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의 마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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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카노사 (우측)

토스카나의 마틸데 (영어: Matilda ,이탈리아어: Matilde, 라틴어: Matilda; 1046년1115년 7월 24일)는 이탈리아의 여자 귀족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서임권 분쟁(Investiture Controversy)을 벌이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강력한 지원자였다. 그녀의 영지인 카노사 성에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군사적 업적으로 기억되는 몇 안되는 중세 여성 중 하나이다. 세습되는 카노사 성을 물려받은 이후 마틸다 카노사 (Matilda of Canossa)로 불리지만, 영어로는 마틸다 투스카니(Matilda of Tuscany)로도 불린다.

어린 시절[편집]

마틸데의 아버지는 레지오, 모데나, 만토바, 브레시아, 페라라 등에 영지를 가진 이탈리아의 귀족 보니파치오 3세이다.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상 로렌의 공작이자 의 백작인 프레데리크 2세의 딸이다.

마틸데의 출생지는 분명치 않으며, 막내로 태어난 마틸데는 아버지가 1052년에 암살되고, 1년 후(1053)엔 첫째 언니 베아트리체 마저 사망한다.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자식들의 유산을 지키기 위하여 하 로렌의 공작 고드프리 3세와 재혼한다. 같은 시기에 마틸데는 의붓형제며 고드프리 3세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 '곱추' 고드프리와 약혼 중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리체가 그의 적과 승낙없이 결혼하자 격분하여 1055년초 봄, 이탈리아로 군대를 파병하는데, 4월에 베로나에 도달, 부활절에는 만토바에 이르게 된다. 이에 베아트리체는 하인리히 3세에게 해명을 위한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황제가 이를 허락하자 그녀의 어린 아들 프레데리크와 여정을 떠난다. 황제는 베아트리체가 알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결국 그녀를 가혹한 감옥에 가두게 된다. 프레데리크은 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며칠만에 사망하게 된다. 프레데리크의 사망으로 8살인 마틸데는 생부가 남긴 거대한 영지의 유일한 상속인이 된다.

아내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고드프리는 하인리히 3세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반란을 부추기기 위해 독일로 돌아가 플랑드르의 보두앵 5세와 황제를 압박한 결과 하인리히 3세가 곧 사망하는 1056년 중반까지 평화로운 시기가 오게 되었다.

마틸데의 가문은 11세기 교황 스테파노 9세, 니콜라오 2세, 알렉산데르 2세로 이어지는 교황 선출 논쟁에 연관되게 된다. 그녀는 1059년 교황 반대파로부터 니콜라오 2세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의 군대와 함께 교황을 수행하며 로마로 첫 여행을 떠나게 된다.

마틸데는 아르뒤노 델라 파둘레의 후견 아래 승마와 무술을 배웠으며, 이 기간 중 마틸데는 의붓오빠 고드프리와 결혼하여 1071년 딸 베아트리체를 낳는다. 사실상 존재하는 모든 마틸데의 전기에는 베아트리체가 첫 돌이 지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하나, 미켈란젤로와 동시대의 보학자들은 베아트리체가 생존하였다 주장하였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 자신도 마틸데와 베아트리체의 후손임을 주장하였다. 당대의 카노사 백작도 미켈란젤로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미켈란젤로가 유산을 탐낸 것으로 보고 마틸데는 후손이 전혀 없다 단정하였다.

고드프리 4세는 아버지인 고드프리 3세1069년 사망한 후, 마틸데와 사이가 소원해져, 독일로 돌아가 하 로렌(Lower Lorraine)의 공작이 된다.

성 베드로 성당(로마)에 있는 마틸다의 전신상

죽음[편집]

이탈리아 정치의 한 시대를 풍미하던 마틸데는 1115년 통풍으로 사망한다.

17세기 그녀의 유해는 바티칸으로 옮겨져 현재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마틸데와 하인리히 4세의 이야기는 루이지 피란델로에 의해 희곡 엔리코 4세(Enrico IV) 로 창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