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렌가리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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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렌가리오 1세
베렌가리오 1세

베렌가리오 1세(Berengerio I) 또는 베렝가르 1세(Berenger I , 840년? - 924년)는 888년부터 이탈리아의 왕이었고 905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루트비히 1세의 외손자며 이탈리아 군주 분쟁기간의 인물에 포함된다. 이전에는 스폴레토 공작가의 람베르트, 루트비히 3세와 분쟁해서 승리했다.

뚱보왕 카를 3세의 치하기간 중 그의 봉신이 되었으나, 아르눌프에 의해 카를이 폐위되자 바로 이탈리아 왕이 되었으며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이후 스폴레토 공작가의 구이도, 람베르토 등과 10년 넘게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놓고 다투었다. 896년 아르눌프람베르토를 폐위하고 황제관을 받으면서 그는 다시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되어 복귀하였다. 899년 아르눌프 사후 일부 이탈리아 귀족들이 왕으로 받든 프로방스루트비히 맹인왕과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놓고 다투었으며, 905년 루트비히 맹인왕을 사로잡아 두 눈을 뽑은 뒤 추방, 이후 이탈리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로방스의 루돌프를 왕으로 받든 분파와 계속 다투었고, 924년 피아첸차의 막사에서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가계는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모계를 통해 약간이나마 카롤링거 왕가의 상속권이 있었다. 중세 이후 이탈리아를 처음으로 통일하려 한 인물로 비정된다. 베렌가리오 드 프리울리(Berengerio of Friuli) 또는 베렝가르 드 프리울리(Berenger of Friuli)로도 부른다.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베렌가리오의 어머니는 경건왕 루트비히와 벨프 공작 구엘프 1세의 딸 유디트의 딸인 기셀라였고[1], 아버지는 이탈리아의 프리울리 후작인 에버하르트였다. 아버지 에버하르트 역시시 카를로만의 외손으로 아득하게나마 카롤링거 왕실의 왕위계승권자였다. 또한 할머니 인겔트루드(Engeltrude)는 샤를마뉴의 딸 아델라이드의 딸이었다. 그의 직계 중 이름이 확인된 것은 840년프리울리 후작에 임명된 할아버지 헤른로히 2세였다. 증조모는 피핀 3세 단신왕의 형 카를로만 1세의 딸이었고, 그는 샤를마뉴의 외손녀와 결혼했다. 헤른로히 2세의 아버지는 다소 불확실하여 프리울리의 헤른로히 1세 또는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르라는 설이 있다.

부인은 스폴레토의 베르틸라(Bertila of Spoleto)였지만 귀도람베르트와는 관련이 없다. 그들은 베르틸라의 친정아버지인 스폴레토 공작 아델히스 1세(Adelchis I of Spoleto) 사후 황제 루트비히 2세로부터 스폴레토 공작에 임명된 낭트의 람베르토 1세의 후손들이었다.

874년헤른로히 3세가 사망하자 그는 프리울리 후작직을 계승하였다. 그는 곧 카롤링거 제국의 변경백으로 파견되어 슬라브 족마자르 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이 무렵 그는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의 군사사령관도 겸하여 이탈리아 북부에 영향력을 쌓았다.

혼란기[편집]

874년 형제 헤른로히 3세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프리울리 후작직을 상속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들 중 소 루트비히뚱보 카를을 이탈리아의 왕으로 앉히려 했다. 875년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자신의 사촌형제이자 처남 동시에 매제이기도 했던 카를로만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죽었으나 서프랑크카를 2세가 재빨리 알프스를 넘어와 롬바르디아의 왕관과 서로마 제국 황제관을 차지했다.

이때 베렌가르는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들 중 소 루트비히뚱보 카를을 이탈리아의 왕으로 앉힐 때 군대 일부를 동원하기로 밀약을 체결하였다. 베렝가리오는 877년 대머리 카를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탈리아 내에서 어떤 영토도 차지하지 못하였다. 877년 독일인 루트비히의 아들 카를로만의 이탈리아 입성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그는 카를 3세의 이탈리아 왕, 황제 타이틀 수여를 위해 막후에서 조정한다. 그는 오랫동안 루트비히 독일인의 아들 이탈리아왕 앉히기 운동에 오래 협력한 대가로 카를 3세로부터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증여받았다. 카를 3세의 치세 중 베렌가리오는 제국의 동부의 군사권을 위임받고 동부 지역에 파견되어 슬라브족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884년885년에는 카를 3세의 이탈리아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카를 3세와 벨루노의 주교 하이모(Haimo) 사이의 중재를 맡아보았다.

