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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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성여왕
新羅 眞聖女王
신라의 제51대 국왕
본명 김만(金曼)
재위 887년 ~ 897년
종교 불교
부군 김위홍(金魏弘)
부왕 경문왕
모후 문의왕후(文懿王后)
이전 왕 정강왕
다음 왕 효공왕

진성여왕(眞聖女王, 865년? ~ 897년 12월 30일 (음력 12월 4일), 재위:887년 ~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이다. (金)씨, (曼) 또는 (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그녀의 부모인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했고 진성여왕이 그들 사이에서 3번째 자식인 점 그리고 문의왕후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860년대 중후반정도로 추정된다.

887년부터 89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887년부터 888년까지 이벌찬(각간) 김위홍(金魏弘)이 대리청정을 맡았고 김위홍(金魏弘)이 서거한 888년부터 89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혜화상탑비[1] 등에 의하면 성군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군주로 즉위한 이듬해인 888년에 죽은 각간 김위홍(金魏弘)과의 사이에서 양패 등의 아들을 두었다.

생애[편집]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7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인 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897년 음력 12월 4일 (양력 12월 30일)에 승하하였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막내아들 양패(良貝) 외에도 아들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오빠인 헌강왕의 서자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각간 김위홍대구화상에게 명하여 《삼대목》을 편찬케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공저[편집]

  • 《삼대목》, 위홍, 대구화상과의 공저

가족 관계[편집]

  • 부왕 : 경문왕
  • 모후 :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
  • 숙부이자 남편 : 김위홍
    • 막내아들 : 김양패
  • 이복 동생 : 궁예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참고[편집]

주석[편집]

  1. 낭혜는 무열왕계 왕족 김범청의 아들로 6두품으로 강등당했으며 진성여왕의 정적이었다.
전 대
정강왕
제51대 신라 국왕
887년 - 897년
후 대
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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