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신라 문무왕
新羅 文武王
신라의 제30대 국왕
본명 김법민(金法敏)
재위 661년 7월 ~ 681년 7월 21일
종교 불교
왕후 자의왕후
부왕 태종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이전 왕 태종무열왕
다음 왕 신문왕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 )은 신라 제30대 (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 태종무열왕 김춘추김유신의 둘째누이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8년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삼국통일을 이룬 왕이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661년부터 68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661년부터 678년까지 친정하였고 676년 아우 김인문이 잠시 실권 탈취 기도를 한 바 있으며 678년부터 681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김정명(훗날 신문왕)이 왕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였다.

생애[편집]

출생에서 즉위까지[편집]

삼국사기》는 왕이 681년에 승하했다고만 했을 뿐 왕이 언제 태어났는지, 사망 당시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문무대왕비』에 따르면 왕이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56세였다고 하는데, 이를 토대로 추산하면 문무왕의 생년은 진평왕 건복 43년(626년)에 해당한다. 진덕여왕 4년(650년)[1]에 아버지 태종무열왕와 함께 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고종으로부터 태부경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654년 아버지 김춘추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655년파진찬의 관등과 병부령직을 겸임, 곧 태자로 봉해졌다.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태종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즉위[편집]

상 중에 치른 전쟁[편집]

상중이던 문무왕에게 당은 고구려를 치는 당병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병들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백제 흥복군을 진압하는데 나서줄 것을 거듭 요청해왔다. 평양으로 먼저 군량을 보내면 웅진으로 통하는 물자 수송로가 끊어질 것이고, 그 수송로가 끊어지면 웅진도독부의 당병들은 백제군에게 궤멸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왕은 8월에 직접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옹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흥복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상주장군 품일과 일모산군 태수 대당·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우술성을 쳐서 또 함락시키고, 겨울 10월 29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당의 조문 사절을 맞이했다. 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보낸 함자도총관 유덕민(김유신열전에는 신라의 대감 문천)이 와서 문무왕에게 당병에 대한 군량 지원을 요청하자, 왕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 군은 이듬해 2월에 무사히 군량을 전달하고 귀환하였다.

2년(662년) 봄 정월에 당은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상주국(上柱國)·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2월에는 또한 탐라국이 사신을 보내 와서 내부하고 있다. 이때 신라에서는 백제에 주둔하고 고구려를 치는 당병의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식량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하느라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고갈되고, 농사 때를 망쳐 백성들이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웅진도독부에 있는 당군의 군량 창고에는 쌀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에서는 그 뒤로도 수시로 신라에 군량을 요구하였다. 3월에 내린 대사면령은 이러한 가운데서 오는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가을 7월에 왕은 왕제 인문(仁門)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는 한편,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지라성과 윤성, 대산과 사정의 백제 목책을 깨뜨리고 신라군과 합세해 진현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열었다. 8월(《동사강목》에는 7월)에는 흠순 등 19장군을 시켜 내사지성(內斯只城)의 백제 흥복군을 깨뜨렸고, 대당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총관 진흠이 병을 핑계로 한가로이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죄를 물어 처형하고 그 일족까지 멸했다.

3년(663년) 봄 정월에는 서라벌 근교의 남산신성에 장창(長倉)을 짓고 부산성을 쌓았다. 이보다 앞서 백제 흥복군은 12월에 험준한 주류성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부산성을 쌓은 해 2월에 흠순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목베는 등 백제 흥복군을 더욱 압박해왔다. 결국 흥복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게 한다. 한편 여름 4월,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

두 달 뒤인 6월에 백제 흥복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흥복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고, 당에서도 웅진도독부의 장군 유인궤의 요청에 따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가 40만 군사를 보냈고, 유인궤와 별장 두상, 새로 백제왕으로 임명된 부여융 등의 수군은 덕물도를 경유해 수로로 곧장 웅진부성으로 나아갔다. 문무왕 역시 김유신김인문·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데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육로로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렀다.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해 버렸다(백강구 전투).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한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9월 7일(《자치통감》에는 8일)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웅진도독부의 당병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문무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앞서 당은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도독에 임명한 뒤,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문무왕을 향해 "평정을 마친 뒤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던 고종의 칙령을 들며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했다. 신라는 임존성이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결국 문무왕 4년(664년) 2월에 각간 김인문, 이찬 천존을 보내어 당의 칙사 유인원과 새로 웅진도독이 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웅진에서 동맹을 맺었다. 백제 흥복군은 문무왕 4년(664년) 3월에 사비산성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백제 흥복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고구려 공략[편집]