분쟁 기간[편집]

888년 1월 비만왕 카를 3세가 폐위당한 이후, 파비아에서 후임 이탈리아 군주를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자 여러 주교들을 설득했다. 한편 그는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출되는 듯 하였으나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베렌가리오 대신 외드를 선택했다. 888년 1월 6일 롬바르드파비아에서 일부 이탈리아 귀족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동프랑크 왕 아르눌프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동시에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그의 봉신이 되었다. 그러나 889년 1월초 스폴레토 공작가의 람베르트에 의해 다시 축출된다. 889년 2월 16일 스폴레토 공작 구이도는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베렌가리오는 자신의 롬바르디아 왕관을 요구,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피아첸차 근처 트라비아에서 교전하였으나, 귀도 군대에 의해 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롬바르디아 왕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베렌가리오는 889년 초부터는 스폴레토와 베로나의 이북 지역, 이탈리아의 북동부에서만 영향을 행사하였다. 893년 그는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회복하기로 작심, 군사를 보내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친척이었던 아르눌프 폰 케른텐(바이에른의 카를만의 서자)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여러번 아르눌프를 설득하여 이탈리아로 군사를 이끌고 오게 했다. 교황 포르모소는 곧 아르눌프에게 편지로 구이도의 아들이 교황령을 위협하니 도와달라는 친서를 써서 보냈고, 아르눌프는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왔으나 관절염으로 고전하였다. 베렌가리오는 아르눌프의 도움으로 람베르트를 폐위시키고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이탈리아의 왕위를 차지한다.

왕좌를 둘러싼 갈등[편집]

아르눌프는 로마에서 축성을 받은 뒤 황제관을 받고 동프랑크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람베르토는 반발했다. 898년까지 이탈리아에는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베렌가리오는 이탈리아 보르고의 생 도니노에서 람베르토에게 포로로 붙잡힌다. 그러나 람베르토는 곧 사망했다. 귀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람베르토가 죽은 이후에야 베렝가르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프리울리에는 왈프레도를 후작이자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통치하게 했다. 왈프레도는 그가 죽는 896년까지 베렌가리오의 대리인으로 프리울리를 통치했다.

899년 아르눌프는 마자르 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쓸 수가 없었고 그는 다시 영주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마자르 족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계곡으로 침략해왔다. 베렌가르는 군사를 이끌고 마자르 족과 교전하지만 크게 패하고, 남부 브렌에서 많은 몸값을 주고 포로들을 석방시켜야 했다.

그러나 899년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북부를 쳐들어온 헝가리 마자르 족과 싸웠으나 브렌타 강가에서 패배했다. 그는 지지를 얻기 위해 이브레아 후작 아달베르토에게 자신의 딸 기셀라를 시집보냈고, 토스카나와 카메리노의 자치권을 수용하였다.

한편 토스카나의 후작 아달베르토와 교황 베네딕투스 4세(Benedetto IV)는 프로방스 출신인 루트비히 왕(뒤의 맹인왕 루트비히 3세)에게 황제관을 제안하였다. 900년 10월 5일 프로방스의 루트비히 왕(뒤의 맹인왕 루트비히 3세)이 베렝가리오를 반대하는 이탈리아 남부 귀족들에게 초빙되어 이탈리아로 왔다. 소년 루트비히는 롬바르드 왕이 되었고 그 이후 901년 교황 베네딕투스 4세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902년 베렌가리오는 마자르 족 용병을 고용하여 자신의 군사 수를 키운 뒤 로마로 진격하여 루트비히를 격파했다. 루트비히는 베렝가르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쫓겨났지만 루트비히는 그뒤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루트비히와의 오랜 싸움 끝에 905년 7월 21일 베로나에서 루트비히를 생포, 투옥시킨 뒤 그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든 뒤 프로방스로 추방하였다. 프로방스로 추방된 루트비히는 자신의 지위와 황제관 권리를 프로방스의 위그에게 양도하였다.

이탈리아 왕과 황제[편집]

루트비히 3세의 패망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다. 잠시 905년까지는 이탈리아의 왕 자리는 루트비히 3세였으나, 바이에른 군대의 도움으로 그해 7월 베렌가리오가 승리, 루트비히를 생포하였다. 905년 7월 12일 루트비히는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7월 21일 베렌가리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쫓겨났으며, 베렌가리오는 이탈리아 왕과 황제의 지위를 받았다. 904년에는 베르가모를 점령한 무슬림들을 추방하였다.

