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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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
Charlemagne2.jpg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800년 ~ 814년
별명 대제
다음 황제 루트비히 1세
카롤링거 왕조
피핀 가문
카롤링거 가문
베르됭 조약(843) 이후
v  d  e  h

카롤루스 대제(740년, 742년 또는 747년 ~ 814년 1월 28일, 독일어: Karl der Große, 라틴어: Carolus Magnus) 또는 샤를마뉴(프랑스어: Charlemagne, 영어: Charles the Great, 스페인어: Carlomagno)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장했다.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반대되는 신성로마제국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카롤루스 대제의 국내외적인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재임연표에서는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이어 동생인 카를로만과 함께 왕국을 통치하였으나 후에 사이가 나빠지자 전쟁의 위기가 닥쳐왔으나 카를로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비를 넘겼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발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카롤루스 대제는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의 뒤를 이어 ‘카를 대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카를이라는 이름은 라틴어인 ‘카롤루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실성 여부는 의심스러우나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의 기원을 카롤루스가 세운 왕국의 전통으로부터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카롤루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초기 생애

랭스 대성당에 묻힌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의 묘

카롤루스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와 레온 출신 베르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베르타는 모계로 메로빙거 왕조의 외손이었다. 카롤루스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피핀 2세의 서자였으나 적모와 배다른 조카들을 격퇴한 뒤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어 사라센 군의 침입에 항거, 프랑크 왕국을 구원하여 명성을 쌓았고, 카롤루스가 어렸을때 아버지 피핀은 왕족과 그의 형제들과의 싸움을 통해 권력을 차지했고 751년에는 교황 자카리아의 승인을 받아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이 되었다. 한편 그는 소년기에 아버지 피핀이 형제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자랐다.

그는 부왕을 닮아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욕심도 배우게 되었다.

[편집] 유년기

754년 자카리아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스테파노 2세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는데, 이때 카롤루스는 국왕의 장자 자격으로 교황을 영접한다.

스테파노 2세피핀과 그의 아들인 카롤루스, 카를로만에게 왕호를 수여했고, 이에 피핀스테파노 2세에게 교황의 영지 내에서 롬바르드족의 축출을 약속한다.

이후 피핀760년부터 아키텐 지역으로 해마다 진출하면서 피레네 산맥까지가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확인하였고 그 원정에는 언제나 카롤루스가 동행하였다. 부왕 생전 귀족가의 딸 이멜트루다와 결혼했으나 그가 기형아인 곱사등이 피핀을 낳자 카롤루스는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고, 랑고바르트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둘째 딸 데시데리아와 재혼했다. 그러나 771년 데시데리우스가 자신과 동생 카를로만 2세의 경쟁에서 동생 카를로만의 손을 들어주자 카롤루스는 데시데리아를 폐하고, 히스파니아 백작의 딸 힐데가르트와 재혼하였다.

[편집] 통치의 시작

772년 교황 아드리안을 방문
모눌리스 대성당의 샤를마뉴 벽화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카를로만 2세와 왕국을 분할하여 통치하였으나, 771년에는 동생 역시 죽어 단일 통치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편을 들지 않고 동생 카를로만의 편을 든 랑고바르트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를 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였으며 점령한 이탈리아의 일부를 로마 교황에게 기증했다.[1] 772년부터 804년까지 몇 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작센족의 정복하였으며,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도 정복하였다. 또한 스페인 국경에 변경령을 설치하고, 바이에른케른텐 병합하였다. 그리고 아바르족·벤드족을 정복하는 등,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아울러 중앙에서 그라프·순찰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지방 봉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지배한 부족에게는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켜서 사상적 통일을 꾀하기도 했다.

[편집] 즉위와 전쟁

[편집] 정복 전쟁

그의 치세기간을 기록한 로쉬 수도원의 문서
조카 롤랑 외 12기사에게 충성 맹약을 받는 장면 (15세기 작품)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피핀 3세의 죽음을 계기로 아키텐이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카롤루스는 재빨리 군사를 파견하여 아키텐을 정벌하고 공작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형제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카를로만 2세는 사망했고 결국 카롤루스가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카롤루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령의 영토는 얼마되지 않았으며, 일부 지역을 제외한 롬바르드 왕국령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772년 카롤루스는 니더작센베스트팔렌 지방에 거주하던 작센족을 공격했다. 775년부터는 정복 전쟁과 함께 작센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프랑크 왕국에 자연스럽게 흡수시키려는 시도도 병행하였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무어인과의 전쟁

778년 여름, 카롤루스는 이슬람계 우마이야 왕조가 통치하던 스페인으로 진격하여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결국 프랑크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을 개시하던 중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롤랑의 노래》이라는 시가 문학에 등장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작센족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카롤루스는 18회에 걸쳐 작센족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788년 카롤루스는 바이에른 공작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동부에 남아 있는 게르만족을 직접 통치하였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에 속해 있던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계 부족 국가들도 프랑크 왕국의 간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다섯째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를 데리고 축성받으러 가는 샤를마뉴

한편, 781년 카롤루스는 재차 로마를 방문해, 교황에게 자신의 두 아들인 피피노루트비히에게 축성케 하였다. 그리고 피피노와 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위를 수여하였다.[2] 또한 비잔틴 제국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비잔틴 제국이 다스리던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우호 관계는 깨어졌다.

