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퀼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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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이유作(1792년), 상 퀼로트 분장을 한 가수 슈나르

상 퀼로트(Sans - culotte)는 프랑스어로 “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프랑스 혁명의 추진력이 된 사회 계층이다. 주로 수공업자, 장인, 소상인, 근로자 등 무산 시민으로 당시 파리에서는 빈곤층에 속했다.

개요[편집]

상 퀼로트 (왼쪽), 퀼로트를 입은 병사(오른쪽)의 비교

‘퀼로트’는 당시 귀족들이 일반적으로 입었던 하의였다. 그리하여 긴 바지를 입은 서민을 귀족이 바보 취급하면서 “상 퀼로트”라고 불렀다.(핫바지와 같은 식으로) 반면 노동자는 불공평한 신분 제도에 반대하는 의미를 담아, 반대로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이렇게 부르게 된다.

상 퀼로트토 계층은 불황이나 빵 가격 상승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참정권은 커녕 모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의 도래는 상 퀼로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풍문으로 비롯된 하극상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7월 14일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9월 학살 등 참혹한 혁명의 폭력 양상은 모두 그들에 기인한 것이다.

파리의 상 퀼로트토는 프랑스 혁명의 불안 요소로, 부르주아 주도의 의회를 교란시켰다. 입법의회에서도 그런 성향은 달라지지 않았고, 무장 민병대가 된 그들은 종종 시위와 폭동을 일어켰고, 의회에 생활 개선을 대한 압력을 넣어 혁명을 급진화시킨다. 각 당파에서는 파리 상 퀼로트트에 영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극단적인 평등주의와 부의 재분배 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중간에 도입하려고 했던 것은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공포정치는 상 퀼로트의 열성적인 요청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자코뱅파의 종파 싸움으로 숙청되었고, 특히 상 퀼로트의 직접 행동주의의 대표주자였던 에베르 파의 처형 이후 선동자를 잃고 점점 약화되었다. 또한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를 계기로 단번에 퇴색했고, 테르미도르 반동과 이후의 총재 정부와 집권 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하여 상 퀼로트토는 혁명 주도 세력으로서의 힘을 완전히 잃고, 혁명의 주체는 부르조아지에게로 돌아왔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