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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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Charles François Dumouriez
1739년 1월 25일 ~ 1823년 3월 14일
Rouillard - Dumouriez.png
태어난 곳 프랑스 캉브레
죽은 곳 영국 버킹엄셔 터빌파크
별명 뒤무리에 장군
복무 Pavillon royal de France.svg프랑스 왕국
Flag of France.svg프랑스 제1공화국
Flag of Royalist France.svg망명군
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그레이트브리튼 왕국
Flag Portugal (1707).svg포르투갈 왕국
복무 기간 1758년 -
최종 계급 사단장
지휘 아르덴 군
북부 군
주요 참전 프랑스 혁명전쟁
서훈 내역 생 루이 훈장
기타 이력 에투알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음.
외무부 장관을 역임.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프랑스어: Charles François Dumouriez, 1739년 1월 25일 ~ 1823년 3월 14일)는 프랑스 혁명 전쟁 때의 프랑스 장군이었다. 그는 발미 전투에서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와 함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후 혁명군에 의해 버려졌고 나폴레옹 황제의 치세에는 왕당파가 되었다.

생애[편집]

그는 북부 프랑스의 스켈트 강에 위치한 캉브레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6년 전까지 그곳은 벨기에의 영토였고, 그래서 뒤무리에는 항상 자신을 프랑스어를 하는 플랑드르 토박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 앙트와네 프랑수아 뒤 뻬르리에르는 황군의 병참부로 복무를 했으며, 아들을 신중하고, 폭넓게 교육시켰다. 소년 뒤무리에는 학업을 파리의 루이 르 그랑에서 계속했으며, 1757년 로스바흐 전투에 자원함으로써 군복무를 시작했다. 그는 임무를 잘 수행했으며, 7년 전쟁에서 독일 전투를 통해 뚜렷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평화가 찾아오자 그는 얼마간의 연금과 생 루이 훈장을 받고, 대위로 전역을 한다.

뒤무리에는 당시 이탈리아 · 코르시카 · 스페인 · 포르투갈을 여행했고, 1755년 주권국가임을 선언한 코르시카 공화국의 정세에 대해 최고위급 재상 수와쥘 공작에 보낸 보고서에 힘 입은 바, 그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정복(1768~69년) 당시 파견된 프랑스 원정군 부대의 참모로 다시 재복무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중령으로 진급을 하게 된다. 1767년 스와쥘은 뒤무리에를 코르시카 군의 쇼플랭 후작 휘하의 군수참모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루이 15세 휘하의 정보기관인 스크레 뒤 르와(Secret du Roi, 비밀요원)가 되었다. 이것은 그가 외교적 역량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새로운 경력을 세울 호기로 생각하고 파리로 가서 자코뱅당에 가담하였다.

1792년 뒤무리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혁명군은 즈마프(Jemappes)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였다. [1] 북부 전선을 맡고 있던 뒤무리에가 남부 네덜란드 방위라는 정부 방침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안한 대로 네덜란드를 침공했다.(1793) 저(低)라인강 유역의 신임 오스트리아 사령관으로 부임한 작스코부르크의 조시아스 공작콜로뉴 지방으로터 4만2천명을 이끌고 와서, 뒤무리에가 배치해 둔 여러 파견부대로 파고들었다.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과 오스트리아군의 반격 앞에 철수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뒤무리에는 네덜란드 진격을 포기하고, 그가 모을 수 있었던 병사들만 데리고, 뫼즈로 돌아왔다. 양군(兩軍)은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마주쳤다. 뒤무리에는, 즈마프에서 그가 우수한 많은 병사들을 거느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적군보다 겨우 몇 천명 많은 병사가 있을 뿐이었다. 뒤무리에는 완전히 패배당하였다(3월 18일, 네르빈덴 전투) 그의 불완전한 계획은 무너져 내렸고, 루이 14세보방이 세운 국경 요새라는 강력한 전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프랑스 병력 전원은 혼란 속에서 철수하였다. 뒤무리에는, 그의 정치적 계획이 실패하였음을 입증하면서, 공화국에 대항하기로 선언하고 그의 병사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다 부하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갔다.(4월 5일) [2]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마크 엘리엇 (2005). 《벨기에》, 이현철 옮김, 휘슬러, 261쪽. ISBN 978-89-90457-67-7 “1792년 즈마프 Jemappes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뒤무리에Dumouriez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혁명군에 패배하고, 1794년 무렵 프랑스군은 벨기에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2. David Hannay (1911). 〈Campaigns in the Netherlands〉, 《 1911 Encyclopædia Britannica/French Revolutionary Wars》 “In the Low Countries, while Dumouriez was beginning his proposed invasion of Holland, Prince Josias of Saxe-Coburg, the new Austrian commander on the Lower Rhine, advanced with 42,000 men from the region of Cologne, and drove in the various detachments that Dumouriez had posted to cover his right. The French general thereupon abandoned his advance into Holland, and, with what forces he could gather, turned towards the Meuse. The two armies met at Neerwinden (q.v.) on the 18th of March 1793. Dumouriez had only a few thousand men more than his opponent, instead of the enormous superiority he had had at Jemappes. Dumouriez was thoroughly defeated, the house of cards collapsed, and the whole of the French forces retreated in confusion to the strong line of border fortresses, created by Louis XIV. and Vauban. Dumouriez, witnessing the failure of his political schemes, declared against the Republic, and after a vain attempt to induce his own army to follow his example, fled (April 5) into the Austrian lines. (저지대 국가들에서, 뒤무리에는 자신이 제안한 네덜란드 공객을 시작하고 있을 때, 저(低)라인강 유역의 신임 오스트리아 사령관으로 부임한 작스코부르크의 조시아스 공작은 콜로뉴 지방으로터 4만2천명을 이끌고 와서, 뒤무리에가 배치해 둔 여러 파견부대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프랑스의 뒤무리에 장군은 네덜란드 진격을 포기하고, 그가 모을 수 있었던 병사들만 데리고, 뫼즈로 돌아왔다. 양군(兩軍)은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마주쳤다. 뒤무리에는, 즈마프에서 그가 우수한 많은 병사들을 거느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적군보다 겨우 몇 천명 많은 병사가 있을 뿐이었다. 뒤무리에는 완전히 패배당하였다. 그의 불완전한 계획은 무너져 내렸고, 루이 14세와 보방이 세운 국경 요새라는 강력한 전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프랑스 병력 전원은 혼란 속에서 철수하였다. 뒤무리에는, 그의 정치적 계획이 실패하였음을 입증하면서, 공화국에 대항하기로 선언하고 그의 병사들을 설득하여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갔다.(4월 5일) )”

참고 서적[편집]

  • A. von Boguslawski, Das Leben des Generals Dumouriez (Berlin, 1878–1879).
  • Revue des deux mondes (15 July, 1 August, and 15 August 1884).
  • H. Welschinger, Le Roman de Dumouriez (1890).
  • Arthur Chuquet, La Première Invasion, Valmy, La Retraite de Brunswick, Jemappes, La Trahison de Dumouriez (Paris, 1886–1891).
  • A. Sorel, L'Europe et la Révolution française (1885–1892).
  • J. Holland Rose and A. M. Broadley, Dumouriez and the Defence of England (1908).
  • Ernest Daudet, La Conjuration de Pichegru et les complots royalistes du midi et de l'est, 1795-1797, Paris, 1901.
  • P. Chastain Howe, “Foreign Policy and the French Revolution”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