[편집] 서로마의 황제

[편집] 황제 즉위

로마에서 제관 수여 장면(800년 12월 25일)
황제 카롤루스라 새겨진 프랑크왕국 동전 (812-814년)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카롤루스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비잔틴 제국 황제의 간섭을 받고 있었고 로마 교황은 비잔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그 적임자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를 선택했다.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인 카롤루스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반대파를 제거하고 교황에게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카롤루스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서로마의 황제로 임명하였다. 그는 짐짓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제관을 수여받았다. 이로서 서로마제국의 부활이 선언되었으나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엘 1세 랑가베는 카롤루스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 즉위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는 대내외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분명히 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며 동시에 이후 유럽의 국가들의 이상적인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편집] 카롤링거 르네상스

793년부터 812년 사이에 쓰인 프랑크 왕국의 동전

794년 카롤루스는 독일 남서부의 아헨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짓고, 이곳을 사실상의 수도로 정했다. 카롤루스는 자신의 궁정을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아인하르트와 영국의 앨퀸과 같은 학자들이 초빙되었다. 카롤루스는 이에 힘입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새로이 창설하였다. 또한 올바른 종교 관념과 도덕성을 중시했으며, 올바른 관념에 대한 왜곡을 경계하여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에 따른 문화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나온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인들과 교황의 전권 대사가 성상 예배를 찬성하는 니케아 공의회(787)에 대항하고, 성상 파괴령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을 실었다.

한편, 각 지방에서 통치자를 대리하는 사람은 백작과 주교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카롤루스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단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전례를 깨고 왕의 명령을 글로써 포고하였다.

카롤루스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작은 부족의 율법을 반영하여 수정하고, 가장 다양한 방면에 적용시켜, 모든 계층에게 내려진 특수한 법령이기도 했다.

[편집] 말년

말년에 이르자 카롤루스의 제국도 조금씩 쇠퇴해가고 있었다. 신권이 날로 성장하였으며, 방대한 영토를 관리할 경제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르만족 등 북방의 새로운 부족들이 해안을 자주 침공하였다.

806년 카롤루스는 프랑크의 관습대로 제국을 분할해 모든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 첫째 아들 등이 연이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살아남은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그의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이후 아헨으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헨의 한 성당 지하에 매장되고 그의 능은 19세기에 발굴되었다.

[편집] 사후의 영향력

카롤루스(15세기 프랑스 작품)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3개로 분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는 스스로 카롤루스의 계승자라 자처했으며, 교황 파스칼리스 3세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카롤루스를 성인으로 추증(追贈)했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필리프 2세가 카롤루스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리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중세 유럽과 르네상스 시대의 각종 민담과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롤랑의 노래》와 같은 민간의 전설이나 시가 문학에서도 카롤루스가 등장하며, 오늘날 서유럽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편집] 개인 기록

[편집] 탄생일과 탄생장소

샤를마뉴

일반적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탄생년은 740년 또는 74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742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은 그가 죽은 후에 기록되었다. 또 다른 설은 747년 4월 2일에 태어났다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부활절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그 날이 부활절이란 기록이 전혀 없으며 그저 대제를 기리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는 추측이 뒤따르고 있을 뿐이다.

어떤 논평자들은 그가 748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에 중심을 두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카롤루스 대제의 정확한 탄생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나마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이 747년 4월 1일 또는 15일 이후 아니면 748년 4월 1일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메로빙거 왕조카롤링거 왕조가 생겨난 에르스탈에서 태어났으며 7살이 될 무렵 유필레로 이사하였다. 그가 프럼, 듀렌, 가우팅, 아헨으로 이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대부분의 역사책에서는 유필레로 기록되어있다.

[편집] 사용한 언어

카롤루스 대제가 사용한 모어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리프리안 프랑크의 독일 사투리를 썼다는 설도 있으나 언어학자들은 그의 신원과 연대를 보면 다르다고 한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그가 고대 프랑크 왕국이 멸망한 때인 742년(또는 747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대 프랑크어를 쓰지 않았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외 카롤루스 대제는 모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편집] 외모

카롤루스 대제가 살던 시기에 쓰인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위대한 카롤루스의 삶(Vita Karoli Magni)을 쓴 아인하르트는 제 27장에서 그에 대해 상세히 썼다.

7피트에 달하는 장신에 매우 튼튼한 체격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크고 또렷한 눈에 코는 보통 사람보다 약간 컸으며 흰머리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를 내서 청명한 느낌을 주었으며 보통 남자의 목소리보단 조금 더 높은 음을 내었으며 짧고 굵은 목에 조금 배가 튀어나왔다. 대제는 몇 년간 몸살 때문에 운동을 못했지만 그 이전엔 즐겨했다. 대제는 의사들의 조언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끝까지 매달려 하고야 말았다. 그는 의사를 매우 혐오했는데, 그 이유는 의사들이 고기를 구워서 먹지 말고 삶아서 먹으라는 조언을 계속해댔기 때문이다.