백제를 멸망시킨 문무왕이 처음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은 문무왕 4년(664년) 가을 7월, 왕제 인문과 김품일, 한산주도독 김군관, 김문영 등에게 일선(一善)·한산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과 함께 돌사성을 쳐서 멸하면서부터였다. 문무왕 5년(665년) 가을 8월에 왕은 당의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모여 다시 맹약을 맺었다.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고 "서로의 경계를 넘어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맹약의 글은 유인궤가 지은 것으로 제물들은 취리산 제단의 북쪽에 묻고, 맹약문은 신라의 종묘에 보관되었다. 또한 그 회맹한 지점을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삼고 푯말을 세워 백제와 신라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에 귀속된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긴 당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처사였다.

한편 이로부터 얼마 뒤 왕자 정명(훗날의 신문왕)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겨울에는 일선·거열 두 주의 백성들을 시켜 군수물자를 하서주로 운반하게 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이듬해 4월에는 대신 김천존의 아들인 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인 나마 삼광(三光)을 모두 당에 들어가 숙위하게 했다. 겨울 12월에부터 당은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현(安陸縣) 사람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들 사이에 형제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마침내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의 성을 거느리고 당에 항복해버리면서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 정토가 24명의 부하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오자, 정토와 그의 부하들에게 옷과 양식, 집을 주어 서울 및 주·부에 안주시키고, 온전한 여덟 성에는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한다.

7년(667년) 가을 7월에 사흘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고, 당에서는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발탁하고 대아찬 일원(日原)은 당의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임명되었는데, 문무왕은 지경과 개원에게 각각 파진찬과 대아찬의 관등을 주고,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명한다는 고종의 칙명은 왕궁 뜰에서 받도록 명하였다. 또한 당의 유인원과 신라의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성(卑列城, 지금의 안변군)의 길을 따라, 신라 병사를 징발해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고 있다. 가을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9월에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이적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 이때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한 단독 작전수행 대신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배를 계속 띄워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아직 평양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알고 먼저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먼저 고구려로 갈 길을 뚫기로 했다. 하지만 칠중성을 치기 전, 겨울 10월 2일에 평양성 북쪽 2백리 지점에 도착한 이적은 신라측 이동혜촌주(尒同兮村主) 대나마 강심(江深)에게 부쳐,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와서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신라군은 칠중성 공격을 포기하고 수곡성(水谷城)으로 향했지만,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이적은 어느새 돌아가버렸고, 신라군도 그냥 돌아왔다. 12월에 당은 다시 웅진도독부의 유진장군(留鎭將軍) 유인원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돕게 하면서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

당은 문무왕 8년(668년) 2월에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고구려에서는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애썼지만 설하수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 3월에 신라는 북방의 요충지였던 비열홀(比列忽, 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삼았다. 6월 12일에[2] 당의 우상(右相)[3]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에 우상은 약속을 마치고 신라의 선발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인 천강(泉岡)으로 향하고, 문무왕 역시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이렇다.

  • 대당대총관(大幢大總管): 대각간 김유신
  • 대당총관(大幢總管): 각간 김인문·김흠순·김천존·문충(文忠), 잡찬 진복(眞福), 파진찬 지경, 대아찬 김양도(金良圖)·개원·김흠돌(金欽突)
  • 경정총관(京停摠管): 이찬 진순(陳純, 진춘陳春으로도), 화랑 죽지랑
  • 귀당총관(貴幢摠管): 이찬 김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天品)
  • 비열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김문영, 아찬 복세(福世)
  •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
  • 서당총관(誓幢摠管): 파진찬 의복(宜福), 아찬 천광(天光)
  • 계금당총관(罽衿幢摠管): 아찬 겸 대당 운휘장군 일원(日原)·흥원(興元)

