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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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2세
Pope John XII.jpg
본명 옥타비아누스
임기 시작 955년 12월 16일
임기 종료 964년 5월 14일
전임 아가피토 2세
후임 베네딕토 5세
탄생 937년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로마
선종 964년 5월 14일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로마

교황 요한 12세(라틴어: Ioannes PP. XI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XII)는 제130대 교황(재위: 955년 12월 16일 - 964년 5월 14일)이다. 본명은 옥타비아누스(라틴어: Octavianus)이다. 마로치아의 손자이자 스폴레토의 알베리크 2세의 아들로서, 반세기 넘에 교황령을 사실상 통치해왔던 강력한 귀족 가문인 투스쿨룸 백작 가문의 일원이다. 교황으로써 그의 재임기간은 부패하고 세속적이라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탄생과 교황 선출[편집]

옥타비아누스는 자칭 로마 공작이라는 스폴레토의 알베리크 2세이탈리아의 위그의 딸이자 알베리크 2세의 이복누이이자 아내인 빈의 알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소락테의 베네딕토는 옥타비아누스가 알베리크 2세가 내연녀를 통해 낳은 아들이라고 기록했다(Genuit [Alberic] ex his principem ex concubinam filium, imposuit eis nomen Octabianus). 하지만 여기서 그의 라틴어 이름 표기가 명확하지가 않다. 만약 그가 알다의 아들이 맞다면,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했을 당시 나이는 18세였을 것이며, 모계 쪽으로 보자면 카롤루스 대제의 7대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가 알베리크 2세의 내연녀의 아들이라면,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했을 당시 나이가 25세였을 것이다.[1] 퀴리날레 언덕캄푸스 마르티우스 가운데에 있는 귀족들의 거주 지역인 비아라타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러한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알베리크 2세가 자기 아들이 미래에 어떠한 인물이 될 것인지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2]

알베리크 2세는 954년 자신이 죽기 얼마 전에 교황 아가피토 2세의 후임자로 당시 성직자가 된 자기 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선출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선서를 로마 귀족들에게 의무적으로 시켰다.[3] 알베리크 2세가 사망한 후, 옥타비아누스는 만장일치로 아버지의 지위인 로마 공작이라는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7세에서 24세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4]

955년 교황 아가피토 2세가 선종하자 당시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955년 12월 16일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5]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선택하여, 교황 요한 12세로 명명되었다. 그는 세속 문제를 처리할 때는 본명인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지시한 반면에 교회와 관련된 문제인 경우에는 요한 12세라는 이름으로 지시하였다.[6]

재임 초반기[편집]

960년경 요한 12세는 직접 랑고바르드 공작의 영지인 베네벤툼카푸아를 공격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빼앗긴 교황령의 일부 지역을 되찾기 위한 차원인 것으로 보인다. 요한 12세가 투스쿨룸스폴레토 출신의 장정들로 구성된 군대의 선봉에 서서 오는 것을 본 베네벤툼과 카푸아의 공작들은 살레르노의 지술프 1세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지술프 1세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들을 도와주러 왔다.[7] 이에 요한 12세는 북쪽으로 퇴각해서 테라치나에서 지술프 1세와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양자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지술프 1세가 간섭하지 않는 대가로 요한 12세는 더 이상 살레르노에 대한 권리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것에 동의했다.[8]

요한 12세는 곧 자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로마 귀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9]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 왕 베렌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공했다. 이에 호응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정치적 음모가 로마에서 일어나자, 요한 12세는 960년 독일 왕 오토 1세에게 교황 특사들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10] 요한 12세의 요청에 화답하여, 오토 1세는 961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베렌가리오 2세는 서둘러 자신의 요새로 퇴각했으며, 오토 1세는 962년 1월 31일 로마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요한 12세를 알현한 오토 1세는 자신이 교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요한 교황 성하, 저 오토 왕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는 십자 나무와 성인들의 유해 앞에, 만일 제가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로마에 가게 되면 온 힘을 다해 거룩한 로마 교회와 그 교회의 사목자이신 성하를 칭송할 것이며, 성하의 목숨이나 수족, 명예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아울러 성하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로마 시내에서 재판을 하거나, 성하나 로마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어떠한 법률도 제정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수중에 성 베드로의 영토가 들어올 경우, 무조건 성하께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11]

그러자 요한 12세는 이탈리아의 베렌가리오 1세가 사망한 지 40년 만에 오토 1세를 로마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시켰다. 오토 1세로부터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요한 12세와 로마의 귀족들은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오토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베렌가리오 2세나 그의 아들 아달베르트를 돕지 않겠다고 맹세해야만 했다.[12] 그로부터 11일 후에 교황과 황제 양측 간의 조약이 비준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르면 황제는 남쪽으로는 나폴리카푸아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라스페치아베네치아에 이르는 지역을 교황령으로 인정하는 보증인이 되었다. 이는 약 100년 전 카롤링거 제국이 붕괴된 이후 교황에 대한 보호를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첫 사례가 되었다. 오토 1세는 또한 교황 선거의 자유를 보장하긴 했지만, 선출된 교황에 대해 황제가 인준하는 권리를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교황의 세속 권력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는 권한도 받아냈다.[13]