아인하르트의 묘사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대제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와 8인치짜리의 동상을 보면 이와 일치한다. 또한 카롤루스 대제가 7피트(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6피트 3인치, 즉 190.50센티미터)에 이르는 장신이라는 것도 그리 부풀려 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1861년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대제의 무덤을 열어 뼈를 다시 맞추어 본 결과 카롤루스 대제의 키는 정확히 74.9인치(192센티미터)였다.

[편집] 의상

카롤루스의 흉상
1112년/1114년독일에서 그려진 샤를마뉴의 초상화

아인하르트의 글에 따르면 카롤루스 대제는 화려하고 귀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프랑크족의 전통의상을 입었다고 한다.

대제는 한 마디로 말해 프랑크족의 전통의상을 입었다. 리넨섬유의 셔츠와 바지, 그 위에 실크로 만든 가두리 장식의 튜닉을 걸쳤으며 또 벨트를 차고 있었고 추위에 대비해 수달가죽과 담비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몸에 꼭 맞게 입고 있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파랑망토를 매고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 대개 그 칼자루에는 금이나 은 장식이 박혀있었는데 대제는 연회를 열 때나 사절단을 환영할 때만 화려한 칼들을 찼었다.

대제는 아무리 그 옷이 멋지고 화려하더라도 외국의상이라면 무조건 경멸했다. 또 그런 옷들을 전리품으로 수집하는 것도 금지했다. 대제가 외국의상을 입은 적은 딱 두 번인데, 한 번은 교황 아두리아누스의 요청으로, 또 한 번은 아두리아누스 교황의 다음인 교황 레오를 기쁘게 하려고 로마양식의 신발, 튜닉과 망토를 입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화려한 의상을 입지 않았는데, 그가 그러한 의상을 입을 때는 연회나 사절단 환영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 날에는 자수와 보석이 박힌 옷과 신발 입고 황금색 단추가 달린 망토를 걸치고 왕관을 입었는데, 아인하르트가 언급했듯이 그는 그런 의상을 싫어했다. 평소 카롤루스 대제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수수한 의상을 입었다고 한다.

[편집] 12명의 성기사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을 보호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따라 이탈리아로 향해 진격했었는데, 이때 당시 12명의 성기사와 함께 갔다고 한다. 이들을 지칭하는 팔라딘(Paladin)의 본래 뜻은 카롤루스 대제의 측근이자 그를 보호하는 용사라는 뜻이다.

  1. 아스톨포(Astolpho)
  2. 페룸부라(Ferumbras or Fierabras)
  3. 플로시마르(Florismart)
  4. 가넬롱(Ganelon) - 롤랑을 배신하여 단테신곡에서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묘사된다.
  5. 마우그리스(Maugris)
  6. 나모(Namo or Nayme)
  7. 오기에르(Ogier the Dane)
  8. 올리비에(Oliver)
  9. 오투엘(Otuel)
  10. 리날도(Rinaldo)
  11. 롤랑(Roland)
  12. 공석 - 이 자리에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는데, 카롤루스 대제 자신이라는 말도 있으며 그외 다른 인물들 중 한 명이라는 설도 있다.

[편집] 가계

샤를마뉴와 그의 장남 곱사등이 피핀(오른쪽), 사관 (가운데 아래)
  • 부왕 : 피핀 3세(715~768)
  • 모후 : 레온의 베르타(큰 발이라는 별칭이 있었음, ?~783)
  • 처 : 이멜트루다
  • 처 : 데시데리아, 랑고바르트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딸
  • 처 :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750? ~ 783)
    • 차남 : 피핀 카를로만 또는 피피노(771~810, 이탈리아의 왕)
    • 삼남 : 청년왕 샤를(772~811), 프랑크의 샤를 2세, 소샤를이라고도 부름
    • 사남 :
    • 오남 : 로타르(태어나자 마자 죽음, 루트비히 1세의 쌍둥이 형)
    • 육남 : 루트비히 1세(778-840), 신성로마황제(814-840), 동프랑크의 왕(814-840), 경건왕(자비왕)
    • 딸 : 아델라이드
    • 딸 : 베르타, 샤를마뉴의 궁정시인 앙겔베르트와 결혼
      • 외손 : 니타르트
    • 서자 : 드로고 주교(Drogo, 800?~855)
    • 서자 : 후고 주교(Hugh, 800?~844)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바티칸의 기원
  2. 그러나 장애가 있던 장남 곱사등이 피핀에게는 왕위수여가 제외되었다.

[편집] 바깥 고리

제1대 신성로마황제
800년 12월 25일 - 914년
후 임
루트비히 1세
전 임
피핀 3세
프랑크의 왕
768년 - 814년
후 임
루트비히 1세
전 임
데시데리우스
랑고바르드의 왕
774년 - 781년
후 임
피피노
전 임
타실로 3세
작센의 왕
775년 - 790년
후 임
샤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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