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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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Lee hae-chan.jpg
대한민국 대한민국제36대 총리
임기 2004년 6월 30일~2006년 3월 15일
대통령 노무현
전임: 고건(제35대)
후임: 한명숙(제37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952년 7월 10일(1952-07-10) (62세)
출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벽천리 180번지
정당 평화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학력 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
배우자 김정옥
자녀 딸 이현주
부모 아버지 이인용, 어머니 박양순

이해찬(李海瓚, 1952년 7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가, 언론인, 출판인 출신 정치인이다. 70-80년대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민청학련 사건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당하기도 했다. 이후 광장서적, 돌베개출판사 대표 등 출판인으로도 활동했으며, 1987년 한겨레 신문의 창간 발기에 참여했다.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에 입당 이후 88년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됐으며, 1988년 당시 5공 청문회를 주관한 청문회스타의 한사람이었다.

13대 총선 이후 내리 5선을 지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서울특별시 부시장과 38대 교육부 장관을 거쳐 참여정부 출범 후 2004년 6월 30일부터 2006년 3월 15일까지 제36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교육부 장관 재직 시 교원비리 근절과 집중 단속, 촌지 단속, 교사 성과제 도입, 학교폭력 단속, 무시험 대학입학 전형, 학급 정원 단축, 교원정년 단축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2012년 4월 11일에 열린 대한민국 19대 총선세종특별자치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2012년 6월 9일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경쟁상대인 김한길 후보를 0.5% 차이로 누르고 민주통합당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충청남도 청양군 출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소년기[편집]

이해찬은 1952년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 벽천리 180번지에서 공무원이던 아버지 이인용(李寅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고향은 충청북도 충주시이다. 그의 가계는 조선왕조의 왕족으로 조선 14대 왕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14대손이다. 아버지 이인용은 일본유학을 다녀왔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해방 이후 자유당 정권하에서 이인용은 야당후보로 출마, 면장(6급)에 당선 됐으며 4.19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다.[1] 이인용은 퇴임 후에도 청양 이면장으로 불렸다. 1959년 3월 청양초등학교에 입학, 1965년 2월 청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유학을 시작했다. 1965년 3월 서울덕수중학교에 입학, 1968년 2월 서울 덕수중학교를 졸업했다. .

1968년 3월 이해찬은 용산고에 입학, 1971년 2월 용산고를 제22회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유신 시대 후반과 제5공화국에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72년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를 중퇴했다.

학창 시절과 민주화 운동[편집]

1972년 이해찬은 다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고, 학생운동을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는 직접 막일 등으로 생계와 학비를 조달했다. 그러나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 75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이해찬은 생계를 위해 출판업에 종사하였다. 1978년 광장서적을 설립하고 대표가 되었다. 1979년 출판사 돌베개를 설립[2] 하고 대표에 취임했으며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출판했다. 1980년에는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1980년 5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받고 투옥되었다. 수감 2년 만인 1982년 석방되었다. 이후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그는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학생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 8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사회학 학사)했다.

정치 입문[편집]

정계 입문 초기[편집]

1987년 이해찬은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87년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내고 정계에 데뷔, 김대중이 학생운동계 인사들을 두루 영입할때 그도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때 11월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여 재야 학생운동가들의 폭넓은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1988년 국회의원 총선거에 서울 관악구에서 평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이후 연속 5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개혁정치모임 이사에 선출되었다.

1988년 5.18 광주청문회 당시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간사에 선출되었다. 당시 5공 관련자들을 집중추궁하여 청문회 스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다. 그 해 이해찬은 평민당 원내부총무에 선출되었다.

야당 개혁론[편집]

국회 진출 이후 이해찬은 한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성실하게 등원하였다. 한때 그는 여러 신문에서 의정활동 수위권 의원[3] 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1년초부터 그는 정치 개혁론을 주장했고,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야당부터 쇄신해야 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이해찬은 『신동아』 1991년 7월호에 광역의회 선거를 앞두고 "이 야당으로는 정권 교체 못한다"는 글을 기고했다.[4] 이해찬은 그 글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4] 을 가하였다.

이 일로 김대중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항의와 비난이 가해졌다. 그러나 김대중은 나중에 이해찬을 다시 받아들였다.

