체포됨으로 인하여 종전되었다. 결과물로만 따진다면 전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대학살에 더 가까웠으며 사담 후세인은 추후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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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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