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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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첸시오 2세
B Innozenz II.jpg
본명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
임기 시작 1130년 2월 14일
임기 종료 1143년 9월 24일
전임 호노리오 2세
후임 첼레스티노 2세
탄생 미상
이탈리아 로마
선종 1143년 9월 24일
이탈리아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2세(라틴어: Innocent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II)는 제164대 교황(재위: 1130년 2월 14일 ~ 1143년 9월 24일)이다. 세속명은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이탈리아어: Gregorio Papareschi)이다.

생애[편집]

로마 태생으로 1116년에 추기경이 되어 프랑스에 두 차례 사절로 파견되어 보름스의 정교 협정을 성사시키는 데 협력하였다. 그는 세속 국가들이 교회의 독립을 허용할 경우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를 포함한 젊은 추기경들은 그 평화가 교회의 영적 쇄신의 수단이 된다고 보았다. 연만한 추기경들은 교회의 쇄신을 법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고 세속 군주들과의 타협을 반대하고 로마인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대립 교황 아나클레토)를 지도자로 생각하였다. 피에트로는 파리 시에서 교육을 받고 클뤼니 수도원수사가 되어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추기경이 된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호노리오 2세의 임종 순간부터 추기경단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분열을 막기 위하여 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이 구성되었다. 노년층이 추기경단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젊은 층은 위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투표장이 피에를레오니 가문을 반대하는 가문의 요새 근처로 선정되자 피에트로는 위원회를 떠나버렸고 호노리오 2세가 선종하였다는 거짓 보도가 나돌자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폭동을 일으켰다. 호노리오 2세가 1130년 2월 13일 선종하자 교황청 상서국장이던 아이메리크 추기경은 피에를레오니 가문의 반란을 두려워하며 호노리오 2세의 장례식을 급히 치르고 콘클라베를 서둘렀다. 2월 14일 추기경 위원 다섯 명이 그레고리오를 선출하여 인노첸시오 2세라고 명명하자 젊은 추기경들이 환호로써 맞이하였다. 숫자적으로 많은 노년층은 피에트로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리하여 극심한 분열이 일어났다. 두 후보자는 모두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었고 쌍방이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해졌다. 인노첸시오 2세는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의 대다수의 반응은 교회의 영적인 쇄신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1130년 9월 에탕프 공의회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프랑스를 움직여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으로 받들도록 종용하였다. 크산텐의 노르베르토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설득하였고 베르나르도는 잉글랜드 왕국을 설득하여 1131년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으로 공표하게 하였다.

한편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의 지지자들은 노쇠한 추기경들과 주로 그의 도움으로 이 된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였다. 인노첸시오 2세는 독일의 군주 로타르 3세에게 이탈리아로 원정하여 이들을 대항하도록 청했으나 보름스의 정교 협정과 연관 짓고 싶지 않아 원정을 거절하였다. 1133년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서 로타르 3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로타르 3세가 이탈리아를 떠나자 인노첸시오 2세도 로마를 재차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자 로타르 3세가 1136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인노첸시오 2세와 관할권을 놓고 분쟁을 해 오던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이런 와중에 피에트로가 1138년 1월 25일 죽자 루지에로 2세는 다른 대립 교황을 세워 그가 포기할 때까지 그를 지원하였으나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려 그 분열은 종식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피신 중에 루지에로 2세에게 사로잡혔으나 쌍방은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였다.

전 임
호노리오 2세
제164대 교황
1130년 2월 14일 ~ 1143년 9월 24일
후 임
첼레스티노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