문민정부 시절[편집]

이해찬은 1992년 민주당 당무기획실장, 1993년 민주당 환경특별위 위원장을 지냈다. 1994년에는 안기부의 사찰과 야당인사 탄압에 관련된 비밀장부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5]

1995년 7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이해찬은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조순이 서울시장에 당선되자 1995년 7월 그는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5개월만인 1995년 12월 서울시 정무부시장직을 사퇴했다.

1995년 9월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해찬은 입당하여, 1996년 5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 1997년 7월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선거기획본부 부본부장에 선출되었다. 12월 대선에서 김대중이회창을 55만여 표의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12월 그는 다시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선거기획본부 부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12월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간사에도 임명되었다.

1998년 2월까지 이해찬은 15대 대선기획본부 부본부장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담당 간사로 활동했다.

정치 활동[편집]

국민의 정부 시절[편집]

교육 개혁 정책[편집]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입각, 이해찬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교육부 장관 재임 기간 동안 주로 고교 평준화, 연합고사 폐지, 보충수업 폐지 등의 개혁안을 추진했다. 교원의 촌지 근절 및 교원 뇌물 수수 집중 단속으로 교직 사회 비리 근절을 꾀하였고, 입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성급한 개혁으로 '이해찬 세대'를 대거 양성하여 그들이 수능에서 참패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대학교 입시 목적으로 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시행되던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고사,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하였고, 중학교에서도 1995년 폐지 이후에도 부분 잔존하던 연합고사와 학력고사, 모의고사[6] 등을 폐지하였다. 또한 각급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에 대한 불시 감사를 시행하여 촌지교사들을 해임, 파면하고 교사들의 성과제를 도입하는 등의 정책은 교육부 장관 재직 당시 학생과 학부모 등 교육 수요자에 기반한 정책이라며 일부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한다. 한편으로 그의 개혁안에 반발하는 일선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들의 반발과 숱한 비난 공세 등이 역시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으나 강행하였다. 교원 정년을 만65세에서 만62세로 단축하는 등의 교원개혁을 추진하고 완료하였다.

또한 어린이나 청소년일 때는 그럴 수도 있다고 무심하게 넘어가던 학교폭력을 최초로 단속하였다. 학교폭력 가해자, 이지메 왕따를 주도한 학생, 학생 조직폭력배인 일진, 이진과 불법 폭력서클을 집중 단속하게 하였으며, 이때 단속된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과 폭력 학생들에게 징계와 퇴학 등의 강력한 처벌을 하여 학교폭력을 근절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학교폭력 근절에 대해 교사들과 기성 사회에서는 가해 학생들의 인권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며 강하게 반발했고, 그가 교육부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학교폭력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도 주춤하게 되었다.

1999년 정년 단축조치로 교원 2만 명을 교단에서 퇴임[7] 시켰다. 교원 정년 단축으로 고령 교사들을 퇴임시킨 수는 소수였다는 이유와 함께 시대변화에 알맞게 대처하지 못하는 교사들을 교단에서 내보냈다는 점을 들며 일부 시민단체들은 그를 지지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사제관계의 붕괴와 시간적여유를 두지않은 급진적 개혁이라는 교육 관료 집단과 교원 단체와 일부 교육단체들의 심한 반발과 비판에 직면했다. 이 정책의 이면적 바탕을 두고 여전히 논란이 진행 중에 있다.

공무원 성과급 제도의 시초[편집]

교원 성과급 제도[8] 역시 도입하였다. 이해찬은 교직원에게도 성과급을 적용하여 실력이 있는 교사에게는 성과급을 주는 제도를 추진하였다. 성과급 시행에 따라 실력이 있는 교사들은 동기와 1,2기수 선배들을 제치고 먼저 호봉수가 승급되거나 교감, 교장 등으로 진급하는 일도 나타났고, 공무원에게도 성과급 적용론이 나타났다. 또한 '공직자의 임금도 삭감[8]'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이후 일반 노동자와 회사원들은 IMF 이후 성과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받거나, 실적이 부족한 직원은 고용해고조치를 당하는 데 반해 공직자와 교직원은 임용 후 노력이나 실적을 기울이지 않고도 신분보장과 승급이 된다는 점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었다.

