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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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왜구들의 활동 범위
왜구들의 약탈을 그린 회화 (16세기)

왜구(倭寇, 영어: Japanese/dwarf pirates)는 통상적으로 고려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 침략에 실패한 이후인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중국 대륙의 연안부나 일부 내륙 지역을 약탈하고 밀무역을 행하던 무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왜구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한반도중국 남부와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대마도, 이키 섬 주민과 규슈 주민들은 고려원나라 침략이후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통상로까지 막히자 복수심과 생계를 위해 해적질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왜구의 시초이다. 이처럼 초기 왜구의 구성원들은 가난한 규슈의 농민들이었다.[1] 이후 왜구는 거대한 밀무역 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직화되고 거대화 되었다. 이는 배후에 밀무역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규슈시코쿠 일부 지역 영주들의 후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에는 한반도중국 남부 해안가를 따라 단순 약탈 위주로 활동하였으나 후에 노예 매매와 밀무역 등으로 큰 이익을 남기는 등 대규모로 기업화 되어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게 된다.

후기의 중국남부 해안 왜구 상당수는 중국인으로 구성된 해적이 많았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왜구가 특히 극성을 부린 것은 당시 일본 내부적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후에 들어선 무로마치 막부는 밀무역으로 인한 이익 때문에 이를 눈감아주었고, 쇼군가의 힘이 약해 지방 영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 후에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는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여 왜구가 거의 근절되었다. 이 때 왜구가 감소하는 주 이유 중 하나는 막부의 적극적인 왜구 근절 노력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유입된 서양세력과의 무역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규슈 영주와 막부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이들의 활동 시기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사이에 가장 심하였고,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삼국 시대에도 왜구가 신라를 침입했다고 하는데 이 때 침입한 왜구는 가야와 왜의 연합군으로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왜구와는 성격이 다른 왜국에서 정식 파견한 정규군이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신라구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2] 확인된 바는 없다.

주된 약탈물은 식량이었으며 지방에서 조세를 거두어 한성으로 올라가는 공선 등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그 규모는 100척에서 500척까지 이르는 선단을 이루어 연안 마을을 습격하는 형태였으니 때로는 내륙 깊숙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간 총 529회의 침입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침구 기사가 312건이 나온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현재까지도 왜구라는 명칭은 일본인을 폄하하는 명칭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명나라 시대에 남방과 주변 지역을 통제하지 못하여 왜구에 의하여 자주 점령되었다. 18세기 무렵 청나라가 들어서며 푸젠성, 대만, 베트남 인접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외적을 방비하게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왜구의 침략이으로,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고 국가 기반은 흔들였다.

삼국 시대의 왜구[편집]

가야와 연합한 왜는 신라을 공격하여 금성을 함락시킨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광개토대왕 재위시, 왜구는 가야를 대동해서 금성을 함락하고 다수의 신라인을 잡아갔다. 이에 신라 조정은 고구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 군대는 가야의 종발성, 현재의 김해 지역을 함락하여 왜구를 대마도로 밀어 냈다. 고구려 조정은 김해와 그 주변에 신라 왕족을 관리자로 파견하여 영토 안정을 꾀하였다. 또한 신라 수도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외적에 방비하였다.

고려 시대의 왜구[편집]

고려 시대에도 왜구는 바닷길을 이동 경로로 하여 주변 지역을 침탈하였다. 기록에는 왜구의 침입은 1223년(고종 10년) 5월에 왜구가 김해 지방에 침입하였다는 것이 처음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 기록에 나타나는 왜구의 침입은 10여 차례 정도 이다. 충정왕 2년(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의 왜구[편집]

건국 초기의 왜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393년(태조 2)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에 비교적 많은 사례들이 나타난다. 또한 같은 해 11월 도평의사사에서 왜적 피해가 줄어 든 것이 병선의 위력이라고 언급한 내용[3]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의 왜구 방어 대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4] 1394년(태조 3)에도 왜구와 왜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보다는 조선 수군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5]1396년(태조 5년)에는 왜구가 동래(東萊)의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였다. 1406년(태종 6년)에는 전라도에, 1408년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도 하였다. [6] 1419년(세종 1년)에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3포를 폐쇄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부산포, 웅천, 염호 등 삼포를 개항하여 사절(使節)과 상왜(商倭)를 왜구와 구별하여 일본인들과의 정식적인 무역을 유도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조치와 유화책에 따른 교린 관계 정책을 펼쳤지만 삼포왜란(1510년), 사량진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 등 계속적으로 크고 작은 왜변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 성명이 여러 등장한다. 그 가운데 평씨는 일본 황족 출신이라고 하는데, 특히 평구로(平仇老)는 정유재란 말기에 귀화한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占)씨가 일본계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산(山) 또한 일본인의 성씨이지만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일본인 귀화자만 만명이고 만주 국경에 보배진 왜구들은 휠씬 많았다고 한다. 대체로 일본인들은 그 출신이 드러나지 않는 성으로 변성을 하였다. 김충선과 같은 사람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성을 사성 받기도 하였다.

왜구의 성격[편집]

왜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고구려 광개토왕비문 영락(永樂) 6년조에는 백제를 “伊殘(이잔)” 또는 “倭(왜)”로 조롱하여 적혀 있고, “百殘(백잔)을 속국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가야가 용병으로 데려온 세력을 왜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함께 보기[편집]

출처[편집]

  1.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랜덤하우스코리아 ISBN 9788959247226
  2.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비평사 ISBN 9788936482268
  3.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2년〉11월 28일 세 번째 기사 “都評議使司以救弊事宜, 條陳上言:其一曰近來倭寇稍息, 實賴兵船之力。”(도평의사사에서 폐해를 구제하는 사의(事宜)로써 조목별로 진술하여 말씀을 올렸다. “1. 근래에 왜적(倭賊)의 침구가 조금 쉬게 된 것은 실로 병선(兵船)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
  4. 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74호) 한국역사연구회, 423쪽, “왜구는 고려와의 격전을 통해 세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의 왜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에 비교적 많은 사례들이 나타난다. 비록 구체적인 피해상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려 말에 비해 피해규모가 크게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11월 도평의사사에서 왜적 피해가 줄어 든 것이 병선의 위력이라고 언급한 내용을8) 살펴보면 당시 조선의 왜구 방어 대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8)『太祖實錄』 권4, 太祖 2년 11월 己巳”
  5. 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74호) 한국역사연구회, 423쪽, “태조 3년에도 왜구와 왜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타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보다는 조선 수군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9)... 9) 『太祖實錄』 권5, 太祖 3년 3월 丙辰 ; 『太祖實錄』권6, 太祖 3년 8월 壬午”
  6. 세종실록》, 〈元年(1419年) 六月 九日〉(원문), 〈원년(1419년) 6월 9일〉(번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