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엔트 공의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 오스트리아트리엔트(현 이탈리아트렌토)에서 교황 바오로 3세 주관으로 개최된 로마 가톨릭공의회를 말한다.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진행되었다.

개요[편집]

이 회의는 개신교의 진전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적·도덕적·행정적 기준 확립의 필요성에 의해 열렸다. 회장(會場)이 한때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옮겨지곤 하여 긴 시간을 끌어 3개의 시기로 나뉘는데, 이는 당시 교회·정치적인 여러 난제들을 반영하고 있다. 중요한 결정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를 신앙의 기초로 재확인한 일,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등가치(等價値)로 삼은 것, 교회가 계시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 것,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와 신앙의 실천에서 생겨난다는 것, 7개의 성사, 성찬에 관한 성변화(transubstantiation)의 확인, 직위의 겸임을 금지한 일 등이다. 가톨릭교회는 신학적·교회적인 근본적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근대 가톨릭교회의 기반이 확립되었다.[1]

진행 과정[편집]

제1기[편집]

1545년 개회되어 1548년 정회될 때까지 약 3년간의 기간으로 이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한 곧 믿음의 원천은 전통이나 교의가 아니라 성서라는 개신교의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전통 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개신교의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곧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제1기에 규정되었다.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2]

제2기[편집]

교황 바오로 3세의 후계자 교황 율리오 3세가 1551년 개회하여 다음 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좌절될 때까지 약 1년간의 기간으로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체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되었다. 제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지방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황제의 입김으로 개신교에서도 참석하였다.[2]

제3기[편집]

가장 성과가 많았던 회기로 제2기가 끝난 뒤 약 10년 후인 1562년에 개회되어 이듬해 폐회되었다. 이 회기 중 가장 중요한 심의대상은 성체성사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 들이었고 이에 관한 교리가 규정되었다. 그밖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사도신조 참조), 성인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신학교 설립, 주교의 임명, 교구 시노드, 강론 등에 관한 교령이 반포되었다.[2]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편집]

주석[편집]

  1. 트리엔트 종교회의, 《글로벌 세계 대백과》
  2. 가톨릭인터넷 Goodnews에 오신 모든 분들께 축복이 함께하길

참고 자료[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