그는 교직원에 대한 성과급 내지는 성과 제도를 적극 확산시키려 노력했다. 이는 공무원 사회로도 파급효과를 미쳤고, 무조건적인 연공 서열에 의한 승진을 철폐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교육 기득권층의 반발이 나타났다. 한 교육자 출신 인사는 '그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추진한 교육개혁 가운데 사정없이 잘못한 것이 성과급제이다. IMF 환란 속에서 국민을 옥죄는게 미안했던지 공직자의 임금도 삭감했고, 올해 들어 기본급의 250퍼센트가 깎인 것은 이미 우리가 당한 대로다.[8]'라고 성토했다.

교원들의 비난과 퇴진, 이해찬 세대의 양성[편집]

그러나 교원들과 관료들은 정년 단축과 입시제도 개혁안을 놓고 수시로 이해찬을 비판했다.

장관 재직 중 학급당 50명, 60명 이상의 과밀 학급수를 줄이려는 노력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후일 '2년 만에 초, 중등학교 학급당 정원수 35명으로 줄이는[7]' 효과를 냈다. 그러나 야간 자율학습을 없애고 월간 모의고사를 폐지하면서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겠다"고 선포해 고교 학습이 전반적으로 느슨해졌고, 이로 인해 학력 저하 시비가 일었다.[9] 이는 일본의 유토리 교육을 흉내 낸 제도라고 비판받았다.[9] 이는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과 2003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수많은 고3 학생들이 저조한 성적을 받아 재수생들 에게 밀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는 여론이 일었다. 2003년 11월 5일 시행된 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수많은 고3 학생들이 2002학년도,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재수생들에게 완전히 밀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시기의 수능을 보고 참패를 당한 학생들을 '이해찬 1세대', '이해찬 2세대', '이해찬 3세대'라고 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은 교육부 장관 퇴진 서명운동을 벌였으며[10],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서명에 동참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10] 그러나 일부 교원들은 방관하거나 참여하기도 했다.

개각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나자 교원들은 '11개 부처 장관 경질과 함께 이루어진 개각의 일환이긴 하지만 한국교총이 주관한 교육부 장관 퇴진 서명운동 끝의 일이어서 교단에서는 승리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10]'고 평하였다. 그러나 입시개혁과 교원 정년 단축, 촌지 단속 등에 공감한 일부 학부모단체는 그가 교원들의 기득권 수호의 희생양이 되었다며 그를 동정하기도 하였다.

당무와 원내외 활동[편집]

교육부 장관에서 물러난 이후 이해찬은 새천년민주당 남북정상회담지원특위위원장, 국회 한.오스트리아친선협회 회장 등을 지내기도 했고,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었으며, '평화적 집회,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민관 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2001년 5월 28일 감사원에서 보건복지부를 감사하면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보건복지부가 보험재정 적자 규모를 오판한 부분에 대하여 대통령과 국회, 국민에게 의약 분업을 시작해도 추가적인 보험재정 부담이 크지 않고 불편사항도 최소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고하고 홍보하였으며 본인 부담음 인상, 진료비 지출 억제를 통해 2000년도 2744억 적자, 2001년 이후 재정 안정을 이룰 수 있다. (건강보험공단의 방만한 운영에 대해서는) 정원 초과 1029명, 2000년 10월 특별 퇴직자에게 258억원 퇴직보상금을 지급하고 노조 활동만 하는 유급 노조전담 직원이 규정에는 11명인데 실제는 96명으로 연간 29억 원을 지급했고 임금 인상도 정부 지침인 5%의 3배에 달하는 14.2%이다. (의약분업 시행으로 약 조제비 증가와 관련하여) 의약 분업 시행으로 3500억 약 제조비가 절감될 것으로 예측했으나 2001년 7000억원 이상 증가가 예상된다.[11]

이후 국민 여론에 의해 책임 문제가 대두되자 정책을 결정한 청와대와 여당은 침묵하고 해당 공무원을 속죄양으로 만들어[11] 충돌 국면을 모면하려 하였다. 당시 청와대 사령탑은 보건복지부 담당 이태복 수석, 여당 정책의장은 이해찬 의원, 해당 장관은 차흥봉 장관이었다.[12] 이해찬은 정책 논의 과정에서 자리를 박차고 퇴장했을 만큼 원칙 주장론자였다.[12] 의회와 복지부 양측에서 책임을 서로 전가하자 화가 난 그는 정책 논의 중 자리를 차고 뛰쳐나갔다.

