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WIII.jpg
프로이센의 군주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아우구스테 폰 하라흐
자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샤를로테
프리데리케 공주
칼 왕자
알렉산드리네 공주
페르디난트 왕자
루이제 공주
알베르히트 왕자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모비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이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다음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1770년 8월 3일 ~ 1840년 6월 7일)는 제5대 프로이센 국왕(재위: 1797년 - 1840년)이며 최후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1806년까지)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하여 유럽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국가를 영도해야 했으며, 비상한 능력이 요구되는 시기에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비범함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생애[편집]

어렸을 때 부터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엽색행위를 보고 자라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을 품었다. 그랬기 때문에 후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와 결혼을 한 뒤에 첩을 두지 않았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시기에 중립을 지켰는데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대패하게 되고 곧이어 뤼네빌 조약이 체결되자 어느새 나폴레옹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 말았다. 이에 제3차 대프랑스 동맹 때는 중립을 지키다가 결정적인 시기에 개입할 요량이었는데,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대패한 직후인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시기에 중립을 버리고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파국을 자초했다. 이 잘못된 판단의 결과는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참패로 돌아왔다.

결국 국왕은 틸지트 조약을 강요당하게 되었고, 그의 프로이센 왕국엘베 강 서안의 영토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국왕은 프로이센의 개혁을 위하여 하르덴베르크 등의 관료를 등용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유럽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본질적으로 전제군주였던 그의 개혁 노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시기에는 러시아알렉산드르 1세오스트리아메테르니히를 맹종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그 중 알렉산드르 1세에 대한 맹종은 빈 회의 때까지 계속되어, 바르샤바 대공국작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는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세력과 전쟁 직전의 위기까지 갔다. 결국 프로이센작센의 2/5를 차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고, 그 대신 포메라니아, 베스트팔렌 등 다른 지역에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치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제4차 대프랑스 동맹으로 인한 전쟁 시기에 철십자 훈장을 최초로 제정한 것이다. 또 다른 업적은 빌헬름 폰 훔볼트와 함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를 자신의 사비로 세웠다는 것이다.

가족[편집]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평생 두 번 결혼했고, 그 중 첫 번째 아내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와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다.


전 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제5대 프로이센 왕
1797년 ~ 1840년
후 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전 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797년 ~ 1806년
후 임
(직위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