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목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목조(穆祖, ? ~ 1274년)는 고려의 문신으로 조선시대 추존왕이자 익조(翼祖)의 아버지이며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이다. 휘(諱)는 이안사(李安社)이다. 전주에서 살다가 지방관과의 사소한 불화로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였으나 계속 쫓아오는 관리들을 피해 국경을 넘어 원나라로 들어가 다루가치가 되었다.

생애[편집]

전라북도 전주에서 대장군을 지낸 이양무와 상장군 이강제 삼척이씨와의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그가 이양무의 장남이라 하고 다른 설에 의하면 주부를 지낸 영습이 그의 형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전주에 살았는데, 산성 별감(山城 別監)과 갈등을 빚고 삼척으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왜구의 침략을 막아냈다. 산성 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덕원, 현재의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는데, 1254년 원의 산길(散吉)이 항복을 몇 번씩 청해 오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오동(斡東, 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1255년 오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1274년 세상을 떠나 아들 이행리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1392년 7월 28일 태조 이성계에 의해 목왕(穆王)에 추봉되었다가 1411년 4월 22일 태종에 의해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에 재추봉되었다. [1]

능침[편집]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있는 경기전(慶基殿)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가 있는데 오목대는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고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태어난 유허(遺墟)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이안사의 가문은 전주에서 호족으로 대대로 이어 살았는데,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해가면서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던 이안사는 스무 살 때 전주 관기(官妓) 하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지주사(知州事)가 전주 고을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 관기를 수청을 들게 하였다. 거부하던 관기는 죽었고 죄를 이안사에게 덮어 씌웠다. 이리하여 전주 기록물에는 죄인으로 기술되었다.

당시 산성별감은 전주감영의 제2인자이고 지주사는 고려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인 주(州)의 으뜸 벼슬이었다. 또한 안렴사는 고려 때 지방장관 중에 하나였는데 안렴사는 1276년(충렬왕 2)에 안찰사로 개칭하였다. 안렴사는 관찰사, 절도사 등으로도 불렸으며 오늘날의 도지사 격이었다.

지주사는 전주 안렴사와 함께 이안사를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이와같이 신임 산성 별감(山城 別監)과 갈등을 빚자 삼척으로 이주하였으며, 이안사는 가족과 자신을 따르는 170호와 함께 강원도 삼척 미로면 활기리로 몸을 숨겨야 했다. 그곳에서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삼척은 이안사의 외가 쪽이 있는 곳이었다. 태조실록에는 목조를 따라나선 집을 170호로 표현했지만 전주군지에는 70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이안사는 삼척에서 피신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아버지 이양무 장군의 상을 당했다. 무덤을 만드니 현재의 준경묘이다.

전주에서 갈등을 빚던 산성 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 덕원, 현재의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는데, 1254년 원의 산길(散吉)이 항복을 몇 번씩 청해 오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오동(斡東, 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1255년 오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이후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274년에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묘를 만들었다. 훗날 덕릉(德陵)으로 추존되었다. 현재 이안사의 능은 함경남도 신흥군에 있다.

15세기 문헌인 '용비어천가'3장은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살으샤 왕업(王業)을 여시니”라고 이안사가 왕업을 열었다고 노래했다. '용비어천가' 1장이 “해동 육룡(六龍)이 날으사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인데, 이 노래는 세종대왕 때에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여섯 선조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노래이다.

여기서 '해동육룡'이 나오는데 '육룡'은 세종대왕의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여섯 선조를 일컫는 말이다. '육룡'은 목조(이안사)부터 시작된다.[1]

가족 관계[편집]

주석[편집]

  1.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최기호 저, 박문사(2009년, 29~47p)

참고 자료[편집]

  • 《청소년을 위한 조선왕조사》, 이병권 저, 평단문화사(2006년, 11~57p)
  • 《조선왕조실록》, 영광과 좌절의 오백년, 이상각 저, 들녘(2009년, 97~145p)
  •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저, 휴머니스트(2014년, 23~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