참여 정부 시절[편집]

참여 정부 초기[편집]

200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해찬은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반에 들어가,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친노무현 진영에서 활동하였으며, 2003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에 가담하였고, 그는 열린우리당 창당기획준비단 단장이 되었다.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입당, 창당 이후 그는 열린우리당 국회개혁추진단 단장에 선출되었다. 그밖에 한일의원연맹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2004년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노무현 탄핵안 제출 당시, 유시민 등과 함께 원내에서 강력 항의, 반발하였으나 노무현 탄핵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청문회 스타, 교육 개혁 정책과 탄핵안 저지 등으로 알려졌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2004년 9월 9일 조사에 따르면 열린우리당 정치인 가운데 호감도는 정동영 34.6%, 이해찬 22.0%, 김근태 15.4% 순으로 나오기도 했다.

국무총리 재임 중[편집]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노무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고건이 사임한 후 이해찬은 국무총리로 발탁, 청문회를 무난히 넘기고 총리에 임명되었다. 국무총리 재직 당시, 19년간 미결 과제로 남아있던 원전폐기물처리장 설치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였고, 공공기관 지방이전안을 발의, 추진하였다. 2005년 8월에는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군 지역에 산불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국무조정실 직원들을 데리고 경기도 포천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하러 갔다가 언론의 집중 비난을 받았다.[13][14] 그러나 산불대란 골프 사건은 조기에 수습되었다.

책임총리제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해찬 전 총리의 관계는 과거와 다른 측면이 있었다.[15] 노 전 대통령은 매주 열리는 국무회의에 한 달에 한 번꼴로만 참석해 국무회의 부의장인 이 전 총리가 의장 역할을 하도록 했다.[15]

갈등과 퇴진[편집]

국무총리 정무비서관실 국장 출신으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을 낸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두언은 이해찬을 향해 “역대 총리 가운데 ‘밥값’을 제대로 한 사람은 이회창·이해찬 전 총리 정도다. 대부분 법에 정해진 권한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의전총리, 대독총리에 그쳤다[15]”며 비꼬았다. 그러나 총리 재직 시절 자기 주관과 소신을 밝혀 야당, 여당과 원내외와 수시로 갈등했다.

이해찬은 ‘실세 총리’라는 평에 걸맞게 노 대통령과 생각이 다를 땐 언쟁도 불사했다.[15] “유시민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됐을 때 이 전 총리는 대통령을 찾아가 강하게 반대 의견을 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이것만은 양보 못한다’고 해 결국 물러서긴 했지만, 제도로만 존재했던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한 거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도 이 전 총리는 반대 의견을 냈다.[15]

한편으로는 제1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난하면서 국회 파행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문제없이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2년 가까운 기간동안 재임하였다. 하지만 2006년 3.1절 골프 파문으로 인해 총리직을 사퇴하였다.[16] 이때 열린우리당에서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의 성추문 사건과 유력 대선주자였던 서울시장 이명박의 황제 테니스를 공격하면서 한나라당 진영에서는 그에 대한 역대응으로 그의 3.1절 골프 파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총리 퇴임 이후[편집]

총리 퇴임 이후 이해찬은 10월 27일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에 기용되어 재입각했다.[17] 이후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열린우리당 동북아평화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7년 6월 19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으나, 대통합민주신당의 당내 경선에서 정동영, 손학규에 이어 3위에 그쳤다. 2008년 4월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 제3대 회장에 선출됐다.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했다. 2009년 시민주권 상임대표, 2011년 12월 시민통합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2011년 12월 21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됐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로 돌아왔다.

민주통합당 당대표[편집]

2012년 6월 9일 열린 민주통합당 임시전당대회에서 이해찬은 경쟁상대인 김한길 후보를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대표 수락 연설에서 이해찬은 "이제 정권교체를 향한 대장정이 시작됐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과 당원의 뜻을 하나로 모을 것"이라고 밝혔다.[18] "박근혜 새누리당매카시즘에는 단호히 맞서서 싸우겠다. 종북주의, 매카시즘 대신 정책경쟁하는 그런 선거로 임해줄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로인해 신 매카시즘 논란이 불었다.[19][20] 이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관련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총사퇴를 결의하고 민주통합당 당 대표 직을 사퇴했다.

