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거세 거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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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혁거세 거서간
徐那伐 赫居世 居西干
신라의 초대 국왕
본명 박혁거세(朴赫(爀)居世)
재위 BC 57년 ~ AD 4년
출생일 BC 69년
사망일 AD 4년 3월 (65세)
왕후 알영부인
부왕 (미상)
모후 사소부인
이전 왕 (초대 군주)
다음 왕 신라 남해 차차웅

혁거세 거서간(赫(爀)居世 居西干, 기원전 69년 ~ 기원후 4년, 재위: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은 신라의 초대 국왕이자,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모두) 박씨(朴氏)의 시조(始祖)이다.

거서간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그가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한편으로 일연은 선도산 성모로 불리는 사소부인(娑蘇夫人)이 그를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혁거세(赫(爀)居世)란 표기는 한자 음과 뜻을 합친 표기로서, 赫(爀)은 뜻인 "밝"에 가까운 음으로 읽으며, 世는 세상을 뜻하는 고유어 "누리", "뉘"에 가깝게 읽는다. 비슷한 음을 딴 다른 표기로 弗矩內(불구내)가 있으며, 결국 본디 이름은 밝아누리(세상을 밝히다)에 가깝다.

생애[편집]

출생[편집]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가져온 알에서 출생했다. 즉,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각기 자기 자녀들과 함께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모두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모두가 안일하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1]그런데 그 때,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은 더 잘 보기 위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말이 누었던 장소로 일제히 몰려가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2] 촌장들이 그 알을 보고있으니 갑자기 깨져버렸다.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하며, 아기를 동천(東泉)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 이름을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또는 혁거세(赫(爀)居世) '라고 지었다.[3][4]

일연은 한편으로는 선도산 성모 혹은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기록하였다. [5] 여기서 서술성모는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이다.[6]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거서간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하였다 한다. 여기서 중국을 지금의 중국이 아닌 말 그대로 중국(中國). 여러 제후를 나스리는 중심적 나라라는 견해도 있다.[7]

이름의 뜻[편집]

양주동의 연구에 의하면,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8]

서나벌 개국[편집]

혁거세는 10여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고, [9]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인 기원전 57년에 즉위,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10]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11]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12][13]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며,[14]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15]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16]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해 마한 왕이 분노해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17]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18]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19] [13]

나정의 박혁거세 설화[편집]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를 지칭)에 궁궐을 짓고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 아이는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나정)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雞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일설에 따르면,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당시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곧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정하였다.

박씨 족보와의 차이[편집]

신라 박씨 족보는 혁거세의 둘째 아들 박특(朴忒)을 신라 개국공신으로 기록[20]하고 있어 혁거세의 출생이 사료의 기록(기원전 69년)보다 이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박씨 관련 보학 자료들이 조선 중기 또는 후기 이전에 소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설로 보고 있다.

가계[편집]

  • 어머니(추정) : 사소부인(娑蘇夫人, 선도산 성모)
    • 왕후 : 알영부인(閼英夫人)
      • 장남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아래 인물의 경우, 경주 박씨 족보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역사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차남 : 박특(朴忒)
        • 손자 : 박혁(朴赤) - 신라박씨 선원세보에 의하면 그의 가계는 아들 세무(世武), 손자 덕수(德秀), 증손 광형(光炯)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 삼남 : 박민(朴忞)
      • 사남 : 아메노히보코(천일창)
      • 장녀 : 아로공주(阿老公主)
      • 차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개국공신 이알평(李謁平)의 후처로 하가

사망[편집]

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그 혁거세의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 이렇게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래서 무덤들을 가리켜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21]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각주[편집]

  1.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前漢 地節元年壬子 [...] 三月朔六部祖各率子弟俱㑹於閼川岸上議曰我軰上無君主臨理蒸民民皆放逸自從所欲盍覔有徳人爲之君主立邦設都乎” (전한 지절 원년 임자(壬子)년, 서기전 69년) [...]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다 함께 알천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군주로 세워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2.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於時乗高南望楊山下蘿井 傍異氣如電光垂地有一白馬跪拜之状尋撿之有一紫卵 一云青大卵” (이때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옆에 번개와 같이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뻗고, 흰 말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형태로 있었다. 이를 살펴보니, 자줏색 알 하나 또는 푸른 색 커다란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었다.)
  3.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馬見人長嘶上天剖其卵得童男形儀端羙驚異之俗於東泉東泉寺在詞腦 野北 身生光彩鳥獸率舞天地振動日月清明因名赫居世王 蓋郷言也或作 弗矩内王言光明理世也說者云是”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긴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잘라, 얼굴과 자태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 아이를 얻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동천사(寺)는 사뇌벌[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씻기니,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했다. 이에, 이름을 혁거세왕 아마도 향언일 것이다. 또는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이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4.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진한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
  5.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說者云是 西述聖母之所誕也”(서술자가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6. 경주 선도산의 다른 이름이 서술산이다.
  7. <덕천리 유적과 돌산 고허촌과 소벌도리> :: 네이버 뉴스
  8. 안영희(安英姬), 〈「閼英」의 發祥地「閼川」名義考 - 朴赫居世神話를 中心으로〉 《亞細亞女性硏究 第8輯》(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1969.12) 141쪽. “이에 관하여 梁柱東 博士는 「朴赫居世」의 「赫」을 「朴」의 註記로 보고 「朴」과 「赫」은 둘다 「ᄇᆞᆰ」의 表記로 疊記된 것으로 보았다.(2) [...] (1) 梁柱東 「國史古語彙 借字原義考〈國號•地名•始祖•官名•祭政•歌樂名등〉」(明大論文集 1), 1968, pp. 79~89參考[...] (2) 梁柱東, 註1書 p. 82參考”
  9.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10.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시조는 성이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년) 4월 병진 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에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11.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년(서기전 41)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12.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19년(서기전 39)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13. 당시 신라의~: 신채호저, 《조선상고사》<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 듯하다.
  14.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21년(서기전 37) 서울[京]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
  15.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26년(서기전 32)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16.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三十年 [...]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儕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0년(서기전 28) [...]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17.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38년(서기전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18.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 (서기전 1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19.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 曰 寡君聞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53년(서기전 5) 동옥저(東沃沮)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20. 신라박씨 선원세계도(新羅朴氏璿源世界圖)
  21.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 陵 在曇 巖寺北 ”(61년(서기 4) 봄 3월에 거서간이 죽었다[昇遐].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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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1대 신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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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차차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