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그니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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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니차 전투
몽골군과 유럽 연합군의 전투
몽골군과 유럽 연합군의 전투
날짜 1241년 4월 19일
장소 폴란드 발슈타트
결과 몽골 제국의 승리
교전국
몽고 제국 폴란드
보헤미아
지휘관
바투
바이다르
하인리히
볼레슬라프
병력
8천~2만 명 3천~8천 명
피해 규모
불명 전멸

레그니차 전투(폴란드어: Bitwa pod Legnicą, 독일어: Schlacht bei Liegnitz 리그니츠 전투[*])는 폴란드의 레그니차에서 몽골 제국바투가 지휘하는 군대와 슐레지엔 공 하인리히가 지휘하는 폴란드와의 전투이다.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유럽에 몽골군의 전투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편집]

13세기몽골 군단은 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고 러시아를 잿더미로 만든 뒤 유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1241년헝가리의 왕 벨라에게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보낸 한통의 서신이 전달되는데 자신을 ‘하늘의 사자’라고 소개한 바투는 오만한 어투로 보잘 것 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깜짝 놀란 헝가리 왕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지만 몽골군의 도착이 훨씬 빨라 15만 명에 달하는 몽골군은 둘로 나뉘어 1241년 4월 초, 500km 떨어진 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의 레그니차헝가리모히에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투 과정[편집]

유럽 연합군과 몽골 군대의 포진[편집]

1241년 4월 19일, 슐레지엔 공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와 유럽 각국에서 군사를 모아 5만 병력을 이끌고 레그니차에서 동남쪽으로 4km 떨어진 발슈타트에 포진한다.

폴란드와 유럽 각국에서 모인 5만 군대를 하인리히는 각각의 출신 국가별로 5개 부대로 나누어 사다리꼴로 배치했고, 제 1진은 폴란드 농민들로 구성된 보병대로 몽골군의 진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제2진과 제3진은 지방 영주를 중심으로 기사와 그 종자, 그리고 영지에서 징병한 농민 보병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4진과 5진은 결정적 시기에 승부를 마무리 할 중장갑 기병으로,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의 군사로 이루어져 있었고 유럽군 총사령관 하인리히는 제 5진에 본진을 두고 있었다.

기사들은 무게가 10kg에 달하는 사슬갑옷과 투구를 쓰고 방패와 3미터 길이의 랜스(장창)을 들고 있었는데 이들이 타고 있는 말 또한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다. 창을 들거나 장궁으로 무장한 보병들도 기사들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15만 명의 몽골군은 3만 명씩 모두 5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사다리꼴로 배치된 유럽군을 포위하는 횡대 대형으로 전개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기사들의 눈에는 볼품없는 조랑말을 타고 변변한 갑옷도 못 걸친 채 단도와 반궁이나 각궁으로 무장한 몽골군이 지옥에서 온 군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제1진과 2진의 붕괴[편집]

유럽군의 제1진을 지휘하는 모라비아 변경백의 아들 볼레슬라프가 공격 명령을 내렸고 선두에 선 보병이 석궁을 발사하자 몇 명의 몽골 기병이 말에서 떨어졌다. 랜스를 단단히 쥔 기사들의 돌격 앞에 몽골군은 말을 돌려 도망쳤다. 경기병인 몽골군은 일대일로 겨룬다면 중무장한 기사한테 백전백패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기세가 오른 기사들과 시종들, 기병들이 쫓겨 가는 몽골군의 뒤를 쫓아 달려 나갔고 전공을 다 뺏길세라 초조해진 유럽군의 제2진도 몽골군의 뒤를 쫓았다.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에 당황한 하인리히가 이들을 제지하려 하지만, 여러 나라 출신들로 이루어져 쉽게 의사소통 하기가 힘들고 아직 통일된 지휘계통이 확립되지 않았던 유럽군은 무질서한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문득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유럽군 1진과 2진 모두가 본진과 동떨어져 벌판 한가운데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함성소리와 함께 수 만 명의 몽골 기병들이 이들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닿을 듯 말듯 거짓 후퇴로 유럽군을 유인했던 몽골의 전위부대도 말머리를 돌린다.

하늘을 시꺼멓게 덮을 정도로 날아 오른 화살은 이내 소나기처럼 유럽군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변변한 방어 수단이 없는 보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슬 갑옷을 걸친 기사들조차도 별 도리 없이 화살 세례의 제물이 되어갔다. 화살촉에 독까지 발라 놓았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산된 공격 앞에 유럽군은 몰살당할 처지가 되고 만다.

이에 눈앞에서 아군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본 유럽군의 3진이 진격을 개시하지만, 채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새롭게 나타난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진다.

최후의 전투[편집]

파국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한 하인리히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는데 최후의 결전 병력으로 남겨 둔 제4진과 5진의 출격을 명령한 것이다.

자긍심 높은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 기사단, 그리고 보헤미아 기사단이 성호를 긋고 일제히 박차를 차고 나갔지만 전원이 말을 탄 기병으로 이루어진 몽골군에 비해 유럽군대의 기사단은 모두 말을 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의 시종들과 자신의 영지에서 데리고 온 농민들로 이루어진 보병들이 기사의 싸움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사타구니에서 불이 나도록 달려야만 했던 것이었다.

기병의 최대 강점인 기동력을 발휘하는 것이 유럽의 기사단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말위에서 잔뼈가 굵은 초원의 전사들이었고 또 유럽군의 장궁은 사정거리와 파괴력이 강하긴 했어도 결정적으로 연사 능력이 떨어져 1분에 2발을 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같은 시간 동안에 10발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던 몽골군의 반궁에 의해 제일 먼저 유럽군의 석궁병들이 표적이 되어 쓰러져갔고 죽어가는 유럽 병사들의 시신이 쌓여가는 가운데 유럽의 정예 기사군도 사냥감이 되어 무너져간다.

결국 하인리히는 전투 중 활에 맞아 전사하고 시신의 목은 참수되어 하인리히의 목이 몽골군의 깃대 높이 올라가는 것으로 몽골군의 완벽한 승리로 전투는 막을 내린다. 당시 몽골군이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유럽군 전사자의 한쪽 귀를 잘라낸 것이 커다란 자루 9개에 가득 찼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결과 및 영향[편집]

바투는 뒤이어 벌어진 모히 전투(혹은 사조강 전투)에서도 3만 군사를 이끌고 5~6만 유럽 연합군을 격파해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원나라오고타이 칸이 사망하는 바람에 회군 명령으로 몽골군은 유럽 정복을 포기한다.

결과적으로 몽골의 유럽 침략은 유럽 전역에 매우 큰 공포와 두려움을 줘 교황청에서 다시 제7차 십자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