이때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된 대각간 김유신은 풍질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고, 일찍이 백제를 치는데 선두로 나섰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지도부의 요직을 맡아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임명된 관직으로 추정한 진격루트는 한성주(한산주)와 비열주(비열홀주) 그리고 하서주(하슬라주) 세 곳으로, 수도 서라벌에서 조직된 군사들은 닷새 후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22일에 유인원이 신라의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고, 신라군 장수인 인문·천존과 한성주총관 박도유(朴都儒)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 27일에는 드디어 문무왕 자신이 서라벌을 출발했고, 이틀 뒤에는 여러 도의 총관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당군 총사령관 이적을 만난 신라의 김인문은 고구려의 평양 북쪽 20리 되는 지점인 영류산(嬰留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가을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군과 회합할 것을 명했다. 한편 비열주행군총관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의 벌판에서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남건이 거느리고 온 군사와 충돌했는데, 함께 있던 당의 번병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와중에 김문영의 신라군은 앞으로 나서서 고구려군과 맞서 크게 이겼고, 신라군이 이기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당병은 겨우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한다. 이 사천에서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은 훗날 문무왕에 의해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은상으로 받았고, 전사한 한산주소감 김상경(金相京)도 그와 준하는 상이 내려졌다. 다만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음에도,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 하여 포상에서는 제외되었다고 한다.

9월 21일에 당군과 합류해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먼저 남산 등 98명의 수령을 이끌고 백기를 들고 항복했고, 신라군의 대당총관 김인문이 보장왕을 이적 앞에 데려가 꿇어앉히고 그 죄를 세었다. 나흘 뒤인 9월 25일에 신라의 5백 기병을 필두로 한 군사들이 먼저 평양으로 들어가고 뒤따라 당군이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이때 평양성 함락전에서의 신라군의 활약은 기록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평양을 함락하고 한 달이 지난 뒤에 문무왕이 남한주에서 행한 논공행상 과정이 남아있다. 평양성 외곽에서는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이 평양성 대문에서의 싸움에 세운 공으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천 섬을 받았고, 군사(軍師)인 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에서 전공을 세워 술간(述干) 관등과 벼 1천 섬, 부양(斧壤)의 구기(仇杞)는 평양 남쪽 다리 위에서 높은 공을 세워 마찬가지로 술간 관등과 벼 700섬을 받았다. 평양성 내부에서는 임시[假] 군사(軍師)인 비열홀의 세활(世活)이 평양의 소성(小城)에서 전공을 세워 고간(高干) 관등과 벼 500섬을 받았고, 서당당주(誓幢幢主) 김둔산(金遁山)은 평양 군영에서의 전공이 으뜸이라 하여 사찬 관등과 조 700섬을 받았으며,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고구려의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인 공으로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받았다.

평양이 함락된 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돌아갔고,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이적을 따라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과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 문무왕은 한성을 출발해 평양으로 가던 중, 힐차양(肹次壤)에 이르러 당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신라측은 긴 전쟁이 끝나고 자신들에게 약속된 은택을 얻을 것이고 인민들도 포상을 받게 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당의 총사령관 이적은 "신라가 예전에 군대 동원기일을 어겼다"며 싸늘한 태도를 보였고, 이적의 태도가 신라 군영에 전해지면서 신라군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신라로서는 그들의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당군을 도와 주변의 적들을 쓰러뜨렸는데, 막상 신라에게 돌아온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당은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남한주(南漢州)로 돌아온 문무왕은 10월 22일에 논공행상을 벌여 서라벌에 남아있던 김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와 식읍 500호, 궤장을 하사하고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또한 인문을 대각간, 다른 이찬과 장군들을 모두 각간으로 삼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관위 1등급씩 더해주었다. 25일에 왕은 욕돌역(褥突驛)에 이르러 국원사신(國原仕臣) 용장(龍長) 대아찬에게 사적으로 대접받았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포로로 거느리고 11월 5일에 서라벌로 들어온 왕은 다음날 문무 관료들과 함께 선조묘에 전쟁이 끝났음을 고하고, 18일에는 전사자들의 신분에 맞춰 부의를 내리고 있다.

