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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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프랑스어: Huguenot)는 프랑스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칼뱅주의를 추종한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은 스위스 주네브에서 세력을 규합하는데, 후에 이들을 프라이부르크, 베른, 제네바의 동맹이라는 뜻으로 위그노라고 불렀다.[1]

프랑수아 1세는 그의 통치 기간에 위그노의 수가 늘어나도록, 그들을 관대하게 다루었다. 앙리 2세 때는 위그노들이 큰 세력있는 단체가 되었다. 그들이 강해지자, 정부는 그들을 더욱 더 박해하였다. 중요한 인물들었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나바라의 군주 앙투완도 위그노들었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이끄는 기즈 가족과 프랑수아 2세는 위그노들에게 대항하였다.

혼란과 학살[편집]

1562년 위그노 전쟁,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등으로 로마 가톨릭 교도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교리적으로도 혼란을 겪었다. 부의 정당한 축적을 인정한 칼뱅주의의 특징상 주로 상공업자 중에서 신도가 많았다.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사망하자, 샤를 9세와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정부를 지배하였다. 카트린은 기즈 공에 대항하는 위그노들의 균형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두 교파 간의 기분은 내란이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원인을 가져왔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전국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수천명의 위그노들을 학살하였다. 앙리 3세가 암살되고, 나바라의 군주 앙리(엔리케)가 부르봉 왕조를 열고, 앙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낭트 칙령을 세워 위그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망명[편집]

루이 14세가 가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위하여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수많은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다. 일부는 북아메리카 (현재의 뉴욕캐롤라이나지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그들이 망명하자, 프랑스의 경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가져왔다.

종교의 자유 인정[편집]

1802년 이후 위그노 곧 개신교 신자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다.[2]

주석[편집]

  1. 5시간 만에 읽는 재미있는 교회사/유재덕 지음/작은행복.
  2. 살림지식총서《종교개혁》/이성덕 지음/살림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