베렝가르는 915년 1월 이탈리아 남부를 침략한 무슬림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그는 라치오캄파니아에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그해 11월 교황 요한네스 10세에 의해 로마에서 정식으로 축성받고 대관식을 올렸다. 그해 베렌가리오의 장녀 베르타가 브레시아 산 살바토레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베르타의 이모 중 한명이 살바토레 수녀원의 수녀였고 베렌가리오의 딸 베르타는 이 인연으로 살바토레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가 원장이 되었다. 그는 살바토레 수녀원을 전폭 지원하였다.

베렌가리오는 스폴레토의 베르틸라와 결혼하였으나 910년 베르틸라와 이혼했고, 베르틸라는 계속 자신의 황후로서의 지위를 요구했다. 베렌가리오는 915년 12월 베르틸라를 독살한다. 914년 베렌가리오는 비잔틴 제국의 공주 안나와 재혼한다. 안나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6세와 황후이자 후일 여제가 되는 조에 차우차이나의 딸이었다.

반란과 최후[편집]

그러나 당시 마자르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탈리아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후 반란이 일어났고 922년 봄 베렝가리오에 반대하던 귀족들은 부르고뉴 출신 루돌프 2세 왕을 불러들였다. 922년 피올렌차의 피오랑주올라 다르다에서 루돌프 2세와 교전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그는 시체들 사이에 덮여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923년 7월 17일 사위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피아첸차에서 루돌프 2세와 교전하였다. 그러나 피아첸차 근처 피오렌추올라에서 루돌프를 따르는 귀족들 및 프로방스군대와의 교전에서 패배했으며, 그는 사위 아달베르토와 함께 베로나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슈바벤 공작 부르카르트가 루돌프의 부르고뉴 영지를 노리자 루돌프는 곧 부르고뉴로 돌아갔고, 베렌가리오는 루돌프의 병력을 격파하기 위해 파비아에 마자르족 5천 명으로 구성된 용병부대를 확보, 루돌프가 없는 틈을 타 이탈리아의 왕을 선출하고 도시를 포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베렌가리오가 항복하게 되자 마자르족 부대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성벽을 파괴하였다. 마자르족의 파괴 행위로 이탈리아 각 도시의 영주들과 귀족들은 용병들을 동원한 베렌가리오를 혐오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파비아에 머무르면서 다시 이탈리아를 탈환하려 노력했지만 924년 마자르 족이 파비아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924년 4월 7일 전쟁 중 피아첸차의 막사에서 기도하던 중, 뒤에서 기습한 자객에 칼에 맞고 살해당했다. 이후 38년 동안 황제의 자리는 공석이 된다. 962년에야 동프랑크 국왕 오토 1세가 제위에 올랐다.

사후[편집]

베렝가르는[2] 아들이 없는 관계로 그의 지위는 외손자인 이브레아의 베렌가리오가 주장하게 되었다.

가족관계[편집]

  • 할아버지 : 헤른로히 프리울리(Hunroch or Henrok, Margrave of FRIULI)
  • 할머니 : 파리의 인겔트루드(Engeltrude de Paris, 인겔트루드의 친정어머니는 샤를마뉴의 딸 아델라이드였고, 아버지는 파리후작 베게는 파리백작 기랄드(Girard (Count) of PARIS)와 로트루드의 딸이다. 로트루드는 피핀 3세의 형인 카를로만의 딸이었다.
  • 아버지 : 프리울리 후작 에버하르트(Eberhard, Marquis of Friuli, 810? ~ 864)
  • 어머니 : 프랑크의 기셀라(Gisele or Gisela, Princess of Frank, ? ~ 874)
  • 누이 동생 : 프리울리의 유디트
  • 누이 동생 : 헤드비가 드 프리울리
  • 딸 : 기셀라(Gisele De Friuli, 881년 - 910년 1월 3일)
  • 사위 : 에버하르트
  • 외손자 : 베렌가리오 2세
  • 외조부 : 경건왕 루트비히

주석[편집]

  1. 대머리왕 카를 2세는 그의 외삼촌이었다.
  2. 1815a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 임
카를로 3세 뚱보왕
롬바르디아의 왕
귀도, 람베르토, 아르놀포, 로돌포와 대립
888년900년
후 임
루트비히 3세
전 임
루트비히 3세
롬바르디아의 왕
루트비히 3세, 로돌포와 대립
905년 - 924년
후 임
우고
전 임
카를로 3세 뚱보왕
루트비히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888년891년(명목상)
905년924년
후 임
스폴레토의 구이도
로돌포
오토 1세
(수십 년간의 공위기 이후)
전 임
헤른로히 3세
프리울리 후작
874년 - 890년
후 임
왈프레도
전 임
왈프레도
프리울리 후작
896년 - 9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