기타 약력[편집]

서훈 경력[편집]

  • 환경기자클럽 올해의환경인상
  • 환경운동연합 녹색정치인상
  • 1996년 6월 13일 황조근정훈장
  • 2003년 청조근정훈장
  • 2002년 7월 명예제주도민증(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정 공로)

학위[편집]

어록[편집]

  • 2009년 7월 29일 이해찬은 친노 신당 논의에 대해 "섣불리 금방 결론내지 말고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지난 10년간 그렇게(각개약진) 하다가 이렇게 쫄딱 망했다. (민주세력이) 다시 집권하려면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특히 야권 연대의 필요성과 관련, "각자의 힘은 얼마 안 된다"며 "(야권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1]

저서 및 역서[편집]

저서[편집]

역서[편집]

가족[편집]

평가와 비판[편집]

이해찬 총리도 독자적 리더십 구축 못했다[15] 는 시각도 있다. 총리 시절에 자기 주관과 소신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다거나 총리로서 독자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평가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이 전 총리 역시 “대통령의 정견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총리의 속성에 충실했다[15] 는 것이다.

대학입시체제를 개혁한다고 내놓은 2002학년도 수능 시험에서 학생들의 신세를 망쳤[22] 다는 비판도 있다. 그에 의하면 '즐기는 교육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1년 열두 달을 놀고 지내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교육부 장관의 말만 믿고 따랐던[22]'탓이라는 것이다.

논란과 의혹[편집]

독일 순방당시 발언 논란[편집]

19일 헝가리에서 열린 진보정상회의 참석 후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을 방문한 이 총리는 이날 베를린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며 "조선, 동아가 나라를 흔들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밝혔다. "조선과 동아가 심지어 나라의 인사를 좌지우지한 일도 있으며, 박정희 시대엔 안기부 정보로 특종하기도 했으나 한 번도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일 없다"면서 "그러나 이젠 `밤의 대통령'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23] 그는 이어 "중앙일보의 경우 보도의 객관성을 갖춰 조ㆍ중ㆍ동의 틀에서 벗어났다"며 "하지만 조선과 동아는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역사 인식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 이어 "조ㆍ동이 이러한 인식에 머물러 있는 한 국민의 20-30%에만 영향을 줄 뿐이며, 이를 반성하지 않으면 역사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고 영원한 야당에 머물 것"이라고 주장했다.[23]

이해찬은 또 열린우리당, 특히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약간 우파적'이라고 자평한 이 총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ㆍ동은 나나 정부를 용공이나 부패로 몰려하고 수도 없이 공격하면서 나라를 어렵게 하고 국민을 호도시켜왔다"고 비판하고, "참여 정부는 이러한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조ㆍ동이 이 정권을 흔들려 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고 나라를 위한 길을 끝까지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노무현-이해찬 정부는 나라를 허술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며, 민주화 중추 세력으로서 책임지고 나라를 굳건하게 세워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23]

그러나 그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비난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조선, 중앙, 동아는 즉시 대서특필하고 반박문을 내걸고 역으로 비판하였다. 조선일보는 그가 술에 취해서 발언한 취중발언이라 역비판했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23]"다는 것이다.

골프 파문[편집]

2004년 9월 3일 경기도 포천의 한 군부대에서 대전차포 오발로 국군 14명이 사상[24] 을 당한 이틀 뒤인 9월 5일에 희생자 조문을 가기 직전 이해찬은 남서울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하고 조문을 갔던것이 뒤늦게 밝혀져 유가족들로 부터 원성을 샀다.[25]

2005년 4월 5일 식목일 행사를 마친후 강원도 양양·고성군 산불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이해찬은 국무조정실장 조영택 등 총리실 간부 8명이 동석한 가운데 경기도 포천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행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野黨인 한나라당과 與黨인 민주당)에서도 대변인 성명을 통해 총리직 사퇴를 촉구하였다.[26]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 참석을 마치고 11일 국회대정부질문서 공식사과하였다. 같은해 7월 2일에는 남부지방에서 호우경보가 발령되어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하였음에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친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기도하였다.[27]

