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연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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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
(한국 전쟁의 일부)
참수리호 모형이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수리호 모형이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날짜 2002년 6월 29일
장소 대한민국 대한민국 북방한계선
결과 뚜렷한 결과 없음.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정장 해군 대위 윤영하
부정장 해군 중위 이희완
함장 대위 김영식†
병력
초계함 2대
고속정 4대
경비정 2대
피해 규모
참수리 고속정 357호 침몰
6명 전사
18명 부상
등산곶 684호 대파
3~13명 전사
25명 부상 그외 미확인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대한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어 30분 가량 진행된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손상을 입었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 중 침몰하고, 승무원 중 6명이 사망, 18명이 부상하였다. 북한군의 등산곶 684호도 예인되었고,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국경 침범의 대응 방식에 대한 반성과 논란이 일었으며, 교전수칙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개요[편집]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 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해상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1]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차단기동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한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사격으로 대응하다가 고속정이 침몰됐고, 그 후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소령은 총상으로 한쪽 종아리의 근육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였다.[2]

당시 대통령 김대중은 6월 30일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경기를 관람하고 7월 1일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러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3][4] 김대중은 출국 자리에서 "정부는 안보태세를 더욱 굳건히 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西海交戰)이라고 부르던 것을 2008년 4월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5]

2007년 6월 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고속함 1번함이 윤영하함으로 명명되어 진수되었으며, 2009년 6월 2일 실전배치되었다. 2009년 9월 23일 STX조선해양에서 2번함이 한상국함으로, 3번함이 조천형함으로 각각 진수되었다.[6] 2009년 12월 11일 한상국함과 조천형함에 이어 STX조선해양에서 4번함인 황도현함, 5번함인 서후원함이 각각 진수되었다

사고 경위[편집]

전력 비교[편집]

남북한 함정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7]

남한
  • 참수리 고속정 357
제원: 길이 37m, 높이 6.6m, 폭 1.7m, 28명 승선, 156톤급, 최대 속력 38노트
무장: 40mm 포 1문, 30mm 포 1문, 20mm 발칸포 2문
북한
  • SO-1급 PCF(등산곶 경비정 684)
제원: 길이 42m, 높이 6.1m, 폭 1.9m, 50명 승선, 215톤급, 최대 속력 28노트
무장: 85mm 단연장포, 14.5mm 2연장포, 37mm 단연장포

교전 상황[편집]

교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8][9][10]

  • 06:30 어로보호 지원을 위해 남한의 고속정 3편대 6척 출항.
  • 09:54 북한군 경비정 등산곶 388호(155톤) NLL을 넘어 남하 시작. 대한민국 해군 253 고속정 편대 대응기동 실시.
  • 10:01 북한군 고속정 등산곶 684호(215톤) 추가 남하. 대한민국 해군 232 고속정 편대가 대응기동.
  • 10:25 북한군 등산곶 684호가 탑재된 85mm 함포로 450m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실시하던 참수리 357호에 기습 발사, 남한 232 편대 대응 사격. 이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파괴되고 윤영하 정장이 사망.
  • 10:26 후방에 있던 253·256 고속정 편대 전파사격 개시.
  • 10:30 256 편대 공격 개시.
  • 10:33 253 편대 공격 개시.
  • 10:43 제천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개시.
  • 10:47 진해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시작.
  • 10:48 제천함, 북한 스틱스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0:51 화염이 발생한 북한 경비정 다른 경비정에 예인되어 NLL 북쪽으로 퇴각.
  • 10:56 전 전력 사격 중지.
  • 11:25 제천함·진해함, 북한의 실크웜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1:45 357호 사상자 확인·구조. 357호는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 포기.
  • 11:59 참수리 357호 침몰.

