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튼 기사단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튜튼 기사단 또는 독일 기사단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본부를 두고 있는 로마 가톨릭 종교기사단이다. 튜튼 기사단이란 이름은 중세 십자군 원정때 주로 독일 출신 기사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편집] 역사
12세기 말 팔레스타인 아크레에서 처음 결성되었고 이후 다른 종교기사단 (성전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등)과 함께 십자군 국가에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였고 십자군의 중요한 항구 거점인 아크레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기독교 세력이 중동에서 축축당했을 때 튜튼 기사단은 1211년 트란실바니아로 옮겨왔고 쿠만족에 대항애 헝가리 왕국을 방어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1225년, 교황의 힘을 입어 헝가리왕을 축출하려고 시도하다가 추방당했다.
이후 마조비아의 콘라트로 부터 프로이센지역을 정복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북쪽으로 옮겨가 이주해오는 기독교인들을 규합하여 이교도 프로이센 정복에 나섰다. 1233년 부터 약 50년간 계속된 기사단의 프로이센 정복은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을 거의 몰살한 뒤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사단은 점령한 영토를 교회에 봉헌하고 곳곳에 성채를 세워 군사적, 경제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독일 중부지방에서 농민들을 이주시켜 이 지역에서 살게 했으며 폴란드와 독일의 귀족들을 자신들의 가신으로 끌어들여 기사단의 지배를 더욱 확실히 하였다. 특히 교황이 기사에게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허락하자 기사단은 이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여 더욱 강력해 졌다.
튜튼 기사단은 123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을 흡수하고 프로이센에서 에스토니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 그 이후 러시아 정교회 지역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1242년 노브고르드의 알렉산드르 넵스키에게 패배하여 좌절되었다.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이 아크레에서 멸망하자 튜튼 기사단은 이교도 리투아니아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이교도와의 전투는 항상 처절했다. 그러나 기사단은 리투아니아를 완전히 복속하지는 못하였다. 기사단장 빈리히 폰 크니프로드(1351-82) 시절, 튜튼 기사단은 그 최대 판도를 맞게 되는데 그 영토가 발트 해 연안의 쿠를란트, 리보니아, 에스토니아와 폴란드 단치히 지역, 동포메른 지방 및 독일의 중남부지역, 리투아니아의 사모기티아등에 이르러 동부 유럽의 최강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14세기에 들어와서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군의 위협을 받았다. 리투아니아 대공령의 요가일라 대공은 튜튼 기사단때문에 발트해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던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한편, 폴란드의 여왕과 결혼하였다. 폴란드와 힘을 합친 리투아니아는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대패시켰다. 이 전투 이후 기사단은 사모기티아 북서부를 빼앗기고 점차 그 세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30년 전쟁으로 더욱 영향력을 잃고 결국 폴란드 점령지역 대부분도 상실하였다. 이 때 부터 기사단은 폴란드인도 기사단으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독립적인 지위를 잃고 폴란드왕의 봉신이 되었다.
1525년 기사단장 알베르트는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프로이센의 영토를 상실했다. 이후에도 리보니아와 신성 로마 제국에 몇몇 영토가 남아 있었으나 곧 리보니아도 잃고 말았다 이후에도 계속 몇몇 기사단령이 남아있었지만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었다.
나폴레옹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1834년 기사단을 다시 부활시켰고 1929년에는 완전히 정신적인 명예 가톨릭 단체로 변신했다. 현재도 기사단원은 명예직으로 남아있으며 비엔나에 본부를 두고 있다.
기사단의 문장은 하얀 바탕에 검은 십자가 모양으로 나중에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의 군사적 상징으로 차용되었고 나치는 독일 민족주의의 선전의 소재로 기사단을 이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