2006년 3월 1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3·1절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이해찬은 부산지역 상공인들과 골프모임을 가져 논란[28] 이 되었는데, 이후 野黨인 한나라당민주노동당 그리고 與黨인 민주당 등 정치권과 언론의 구설에 올랐다.[29] 아흐래 후인 3월 10일에는 청와대가 3.1절 골프 파문 의혹을 직접 조사하기도 했다.[30] 이후 3월 15일 盧대통령이 이해찬의 총리직 사의를 수용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31] 이 사건의 여파로 공직사회 일부의 반발이 있었으나, 접대성 골프 뿐만 아니라 친척을 제외한 모든 직무관련자와는 골프를 할 수 없도록 규제 조항이 신설되기도 했다.[32][33]

이와는 별도로 시민단체 학사모로부터 김진표 등 3인과 함께 골프파문 관련, 피소당하기도 했다.[34] 또한 총리재임기간 동안 국무위원들과 경제단체장들이 만나서 골프치면서 정·재계 현안을 논하는 이른바 "골프회동"이 자주 이어졌다.[35]

교육 개혁 논란[편집]

고교 평준화의 강행을 놓고 바보평준화라는 보수 단체의 반발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들의 비난,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들의 항의와 반발이 거셌으나 이해찬은 이를 밀어붙였다. 또한 비리교원 색출, 교원 정년을 만65세에서 만62세로 단축시키면서 교직원들의 항의 시위와 퇴진운동 등의 집단반발을 사기도 했다. 평준화 정책 강행이후 학교간 그리고 학생 성적의 긍정적, 부정적 변동과 영향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폭력 및 폭언[편집]

1987년 이해찬은 기자에게 욕설과 함께 손찌검을 한 적 있었고 이는 2004년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때 공개되었다.

1992년 4월 민주당 의원 시절엔 부인과 함께 김해공항의 대한항공 발권창구 앞에서 갑자기 이해찬은‘이 XXX들 가만 두지 않겠다’는 폭언을 했다고 보도된 적이 있다.

1990년대 후반 교육부 장관 시절, 이해찬은 밤중에 취재차 집에 온 출입기자에게 “일국의 장관 집을 기자가 왜 찾아오느냐. 대한민국 장관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느냐”고도 했다.[36]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 13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관악구 을) 13대 평화민주당 31.2% 39,950표 1위 서울관악구을 국회의원 당선
제 14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관악구 을) 14대 민주당 44.7% 64,035표 1위 서울관악구을 국회의원 당선
제 15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관악구 을) 15대 새정치국민회의 44.7% 54,049표 1위 서울관악구을 국회의원 당선
제 16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관악구 을) 16대 새천년민주당 47.5% 48,751표 1위 서울관악구을 국회의원 당선
제 17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관악구 을) 17대 열린우리당 41.1% 49,673표 1위 서울관악구을 국회의원 당선
제 19대 총선 국회의원(세종시) 19대 민주통합당 47.9% 22,192표 1위 세종시 국회의원 당선

함께 보기[편집]

일화[편집]

  •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사무국장으로 이해찬이 활동할 때, 상대편인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이회창(李會昌)과 이름이 비슷하여 일부 취재진들이 혼동,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바깥 고리[편집]

참고 서적[편집]