교전 결과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57호에 탑승한 승무원 중 4명이 사망, 1명이 실종되고 19명이 부상하였다. 대한민국 군당국은 북한 경비정이 3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하였다.[11]

수색 및 인양[편집]

수색[편집]

교전 중에 한상국 중사가 실종되었으나, 긴장 관계를 고려해 즉각 수색 작업에 나서지 못했다.[11]

대한민국 전사자 명단[편집]

한상국은 실종 후 함체 인양 중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박동혁은 부상으로 후송된 후 치료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4명은 전투 중 전사하였다.

  • 윤영하 소령(정장, 당시 대위, 충무무공훈장 추서)
  • 조천형 중사(병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 황도현 중사(병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 서후원 중사(내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 한상국 중사(조타장, 당시 중사(진), 화랑무공훈장 추서)(7월 1일 중사 진급이 예정돼 있었으나 실종되어 진급이 취소되었다.)
  • 박동혁 병장(의무병, 당시 상병, 충무무공훈장 추서)

원인 분석[편집]

남한측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화력[편집]

참수리 고속정에는 20mm 시 벌컨포, 30mm 기관포, 40mm 기관포와 M60 7.62mm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함정은 85mm 전차포와 14.5mm 기관총을 장착하여 화력에서 월등했다. 85mm 전차포는 사거리와 명중률이 떨어지지만 한발만 맞아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데 비해서 참수리 고속정에 탑재된 무장들은 적함을 격침시키기 너무 어려웠고, 제2연평해전에서 등산곶 684호는 6척의 참수리 고속정에게 집중사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몰되지 않았다.

방어력[편집]

참수리 357호는 조타실에 85mm 포탄을 직격으로 맞고 지휘부가 타격을 입었다. 다행히 부정장의 지휘로 전투는 진행했다. 그러나 너무 약한 방어력으로 인해서 조타실 등 핵심 시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대응기동[편집]

적함이 NLL을 침범하면,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순서로 대응해야 했다. 특히 적함을 밀어내는 차단기동은 기습 받기 쉬웠고, 참수리 357호정도 차단기동 중 공격당했다.

초계함의 대응[편집]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후 무려 18분이 지나서야 초계함들이 76mm 속사포를 발사하며 전투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참수리 357호정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전투 발생 초기, 초계함들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참수리 고속정들이 사거리 안에 없었다. 결국 화력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채, 북한 고속정을 침몰시키지 못했다.

논란[편집]

황장엽은 탈북자동지회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려, “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12]

서울법대 교수 조국오연호와 공저한 책 진보집권플랜에서 연평해전과 관련, "서쪽에서는 해전이 벌어지고,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주장했다.[13]

정부 대응 비판[편집]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교전 수칙을 지시했다.[14][15] 이후 제2연평해전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교전 지침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었다.[16]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17] 군통수권자인 김대중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18]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다.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19] 국방부는 군 장례식은 장례위원장 이하만 참석하는것이 관례라고 해명하였지만[20] 해군장이었던 천안함 침몰 사건 희생자의 영결식에 이명박 대통령과 김태영 국방장관은 참석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에도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고[21][22] 이명박은 2012년 추모식에 참석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23]

보상금 논란[편집]

제2연평해전 유족은 3천100만~8천100만원의 일시금을 받았고, 38~86만원의 유족연금과 61~62만원의 보훈연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24] 이것을 두고 보수 단체에선 정부와 여성부를 보상금 지급량이 너무 적다는 문제로 비난한 바 있으나, 이당시 정부는 전사자에 대한 법 규정의 문제로 보상할 수 없었다. 2002년 제2 연평해전 당시 군인연금법으론 순직과 전사가 구분되지 않아 포괄적인 개념의 공무원 사망자로 규정, 전사자로 취급받지 못해서 추가 보상이 불가능했다.[24][25]따라서 정부는 우회적인 방안으로 국민성금을 해서 전사한 6명의 장병에게 정부 지원금 포함 해서 도합 3억5천만원의 보상금이 전달되었다.[26]

