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실베스테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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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베스테르 2세
Pope Sylvester II.jpg
본명 제르베르 도리야크
임기 시작 999년 4월 2일
임기 종료 1003년 5월 12일
전임 그레고리오 5세
후임 요한 17세
탄생 945년
Flag of France (XII-XIII).svg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선종 1003년 5월 12일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로마

교황 실베스테르 2세(라틴어: Silvester PP. II, 이탈리아어: Papa Silvestro II)는 제139대 교황(재위: 999년 4월 2일 - 1003년 5월 12일)이다. 본명은 제르베르 도리악(프랑스어: Gerbert d'Aurillac)이다. 최초의 프랑스인 교황인 그는 아라비아 및 그리스-로마의 산수학과 수학, 천문학에 대한 공부를 널리 장려했으며,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동로마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주판과 혼천의를 재도입하였다.[1][2][3][4] 또한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한 십진법을 유럽에 도입하였다.

생애[편집]

제르베르는 946년경 프랑스 캉탈 주 생시몽 코뮌 인근에 있는 베리악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963년경 그는 오리악의 성 제랄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967년 바르셀로나의 보렐 2세 백작이 수도원을 방문할 당시 수도원장은 백작에게 제르베르를 데려가서, 스페인에서 수학과 아라비아 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후 수년간 제르베르는 바르셀로나로부터 북쪽으로 약 60킬로미터 쯤 떨어진 비크의 주교 아토의 지도 아래 공부했는데, 아마도 장소는 산타 마리아 데 리폴 수도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 그 당시에 이곳은 아직 이슬람교의 지배 아래 있지 않았다.

알안달루스와 전쟁을 벌이던 중 수세에 몰려있던 보렐 2세 백작은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코르도바에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 사절단 중에는 비크의 주교 아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코르도바의 알하킴 2세는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하였다. 아토는 코르도바 궁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랍인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은 채 돌아왔다. 제르베르는 아토에게 아랍의 군주들에 대해 더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가 보기에 아랍의 군주들은 전쟁보다는 과학과 문학에 더 관심을 보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제르베르는 이슬람 고등교육시설인 마드라사의 위대한 교사들처럼 수학과 자연과학에 능통하고, 아랍인과 비슷하게 옷을 입고 말하는 주교들과 법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매료되었다. 이는 제르베르로 하여금 아랍에 대한 동경심과 더불어 수학 및 천문학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969년 보렐 2세 백작은 제르베르를 대동하고 로마로 순례를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교황 요한 13세오토 1세 황제를 만나게 되었다. 제르베르의 뛰어난 지식에 탄복한 요한 13세의 추천에 따라 오토 1세는 그를 자신의 어린 아들(훗날의 오토 2세)의 개인교사로 채용했으며, 몇년 후에 랭스 대성당 사립 학교에 공부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었다. 그곳에서 제르베르는 랭스 대주교 아달베론에 의해 대성당 사립 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다. 973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오토 2세는 제르베르를 보비오 수도원의 아빠스 겸 백작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전 아빠스들에 의해 수도원이 엉망이 되어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제르베르는 결국 랭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983년 오토 2세가 사망한 후, 제르베르는 정계에 진출하였다. 985년 대주교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는 위그 카페를 지지하며, 오토 3세 황제에게서 로렌 지방을 빼앗으려는 로테르의 시도에 반대하고 나섰다. 987년 위그 카페가 프랑스의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카롤링거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프랑스 오베르뉴 주 오리악에 있는 교황 실베스테르 2세상

989년 1월 23일 아달베론이 선종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제르베르가 교구장 주교로 착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지만, 위그 카페는 그 대신에 로테르의 사생아인 아르눌프를 대신 착좌하도록 손을 썼다. 그러나 아르눌프는 991년 왕에 대한 반역 혐의로 교구장직에서 파면당하고, 제르베르가 새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르베르가 랭스 교구장직에 착좌한 것에 대해 교구 내에 상당한 반발이 일어나자, 교황 요한 15세는 특사를 파견해 제르베르의 성무 집행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제르베르는 이러한 결정이 교회법적으로 무효임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지만, 995년에 소집된 시노드에서는 아르눌프의 파면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 때 제르베르는 오토 3세의 교사로 활동했으며, 998년 오토 3세의 사촌인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 의해 라벤나의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리고 오토 3세의 지지에 힘입어, 999년 교황 그레고리오 5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제르베르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조언자였던 교황 실베스테르 1세를 시사하며, 자신의 새 이름으로 실베스테르 2세를 선택하였다. 실베스테르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과거 자신과 껄끄러운 상대였던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직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교황으로서 그는 사생활에 흠이 없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만이 주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성직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행해져왔던 성직매매와 축첩 등의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1001년 로마 시민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오토 3세와 실베스테르 2세는 라벤나로 급히 몸을 피신하였다. 오토 3세는 로마를 다시 장악하여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두 차례나 원정길에 올랐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리고 1002년 제3차 원정대를 이끌다가 사망하였다. 비록 반동을 일으킨 귀족들이 여전히 로마의 권력을 잡고 있는 상태였지만, 오토 3세가 사망하자 실베스테르 2세는 바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실베스테르 2세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저술과 가르침[편집]