삼국 통일[편집]

문무왕이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당과 전쟁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문무왕본기에는 확실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동서 문무왕 11년(671년)조에 실려있는 문무왕의 편지에 보면,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신라의 영토 비열성(卑列城)을 30여 년만에 신라가 되찾아 백성을 사민시키고 관리를 두어 지키던 것을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에 당의 도독부를 설치하면서 신라로부터 무단으로 빼앗아 고구려에 주어버렸다며 항의하고 있다. 또한 웅진도독부를 통해 신라가 점령한 백제 땅을 침식하고, 신라의 백성들을 웅진도독부로 무단으로 데려오기도 했으며, 고구려 멸망 직후 신라에는 또 "당은 왜국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군함을 수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져 백성들이 동요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9년(669년) 여름 5월에 천정군(泉井郡)·비열홀군(比列忽郡)·각련군(各連郡)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에 이미 비열성(비열홀군)은 다른 두 성과 함께 신라 조정의 군이 설치되어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기록 뒤에, 《삼국사기》는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앞서 당에서 승려 법안(法安)을 보내어 구했던 자석(紫石) 두 상자를 보내고,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도를 당에 보내 '사죄'하고 있다.[4] 겨울에는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구진천(仇珍川)을 당에 데려갔는데, 당시 '천보노(千步弩)'라고까지 불리며 한 번에 1천 보를 나간다는 소문이 퍼져있던 신라의 쇠뇌 제작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이 해에 문무왕은 말을 기르는 목장 174곳을 소내(所內)에 22곳,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김유신을 비롯한 고위 진골 대신들과 여러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또한 백제의 여자를 아내로 삼은 한성도독 박도유가 웅진도독부와 내통해 신라의 병기를 훔쳐다 한 주(州)의 땅을 습격하는 난을 일으키려다 계획이 발각되어, 도유는 처형당했다.

당과의 전쟁[편집]

문무왕 10년(670년) 봄 정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면서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고, 김양도는 결국 신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당의 감옥에서 죽었다. 이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문무왕이 멋대로 백제 땅과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다'는 이유로 황제가 사신을 억류했다[5]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 이때쯤 신라와 당의 사이는 틀어져 있었다.

신라와 당의 첫 충돌은 문무왕 10년 봄 3월의 일로,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자가 거느린 정병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다음 달인 여름 4월 4일에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당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병이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데에 불리함을 느끼고 백성(白城)으로 후퇴했다. 6월에는 궁모성에서 거병한 고구려 흥복군의 일원인 검모잠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안승을 금마저(지금의 익산)에 살게 하는 등 신라의 대당전쟁은 고구려 흥복군에 대한 지원이 수반된 것이었다. 고구려 흥복군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신라는 웅진도독부에 고구려 흥복군 진압을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장귀(首彌長貴)를 보내, 거병 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명분으로 신라와 웅진도독부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

한편 7월에 이르러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보내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웅진도독부에 속한 옛 백제 땅들을 차례차례 쳐서 주둔하고 있던 당병을 죽였다. 싸우지 않고 퇴각한 장수들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있다. 8월 1일에는 고구려의 안승에게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신라왕의 '책봉' 형식으로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했다.

11년(671년) 왕은 군사를 일으켜 백제(웅진도독부)를 침공하였다. 당의 지휘를 받던 말갈병이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것을 후방에서 쳐서 3백 명을 죽이고, 당군이 백제를 구원하러 올 것에 대비해 대아찬 진공(眞功) 등을 시켜 수군으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또한 6월에 장군인 화랑 죽지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했으며, 당병과 석성(石城)에서 싸워 5,300명을 죽이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7월에 당은 행군총관 설인귀를 신라에 파견했는데, 왕은 사신을 맞아 위로하는 대신 강가의 풀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 어귀에는 무기를 감춰둔 채, 수풀 사이를 오가며 틈을 노려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인귀는 26일에 당이 신라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해주었는데 신라가 그 은혜를 잊고, 고구려를 도와 당을 치고 있다며 항의하는 내용과 함께 마음만 먹으면 당이 신라를 집어삼킬 수도 있음을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 법사 임윤(琳潤)을 시켜 왕에게 보냈다.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신라가 선왕 때로부터 당에 협조하고 여러 번 신라의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는 지경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고를 내어 번번이 당군을 지원했던 사실과 당이 처음 신라와 했던 약속들을 어기고 신라가 점령하여 지배하던 땅을 무단으로 거둬들인 일을 비난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한편, 백제 수도였던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고 있다. 10월 6일에는 당의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672년 이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를 향해서도 침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다시 백제의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 한편 전년 9월에 당이 고구려 부흥군 진압을 위해 평양에 파병한 장군 고간의 한병(漢兵) 1만, 말갈족 출신의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3만이 함께 평양의 여덟 곳에 해자를 파고 보루를 쌓아 진을 치고서, 8월부터 고려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백수성(白水城) 5백 보 거리까지 전진해 주둔하는 등 신라 땅을 침식해왔다. 신라는 고구려 흥복군과 연합해 이들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는 당병을 석문(石門)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군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및 전략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된 사이에 당병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 태대각간 김유신의 아들인 원술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건져 돌아왔는데, 아버지 유신은 자신의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며 왕에게 아뢰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한편 각자 맡은 곳을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자는 유신의 진언에 따라, 한산주에 둘레 4,360보 되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9월에는 앞서 신라 땅에 억류하고 있던 예군 등을 비롯한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인 관원들과 앞서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면서 왕이 직접 표문과 많은 물품을 바치는 등 유화책을 펴고 있다.