문제가 된 국민연금법은 당해인 2002년에 연금법 개정 법안을 발의하여, 노무현 정부 시절 2004년에 개정되어 전사와 일반 공무에 의한 사망이 구분돼서 전사 처리가 가능해졌으나[24]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겐 소급 처리가 되지 못하였다.[27][25] 이에 따라 제2연평해전 유가족은 전사자 사망 보상금 2억 원을 받지 못하고 3000만~6000만 원 규모의 공무 보상금을 지급 받는데 그쳤다.[28]

해당 국민연금법은 박정희 정권 시절 베트남전시 전사자가 많아지면서 국고의 고갈을 걱정한 박정희 정부는 교전 중 사망은 공무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고 사망보상금은 사망 직전 받았던 월급의 36배로 못박아 국가로 하여금 그 이상 지급할 수 없도록 했다.[26] 추가로 1967년 국가보상법 2조를 제정, 직무수행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은 경우, 국가가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였다. 1971년 대법원은 "군경과 민간인 혹은 군경과 다른 공무원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는 조항" 이라며 위헌결정을 내렸으나, 박정희 정권은 위헌결정을 낸 대법관에게 압력을 가해 퇴진시키고, 유신헌법을 발효해 이중배상 금지 조항을 헌법에 추가하였다.[29] 해당 헌법에 따르면, 군인이나 경찰 공무원 등은 국가에게 받은 손해에 대해 법률이 정하는 보상 이외의 배상은 청구할 수 없게 되어 있다.[26] 따라서 제2연평해전 사망자들은 더 이상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사망 보상금을 소급 지급하려면 특별법을 제정할 수 밖에 없다" 고 밝혔다.[30] 따라서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예우를 하는 특별법 제정이 추진되었으나, 무산되었다. 10월 14일 국방부 예비역정책발전TF팀은 공문을 보내,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 전사자 예우를 해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해당 공문에서 "각종 대침투작전과 국지전, 북한 도발에 따른 아군 전사자 등의 형평성 침해논란이 예상돼 법적 안정성 등을 위해 소급보상이 불가하다"고 밝혔다. [31][28]

사후 처리 및 사회적 여파[편집]

당시 정부의 대응[편집]

김대중 정부는 2002년 6월 30일 서해도발 과정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장병 5명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32]

이날 교전사태가 발생한 직후 임성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사태발생사실을 보고받고 NSC 소집과 함께 대응책을 마련했다. 또 이날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월드컵 3∼4위전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도 취소했다.[33]

허나 다음날인 6월 30일 독일 - 브라질간의 결승경기에 참관하여 응원을 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2002년 6월 30일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군 장병 등이 방문했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 일행 21명은 이날 합동분향소를 방문, 헌화 및 묵념하고 고(故) 윤영하 소령에게 충무무공훈장, 고(故) 조천형 중사등 사망 및 실종 병사 4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이 총리는 이어 병실을 찾아 부상장병 19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훌륭하게 싸웠소. 용감했소"라고 짤막한 격려의 말을 건넸다.[34]

2002년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서해교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로했다.[35] 7월 23일 김대중은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의 불법적이고 무도한 도발행위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36]

명칭 개정[편집]

사건은 일반적인 전투의 의미로 서해교전이라 불렸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에 격상하여 '제2연평해전'으로 불리게 되었다.[7]

대응기동 개정[편집]

무려 5단계에 이르던 대응기동 절차는 해군의 손실을 불러왔다. 참수리 357호도 차단기동 중 기습을 당했다. 기존에는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차단기동'이었는데 기습공격을 받기 가장 쉬웠다. 이에 국방부는 2004년 경고방송·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3단계로 개정했다. 이는 후에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의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

초계활동[편집]

제2연평해전에서 초계함의 늦은 대응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교훈으로 삼아, 참수리 고속정들이 초계함의 사정거리 안에서 활동하게 하여 대응을 높였다.