제르베르는 당대에 가장 저명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 그는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 네 가지 학문 분야(사과)를 다룬 일련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는 이들 학문을 삼학(문법, 논리, 수사)를 활용하여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왈리드 아미네 살합은 제르베르가 유럽에 이러한 교육방식을 다시 도입시킨 것은 이슬람교 치하 스페인(알안달루스)에 있는 코르도바 마드라사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6] 랭스에 있을 당시 그는 공기를 수동으로 펌프질해야 했던 이전의 모든 악기를 뛰어넘는 놋쇠 파이프를 갖춘 수압식 오르간을 만들었다. 984년 제르베르는 바르셀로나의 루피투스에게 서신을 보내 점성술천문학에 관한 책 한 권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역사학자 S. 짐 테스터는 제르베르가 점성술과 천문학이라는 두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7]

실베스테르 2세는 945년경 프랑스의 오리야크 인근에서 출생하였다. 오리야크의 수도원장 레몽 라보르에게서 문법, 수사학, 산수, 음악을 배워 그 곳의 수사가 된 것 같다. 967년 바르셀로나의 백작 보렐에 의해 에스파냐에 가서 훌륭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던 비크의 주교 아토의 밑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중세기 대학 교육의 정규 과정 4학(산수, 기하, 음악, 천문학)을 이수하였다. 그가 보렐을 대동하고 로마에 가서 교황 요한 13세를 알현하자 요한 13세는 그의 뛰어난 지식에 탄복하여 그를 신성로마제국황제 오토 1세에게 추천하였다. 972년 신성로마제국을 떠나 랭스에 가서 대부제 제란으로부터 변증법을 공부하였다. 랭스의 대주교 아달베로는 그를 대성당 학교의 학자로 임명하고 얼마 후에 아달베로의 비서가 되었다.

980년 아달베로와 함께 이탈리아에 가서 마그데부르크의 학자 오트리크와 철학적인 논쟁을 벌여 오토 2세 황제를 알게 되었다. 1년 안으로 오토 2세는 제르베르를 유명한 도서관이 있던 보비오의 아바스로 임명하였다. 983년 12월 오토 2세가 서거하자 그 지역의 인색한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냉대를 받아 랭스로 돌아가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제르베르는 황후 테오파노를 지지하였으며 하인리히가 황제가 되는 것에 반대하고 테오파노의 아들이 황제 오토 3세가 되게 하여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와 아달베로 대주교가 위그 카페를 지지하여 이 되게 하였다. 위그가 왕이 되자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실력자 로렌의 대공작 샤를과 991년 3월 전쟁이 일어나 카페가 승리하여 샤를이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위그는 샤를의 조카였던 아르눌프를 랭스의 대주교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제르베르를 임명하여 교황청에까지 문제가 되었다. 교황 요한 15세가 아르눌프의 파직을 반대하자 제르베르는 신상의 일을 교황청에 상소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997년 4월 신성로마제국의 궁정으로 피신하여 황족들의 교사가 된 후 998년 4월 25일 라벤나의 대주교가 되었다. 999년 2월 교황 그레고리오 5세가 갑자기 선종하자 오토 3세는 그를 교황으로 추천하였다. 제르베르는 실베스테르 2세로 개명하여 교황좌에 올랐다.

실베스테르 2세는 1000년 폴란드에 첫 번째 대주교좌를 신설하게 하고 볼레스와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하였다. 헝가리 왕국 이슈트반 1세를 지원하여 대주교좌와 새로운 주교좌를 신설하였다. 실베스테르 2세는 퀘르푸르트 수도원의 부르노를 동유럽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올라프 1세에게 요구하여 룬 문자 대신에 라틴어를 사용하여 로마 가톨릭을 반전시키게 하였다. 키예프 대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와 관계를 맺고 달마티아의 종교적 기초를 견고히 하였다.

실베스테르 2세는 교회의 재산을 교황직과 결부시켰고 세속권에 면제되는 정책을 지속시켰으며 수도자들이 소두언장을 자유로이 선출하게 하고 성직매매와 족벌주의를 금하고 성직자들에게 독신을 지키게 하였다. 지역 교회회의를 열어 지역 교회간의 문제들은 그 회의를 통하여 스스로 해결하게 하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교황청에 보고하여 결정을 받게 하였다.

실베스테르 2세는 원래 학자였으므로 학문을 널리 장려하였다. 특히 그는 학문의 이론과 실제적인 면을 강조하여 천문, 지도, 오르간, 수사학 궤도 등을 만들게 하고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였다. 그의 정치학, 주교의 행정, 필사본, 수학, 과학 등에 관한 서신과 기록은 그 시대와 실베스테르 2세 개인의 특징과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실베스테르 2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원반 이론》, 《기하학에 대하여》, 《이성적인 것과 이성의 사용에 대하여》 등이 있다.

주석[편집]

  1. Morris Bishop (2001년). 《The Middle Ages》, 47쪽. ISBN 9780618057030
  2. (2002년) Jana K. Schulman: 《The Rise of the Medieval World, 500-1300: A Biographical Dictionary》, 410쪽. ISBN 9780313308178
  3. Toby E. Huff (1993년). 《The Rise of Early Modern Science: Islam, China and the West》, 50쪽. ISBN 9780521529945
  4. Nancy Marie Brown, "The Abacus and the Cross: The Story of the Pope Who Brought the Light of Science to the Dark Ages"; see a presentation at http://www.religiondispatches.org/books/rd10q/3878/everything_you_think_you_know_about_the_dark_ages_is_wrong/
  5. Mayfield, Betty. Gerbert d'Aurillac and the March of Spain: A Convergence of Cultures.
  6. Salhab, 51.
  7. Tester, 132.
전 임
그레고리오 5세
제139대 교황
999년 4월 2일 - 1003년 5월 12일
후 임
요한 1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