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세의 왕이 주교를 임명하는 모습

서임권 투쟁 (敍任權鬪爭)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교황신성 로마 제국 황제기독교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인 서임권을 놓고 벌인 권력다툼을 말한다. 이 서임권 투쟁으로 독일에서는 약 50년 동안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귀족이 황제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기원[편집]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책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세속의 권력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주교대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는 직위에 따라 토지를 갖고 있었고 교회 직무뿐만 아니라 세속 직무도 수행하기 때문에 이들의 임명은 세속 권력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의 임명에 대한 특별한 권리가 있었고 교황은 황제의 대관식을 치루어주고 차기 황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으므로 다른 세속 권력에 비해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이러한 성직자 임명권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컸다.

서임권 투쟁의 발단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운동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세속 권력이 가지던 서임권을 교회로 다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그레고리오 개혁론자들은 황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교회권력을 추구했는데 마침내 1056년 하인리히 4세가 6살의 어린 나이로 독일 왕으로 선출되자 개혁론자들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1059년 로마에서 벌어진 교회 회의에서 개혁론자들은 교황의 선출에 세속권력이 관여하지 못하도록하고 추기경단의 임명에도 관여하지 못하게 선언했다.

교황청은 교황임명권을 되찾게 되자 다른 성직 임명권도 교회의 권력으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경과[편집]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는 좀 더 과격한 개혁안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해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세속인의 교회 고위직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고 교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세속의 군주로부터 되찾아 올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황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즉각 교황의 선언에 반대하며 새로운 교황을 뽑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편지를 그레고리오에게 보냈다.

이후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하인리히는 자신의 가신을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러자 1076년 사순절,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의 모든 권한을 금하며 황제의 신하들에게는 충성의 의무에서 면제시켜 주고 교황청의 명령에 반대하고 황제 편에 섰던 주교들을 파문하거나 성무 정지를 시켰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 내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면서 하인리히에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1077년 겨울, 하인리히는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히고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알프스의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 카노사에서 회개의 옷을 입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성문 앞에서 2일간 기다리며 선처를 구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교황은 파문을 거두었지만 독일 제후들의 반란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라인펠트의 루돌프을 새로운 독일 황제로 선출했다. 이후 독일은 3년 동안 내전 상태로 권력투쟁에 들어갔으며 1081년 하인리히는 루돌프를 제거하고 권력을 다시 잡았으며 그길로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고 자신의 편인 귀베르트대립 교황으로 앉혔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을 로마로 끌여들여 자신을 독일인들의 손에서 구출하도록 요청했고 1085년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이끈 노르만족이 로마를 공격해 그레고리오를 구출했다. 그레고리오는 살레르노에서 선종하였다.

이후 서임권을 둘러싼 분쟁은 몇십 년간 계속 되었으며 이후 교황이 새로운 성직을 임명할 때마다 독일에서는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1106년 하인리히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 역시 서임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서임권 논쟁[편집]

잉글랜드 왕국에서도 서임권을 둘러싼 군주와 교황간의 분쟁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정복자 윌리엄은 자신의 정복 행위와 왕권에 대하여 교황의 인정을 받는 대신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따라 로마에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이를 둘러싸고 캔터베리 대주교를 임명할 때 교황과 긴장관계가 있었다.

교황은 독일의 하인리히와 싸우기 위해서는 잉글랜드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았다. 1106년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때 그들의 영적 직무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주던 관행을 포기했고, 교회는 주교를 임명하기 전 반드시 군주에게 존경을 표시하도록 했다.

보름스 협약과 그 경과[편집]

한편 대륙에서는 약 50년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는데 1122년 보름스에서 영국에서와 비슷한 타협안이 타결되었다. 하인리히 5세교황 갈리스토 2세는 기나긴 서임권 투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독일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면전에서 성직자를 선출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서임권 투쟁의 결과 독일에서 권력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더욱 분권화되고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었다. 지방 권력은 더욱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고 결국 19세기까지 독일 지역에서는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는 형성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한편 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한 교황권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교황은 십자군 제창 등 자신의 의도대로 정세를 움직일 수 있었다. 보름스 협약으로도 황제와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며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