개량사업[편집]

국방부는 참수리 357호가 조타실에 85mm 포탄에 명중당하여 파손된 것을 보고 방어력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이에 1함대와 2함대 소속 참수리 고속정 45척이 개량되어 방어력이 향상되었으며, 화력 향상을 위해 M60(7.62mm)기관총을 K6(12.7mm) 기관총으로 교체했다. 또한 30년을 써온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하기 위해서 개발된 PKX-A를 '윤영하급 고속함'으로 명명했고, 2007년 진수되었다. 참수리 고속정이 가장 강한 화력이 40mm 기관포에 불과해, 적 함을 격침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윤영하급 고속함에는 76mm 속사포를 장착, 화력을 증강하고 대함미사일인 해성 미사일을 탑재했다

영화 제작[편집]

2013년 10월에 영화 《NLL-연평해전》[37]이 개봉될 예정이었다. 김학순 감독이 제작 지휘를 하며, 정석원, 장성원 등이 출연한다. 특히 제작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의 지원과 일반 국민의 모금 활동으로 제작비를 충당하여 제작되고 있다. 출연자와 제작진의 재능 기부로 15억 원만 모이면 3D 전쟁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으나, 1, 2차 크라운드 펀딩, 개인 투자자들의 합류로 2억 5000여 만원이 모여 제작비가 부족해졌다. 결국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2013년 4월 22일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제3차 크라운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고 있다.

관련 사건 일지[편집]

  • 1999년 6월 15일 - 제1연평해전 발생
    • 1999년 6월 7일부터 6월 15일까지 북한 경비정이 NLL을 최대 10 km 계속 넘어옴
    • 대한민국 해군은 북한 경비정의 선체를 참수리급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차단 기동"으로 대응함.
    • 15일,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선제공격하여 제1연평해전 발발. 등산곶 684호는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25호의 반격으로 반파된 채로 달아남.
    •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소령(당시 대위) 부상. "연평해전 영웅"으로 불림.
    • 북한 피해 : 최소30명사망, 70명이상부상 , 한척 침몰, 한척 반파 (당일 CNN보도)
    • 북한은 교전에서 생존해 돌아온 등산곶 684호의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함.
  • 2000년 6월 15일,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개최. 6·15 남북 공동선언이 선언됨.
  • 2002년 6월 29일 - 제2연평해전 발생.
    •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 침몰, 전사 6명, 부상 19명
    • 당시는 2002년 FIFA 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3,4위전에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터키 축구 대표팀이 대결하고 있었다.
    • 북한은 제1연평해전 당시 생존한 등산곶 684호의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하여 다시 NLL을 불법 남침.
    • 등산곶 684호의 85mm 고사포의 기습공격에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의 정장 윤영하 대위를 포함 6명이 전사.
    •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등산곶 684호의 함장 사망. 영웅 칭호를 받음.
  • 2004년 - 대한민국 해군은 연평해전을 계기로 1997년 한미연합사에서 제정된 교전규칙의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 응전 개념으로 수정함.
    •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대응에서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개정됨.[38][39]
  • 2004년 1월 - 반파된 등산곶 684호 수리 완료. 김영식 영웅호로 개칭
  • 2004년 7월 - 등산곶 684호가 다시 NLL을 침범, 대한민국 해군의 경고사격을 받고 이북으로 도주.
  • 2009년 11월 - 북한의 경비정이 NLL을 침범, 대한민국 해군의 경고사격에 조준사격으로 대응하여 교전이 일어남. 북측 경비정은 반파되어 다시 북측으로 돌아가고, 남측은 인명피해는 없었음. 대청해전 참고.
  • 2010년 11월 - 북한이 연평도 육상을 공격, 대한민국 해병 2명 사망, 민간인 2명 사망. 연평도 포격 참고.

