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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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회의, 장밥티스트 이사베이(1819)

빈 회의(독일어 :der Wiener Kongress)는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주도하에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모여 한 회의이다. 오스트리아 수도 에서 열렸기에 빈 회의라고 한다.

개요[편집]

1814년 9월 1일에서 다음 해 6월 9일까지 열린 이 회의의 목적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의 상태를 전쟁 전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였다. 즉 프랑스 혁명 이전의 유럽의 왕정 체제를 다시 보수하고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유럽의 기존 체제를 위협할 일을 예방하기 위해 프랑스가 다시 강국이 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도 빈 회의의 중요한 목표였다.(그러나 승전 4개국의 분열과 프랑스 외무상 탈레랑의 활약으로 이러한 목표는 잘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반동·보수적 성격을 가진 회의의 결과 만들어진 것이 빈 체제 혹은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였다. 결론적으로 빈 체제는 빈 회의의 결과 만들어진 유럽의 반동적 체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반동이란 역사의 진보를 역행하는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빈 회의에서는 프랑스 혁명으로 몰락한 부르봉 왕가를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복귀시키는 등 왕정이 몰락한 곳에 다시 왕정을 부활시키고,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 열강들은 소위 세력 균형 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빈 체제의 또다른 성격이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빈 체제는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정치의 큰 틀이 된다.

대표자[편집]

상술된 바와 같이, 회의는 5대 강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 러시아는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가 직접 참석하였으며, 형식상으로는 외무상인 네셀로데 백작이 사절단을 대표하였으나, 실제로는 황제 본인이 각종 결정에 직접 참가하고 의견을 정하였다.
  • 프랑스는 패전국으로서 발언권이 높을 수 없었으나, 사절단을 대표한 외무상 탈레랑의 유능함과 승전 4국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책략으로 점차 발언력을 높여 결국 회의의 합의사항 전반에 걸쳐 의견을 개진하고 반영시킬 수 있었다.

상기한 5대 강국 외에도 유럽 각국이 사절단을 파견하여 회의에 자국의 입장을 반영하고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에스파냐라브라도 후작, 포르투갈팔멜라 백작,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로웬히엠 백작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나폴리 왕국뮈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절단과 부르봉 왕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절단이 각각 파견되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장래를 둘러싼 합의에 결사적으로 영향을 미치려 노력하였다. 교황령에서는 콘살비 추기경, 오스만 제국에서는 마브로제니 파샤를 파견하였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자국 주재 영국대사인 클렌카티 백작을 대표로 참석시켰다. 그 외에도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수많은 독일의 영방국가들과 심지어 북아메리카에서 영국동맹하여 프랑스와 싸우고 있던 이로쿼이 부족도 대표자를 파견하였다.

합의사항[편집]

빈 회의의 결과, 합의에 도달한 빈 최종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바깥 고리[편집]

좌표: 북위 48° 12′ 30″ 동경 16° 22′ 23″ / 북위 48.20833° 동경 16.37306° / 48.20833; 16.37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