13년(673년) 2월부터 9월까지,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서형산성(西兄山城)과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비롯해, 국원성(國原城, 옛 완장성薍長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또는 질암성迭巖城), 달함군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 등 여러 성을 쌓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이 사이에 국가의 원로이자 재상이었던 태대각간 김유신이 죽고,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 거듭되는 전쟁에서 신라는 말갈·거란의 병사까지 끌어들인 당병과 맞서 아홉 번의 전투를 통해 2천 명을 죽이고, 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서도 당의 선병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겨울에 당병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거란·말갈의 병사들은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쳐서 멸했다. 한편 신라는 주(州)와 군(郡)에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고, 백제 멸망 뒤 무열왕에 의해 폐지되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키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14년(674년) 당에서 숙위하다 귀국한 대나마 덕복이 가져온 신력(新曆)을 반포했다. 당은 문무왕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병을 습격해 죽이고,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백제령을 지배하에 두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한 항의로서, 왕의 동생으로 당에 머무르고 있던 우효위원외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그를 귀국시키는 편에 많은 군사를 딸려보내 대규모로 신라를 치려 했다.(다만 인문은 신라왕 책봉을 사양하고 있다.) 문무왕은 8월에 서형산 아래에서 대규모 사열식을 벌이고, 9월에는 영묘사 앞길에서 다시 대규모 사열식과 함께 아찬 설수진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 달에 고구려왕 안승을 다시 보덕왕으로 봉했다.

15년(675년)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지급했다. 2월에 당의 장수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린 뒤 돌아가고,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가 되었다. 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앞서 깎아 없앴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이때에는 대부분의 백제령이 당이 아닌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구려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주와 군이 설치되어 있었고, 왕 자신도 당이 거란·말갈의 병사까지 동원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과연 당은 가을 9월, 설인귀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신라에 보내 천성(泉城)을 치게 했는데, 여기에는 앞서 문무왕에 의해 처형당했던 한주도독 진주의 아들로서 당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이 향도(鄕導)로서 도왔다. 그러나 이는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그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전마 1천 필까지 신라의 손에 들어왔다. 29일에는 20만 군사로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고 있던 이근행을 쳐서 말 30,380필과 무수한 병기를 얻었다.(다만 이 전쟁 와중에도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있다.) 나아가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삼국사기》는 이 해, 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더 얻었다고 설명한다.[6]

16년(676년)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신라는 패했지만, 다시 나아가 22회에 걸친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여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 후 당은 백제령 안에 있던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기고,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성을 거쳐 신성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에서 자국의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죽음[편집]

경주 감은사.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문무왕을 위해 지은 원찰이다.

681년 7월 1일에 56세로 서거하였다. 유조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장사하였다. 전설에는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사후 무속의 신의 한사람으로 숭배되었다.

가계[편집]

선대[편집]

왕비와 후손[편집]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기타[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진덕여왕 4년부터 신라의 독자 연호가 아닌 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2.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평양으로 간 것이 5월이라고 했다.
  3. 정확한 관직명은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이다.
  4. 《삼국사기》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상(上), 문무왕 9년(669년)
  5. 《삼국사기》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상(上), 문무왕 12년(670년)조.
  6. 하지만 아달성(阿達城)이나 적목성(赤木城)에서는 성을 침공한 말갈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약탈당했으며, 아달성주 소나(素那)나 적목현령 탈기(脫起)가 이때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석현성(石峴城)이 당병에게 함락되었을 때는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고, 칠중성은 당과 거란·말갈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간신히 함락은 면했지만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신라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당은 다시 도림성(道臨城)을 함락시키고 있다.

바깥 고리[편집]

전 대
태종무열왕
제30대 신라 국왕
661년 - 681년
후 대
신문왕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