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엔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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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엔트 공의회1545년 오스트리아트리엔트(현 이탈리아트렌토)에서 교황 바오로 3세 주관으로 개최된 로마 가톨릭교회공의회를 말한다.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진행되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누가 이단이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이단인가'를 밝혀 가톨릭 신앙 교리의 명확한 한계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1]

개요[편집]

이 회의는 개신교의 진전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적·도덕적·행정적 기준 확립의 필요성에 의해 열렸다. 회장(會場)이 한때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옮겨지곤 하여 긴 시간을 끌어 3개의 시기로 나뉘는데, 이는 당시 교회·정치적인 여러 난제들을 반영하고 있다. 중요한 결정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를 신앙의 기초로 재확인한 일,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등가치(等價値)로 삼은 것, 교회가 계시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 것,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와 신앙의 실천에서 생겨난다는 것, 7개의 성사, 성찬에 관한 성변화(transubstantiation)의 확인, 직위의 겸임을 금지한 일 등이다. 가톨릭교회는 신학적·교회적인 근본적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근대 가톨릭교회의 기반이 확립되었다.[2]

진행 과정[편집]

제1기[편집]

1545년 개회되어 1548년 정회될 때까지 약 3년간의 기간으로 이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한 곧 믿음의 원천은 전통이나 교의가 아니라 성서라는 개신교의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전통 모두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개신교의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곧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제1기에 규정되었다.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3]

제2기[편집]

교황 바오로 3세의 후계자 교황 율리오 3세가 1551년 개회하여 다음 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좌절될 때까지 약 1년간의 기간으로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체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되었다. 제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지방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황제의 입김으로 개신교에서도 참석하였다.[3]

제3기[편집]

가장 성과가 많았던 회기로 제2기가 끝난 뒤 약 10년 후인 1562년에 개회되어 이듬해 폐회되었다. 이 회기 중 가장 중요한 심의대상은 성체성사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 들이었고 이에 관한 교리가 규정되었다. 그밖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사도신조 참조), 성인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신학교 설립, 주교의 임명, 교구 시노드, 강론 등에 관한 교령이 반포되었다.[3]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편집]

미켈란젤로에 대한 단죄[편집]

1564년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 제24회기[4]는 성서를 왜곡하고 외설스러우며 반개혁적이라는 죄명을 씌워 미켈란젤로의 〈최후의심판〉을 수정할 것을 결의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가톨릭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본보기로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애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심판〉을 주문한 것도 세상을 쥐락 펴락했던 교회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당대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에게 벽화를 의뢰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강경주의자들의 눈에 비친 미켈란젤로는 교회의 의도에 찬물을 끼얹는 불경을 저지른 이단자였다. 이들의 눈에 벌거벗은 하나님의 모습은 반개혁적인 그림으로 여겨졌다. 사제들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심판〉을 공의회의 중요 의제로 채택하였고 마침내 종교화의 품위를 떨어뜨린 이단적인 작품이라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가톨릭교회는 〈최후의심판〉은 가톨릭의 수치라는 낙인을 찍어 벽화를 파괴하자는 강경론까지 대두됐다. 이에 교황 파울루스 4세는 벽화를 흰 칠로 지울 것을 명령했다.교황의 지시가 떨어지자 미켈란젤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타협안을 내놓아 벽화 파괴는 모면하기 위해 그림의 나체에 옷을 입혀야 한다고 강요했다. 이런 논란 속에 미켈란젤로는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고 그의 수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벽화의 그림에 옷을 그려 넣었다.[5]

주석[편집]

  1. 채창석《14-16C 가톨릭 교회 개혁의 연속성 : 트리엔트 공의회를 중심으로》(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P62~63
  2. 트리엔트 종교회의, 《글로벌 세계 대백과》
  3. 가톨릭인터넷 Goodnews에 오신 모든 분들께 축복이 함께하길
  4. 트리엔트 공의회를 다룬 다른 논문에는 제24회기가 열린 년도는 1563년인데 이명옥의 《센세이션展 세상을 뒤흔든 천재들》에서는 1564년이라 나온다. 이명옥의 저서를 인용했으므로 1564년이라 밝힘.확인 필요
  5. 이명옥《센세이션展 세상을 뒤흔든 천재들》(웅진지식하우스)P241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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