교회 문제[편집]

요한 12세는 세속적인 문제에 치중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지탄을 받았지만, 교회 문제에 대해서도 소홀하지는 않았다. 956년 초에 그는 독일의 교황 특사인 마인츠의 빌헬름에게 편지를 써서 그에게 독일에서 이단, 즉 하느님의 교회를 파괴하려는 자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그는 빌헬름에게 서프랑크와 독일의 현재 정세에 대해 자신에게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요한 12세는 트리어의 새 대주교로 착좌한 하인리히에게 팔리움을 수여하고 그에게 착하게 살 것을 당부하는 친서를 보냈다.[14] 958년 그는 수비아코 수도원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여서 특권을 부여했다.

“사제들과 수사들은 매일 짐의 영혼과 짐의 후임자들의 영혼이 성화를 위한 지향으로 키리에 엘레이손과 크리스테 엘레이손을 각각 100번씩 암송하도록 한다. 또한 매주 3회씩 사제들은 짐의 영혼과 짐의 후임자들의 영혼이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구하는 미사 성제를 드려야 한다.”[15]

960년 요한 12세는 로마를 방문한 성 두스타노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하고, 그에게 자기 손으로 직접 팔리움을 수여하였다.[16]

962년 2월 12일 요한 12세는 오토 1세의 요청에 따라 로마에 시노드를 소집했다. 시노드에서 요한 12세는 마그데부르크메르제부르크에 각각 대교구와 교구를 설정하고,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트리어 대주교에게 팔리움을 하사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로테르를 베로나의 주교로 서임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로마 시노드는 아울러 랭스 대주교품을 되찾으려고 한 베르망두아의 위그를 파문하기로 결의를 모았다.[17] 이 결의안은 이후 같은 해 파비아에서 소집된 또 다른 시노드에서 재확인되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레이스 K. 만의 발을 빌리자면, “요한 12세에게 있어 교회 문제는 별로 그렇게 관심을 둘 사안으로 보이진 않았던 것 같다.”[19]

오토 1세와의 갈등[편집]

959년 교황은 베렝가리오 2세로부터 구 교황령을 되돌려 받기 위해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토 1세는 위험이 예상되는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응하고 15살 된 자기의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한 후 961년 말 군대를 이끌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브렌네르 고개를 거쳐 파비아를 통과하여 이탈리아에 나타났다. 962년 2월 2일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오토 왕과 그의 아내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데신성로마제국황제와 황후로 임명하고 성대하게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장기간 로마와 독일은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오토 1세는 자신의 특권을 교황에게 전달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4분의 3을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교황은 교황령에 대한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차기 교황들은 황제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하기 전에는 교황좌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교황은 이를 싫어하여 황제가 로마를 떠난 다음 황제 반대 운동을 벌였다.

오토 1세가 그 해 11월 3일 로마로 다시 오자 교황은 티볼리로 피신하였다. 오토 1세는 요한 12세의 비리를 들어 고소하고 개인 자격으로 해명을 하였으나 요한 12세는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오토 1세는 요한 12세를 퇴위시키고 로마의 평신도 국가 공무원을 교황으로 앉혔다. 그가 교황 레오 8세이다. 로마 시민들은 오토 1세의 개입을 반대하였으므로 요한 12세는 오토 1세가 떠난 다음 쉽게 로마를 조정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적들을 처벌하고 레오 8세의 결정들을 모두 무효로 선언하였다.

주석[편집]

  1. Mann, pp. 243-244.
  2. Gregorovius, pp. 328-329.
  3. Imma Penn, Dogma Evolution and Papal Fallacies, (AuthorHouse, 2007), 207.
  4. Mann, p. 230.
  5. Mann, pp. 244-245.
  6. Norwich, p. 76; Mann, p. 245.
  7. Gregorovius, p. 330.
  8. Mann, pp. 246-247.
  9. Gregorovius, p. 331.
  10. Mann, p. 247.
  11. Mann, p. 248; Gregorovius, pp. 332-333.
  12. Mann, p. 250.
  13. Mann, p. 252; Gregorovius, p. 338.
  14. Mann, p. 245.
  15. Mann, p. 246.
  16. Mann, pp. 265-266.
  17. Mann, pp. 253-254.
  18. Mann, p. 235.
  19. Mann, p. 254.
전 임
아가피토 2세
제130대 교황
955년 12월 16일 - 964년 5월 14일
후 임
베네딕토 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