주석[편집]

  1. 北,NLL무효 일방 선언, 《동아일보》, 1999.9.3
  2. 현재 이희완 소령은 현역으로 복무중이다.
  3. 김대통령 월드컵 폐막식 참석, 《연합뉴스》, 2002년 6월 30일
  4. 김영근,1일 한.일 정상회담 , 《한국경제》, 2002년 6월 30일
  5. 국가보훈처. "“호국영령 영원히 기억할 것”", 《나라사랑》, 2008년 7월 1일 작성, 1면 하단면. 2008년 7월 12일 확인.
  6. 정미란. "서해 연평해전 영웅들 고속함되어 나라 지킨다", 《KONAS》, 2009년 10월 1일 작성.
  7. 서해교전/남북 경비정 비교/선제 공격 北경비정, 《서울신문》, 2002.6.30
  8. 퇴각 경고하자 北 함포사격, 《매일경제》, 2002.6.29
  9. 시간대별 사태추이, 《MBC뉴스》, 2002.6.29
  10. NK조선, 2002년 서해교전 - 일지, 《NK조선》, 2013.10.30
  11. “북측 사상자 30명이상”, 《파이낸셜뉴스》, 2002.6.30
  12. " [황장엽] “총 한방 쏘는데도 김정일 재가 필요”", 《조선일보사》, 2002년 7월 10일 작성. 2009년 6월 22일 확인.
  13. <진보집권플랜> 오연호, 조국 저
  14. [해군] 교전규칙 어떻게 변해왔나, 《한국일보》, 2002.7.1
  15. 〔사설]안보구멍 왜 뚫렸나, 《동아일보》, 2002.7.2
  16. [한석동 칼럼] 서해교전 영웅들은 어디 있는가, 《쿠키뉴스》, 2010.4.27
  17. "침몰원인, 어떤 경우든 단호히 대응", 《조선일보》, 2010.4.8
  18. 제2연평해전 10년… 貶毁(폄훼)의 역사 바로잡아야, 《문화일보》, 2012.6.28
  19. [전문기자 칼럼/윤상호]피와 죽음으로 지킨 NLL, 《동아일보》, 2013.7.3
  20. 현문학,서해교전 희생장병 영결식, 총리·軍수뇌부 불참 '비난', 《매일경제》, 2002년 7월 2일
  21. 〔사설]연평해전 기념식에서 DJ 대신 反省할 사람들, 《동아일보》, 2012.6.21
  22. [제2연평해전 10주년]“대한민국은 10년간 잊고 살았다, 나라 지킨 희생을…”, 《동아일보》, 2012.6.21
  23. [제복이 존경받는 사회<6·끝>윤영하 소령 아버지의 소원], 《동아일보》, 2010.5.29
  24.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004/h2010042811005791040.htm
  25. “연평해전 보상금 3천만원? 말도 안 돼”, 《뉴데일리》, 2010.6.29
  26. 천안함 실종 병사 사망시 보상금, 민간인의 1/6?, 《오마이뉴스》, 2010.4.12
  27. 동아논평 : 제2연평해전 전사자 재보상해야, 《동아닷컴》, 2010.5.12
  28. 연평도에 쏠린 눈길,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엔 눈감아, 《해럴드경제》 2010.11.24
  29. `천안함` 국가 잘못인 경우라도 유족, 민사상 손배소 못한다, 《매일경제》, 2010.4.8
  30. 연평해전 전사자 보상 특별법 제정 추진, 《연합뉴스》, 2010.5.26
  31. [北 연평도 도발] “이러면 누가 나라위해 목숨 바치겠나”, 《국민일보》, 2010.11.24
  32. 서해교전 전사자 훈장추서, 《국민일보》, 2002.6.30
  33. <정부 긴급 대응>-청와대, 《연합뉴스》, 2002.6.29
  34. <서해교전 순국장병 조문 행렬>, 《연합뉴스》 2002.06.30
  35. 부상병 위로하는 김대통령, 《연합뉴스》, 2002.7.2
  36. 金대통령 6·29서해교전 유가족 12명 청와대 초청 위로, 《동아일보》, 2002.7.23
  37. 영화 NLL 연평해전 홈페이지
  38. <또 서해교전..과거 교전과 다른 점은>(종합), 《연합뉴스》, 2009.11.10
  39. 北 50여발 선제 공격에 南 2분간 4000여발 소나기 응사, 《동아일보》, 200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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