  • 이해찬, 《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 (푸른나무, 2007)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3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1권》 (인물과 사상사, 2006)
  • 유창선, 《굿바이 노풍》 (아르케, 2007)
  • 박창식, 《쿨하게 출세하기:박창식 기자의 이해찬 인물비평》 (인물과사상사, 2004)
전 임
이헌재
(권한대행)
제36대 국무총리
2004년 6월 30일 ~ 2006년 3월 15일
후 임
한덕수
(권한대행)
전 임
강덕기
(서울특별시 부시장)
제30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1995년 7월 1일 ~ 1995년 12월 26일
후 임
최수병
전 임
이명현
제38대 교육부 장관
1998년 3월 3일 ~ 1999년 5월 24일
후 임
김덕중
전 임
한명숙
문성근 (권한대행)
제2대 민주통합당 당 대표
2012년 6월 9일 ~ 2012년 11월 18일
후 임
문재인 (권한대행)
문희상 (권한대행)
김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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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임철순,김수한
제13대 국회의원(관악구 을)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평화민주당
(관악구 갑)한광옥
후 임
한광옥(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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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 전 임
한광옥(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제14대 국회의원(관악구 을)
1992년 5월 30일 ~ 1995년 6월 30일[37]
민주당
(관악구 갑)한광옥
후 임
이상현(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 전 임
한광옥(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제15대 국회의원(관악구 을)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새정치국민회의
(관악구 갑)이상현
후 임
이훈평(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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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 전 임
이상현(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제16대 국회의원(관악구 을)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새천년민주당
(관악구 갑: 이훈평)
후 임
유기홍(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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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평(관악구 갑)
이해찬(관악구 을)
제17대 국회의원(관악구 을)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열린우리당 - 대통합민주신당
(관악구 갑: 유기홍)
후 임
김성식(관악구 갑)
김희철(관악구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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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 전 임
(신설)
심대평(공주시,연기군)
제19대 국회의원(세종특별자치시)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후 임
(현직)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1948-2014).svg

주석[편집]

  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2848462 머니투데이 2012-05-26
  2. 경제 월간지-이코노미 플러스
  3. 허원순, 《대통령으로 산다는 것》 (한국경제신문사, 2006) 211페이지
  4. 인물과사상사 편집부, 인물과 사상 2005년 8월호 (인물과사상사 펴냄, 2005) 112페이지
  5. 월간말 1994년도 1월호(통권 91호) pp192~195
  6. 1995년 폐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잔존하였다.
  7. 이용우, 진짜 실세 가짜 실세 (기문사 펴냄, 2002) 74페이지
  8. 장세진, 교단을 떠날 각오를 하고 쓴 교육개혁비판 (신원문화사, 1999) 35페이지
  9. 김영배, 《비판력 아카데미》 (웅진지식하우스, 2007) 185페이지
  10. 장세진, 교단을 떠날 각오를 하고 쓴 교육개혁비판 (신원문화사, 1999) 15페이지
  11. 허화평, 지도력의 위기 2 (새로운사람들, 2002) 582페이지
  12. 허화평, 지도력의 위기 2 (새로운사람들, 2002) 583페이지
  13.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50409082122&Section=
  1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4091048322&code=910402
  15. 한국의 총리는 왜 용이 못 됐나 한겨레 21
  16. 그 전해의 한나라당 수해 골프파문을 비판한 것에 대한 역반발이었다.
  17. 靑, 이해찬 前총리 등 특별보좌관 내정(상보)
  18. http://www.segye.com/Articles/News/Politics/Article.asp?aid=20120610021590
  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02219235&code=910402
  20. http://news1.kr/photos/161929
  21. 강병철 기자. "이해찬 친노신당 섣불리 결론내면 안돼", 《연합뉴스》, 2009년 7월 29일 작성. 2009년 7월 30일 확인.
  22. 이용우, 진짜 실세 가짜 실세 (기문사 펴냄, 2002) 73페이지
  23. "전두환-노태우 용서해도 조선-동아 용서 못해" 프레시안 2004-10-19
  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27818 포천부대 대전차포 오발 14명 사상
  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49896 李총리, 오발사고 희생자 조문 前 골프
  2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968882 李총리, 산불악화로 … 연합뉴스 김화영기자
  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7&aid=0000023404 李총리 수해속 '골프회동' 논란
  2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24365
  29.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76913 3·1절에 노동자들은 파업하는데 총리는 골프치나?
  30.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2664
  31.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60314000365&ctg1=01&ctg2=&subctg1=01&subctg2=&cid=0101080100000&dataid=200603141746000388 노대통령, 이총리 사의 수용…"선거 망칠라" 현실론
  32.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090428
  3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6082812091
  3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9&aid=0000133231
  35.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5103010530924566&outlink=1 李총리-경제단체장 전격 골프회동
  36. "'버럭 이해찬' 과거에도 기자에 욕설과 손찌검", 《중앙일보》, 2012년 6월 6일 작성. 2012년 6월 7일 확인.
  37.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1995년 6월 30일 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