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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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
新羅 眞興王
신라의 제24대 국왕
본명 김삼맥종(金彡麥宗)
재위 540년~576년
종교 불교
출생일 526년
출생지 신라 금성
사망일 576년 (향년 43세)
사망지 신라 금성
배우자 사도왕후
부친 입종 갈문왕
모친 지소태후
이전 왕 법흥왕
다음 왕 진지왕

진흥왕(眞興王, 526년~576년, 재위: 540년~576년)은 신라의 제24대 임금이다. 성은 (金)이고 이름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 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1]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

540년 7월부터 576년 8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540년 7월부터 이듬해 541년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섭정(수렴청정)하였고 541년부터 551년까지 어머니 지소태후가 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51년부터 575년까지 친정하였고 575년부터 이듬해 576년까지 왕후인 사도왕후 박씨대리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76년 미실궁주가 잠시 대리청정, 이후 576년 8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아들 김사륜(훗날 진지왕)이 왕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였다.

생애[편집]

삼국사기에는 534년생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526년생으로 나와있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다. 15세 때였던 540년 신라 법흥왕의 붕어로 왕이 되었는데, 540년부터 이듬해 541년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섭정을 하였고 541년부터 551년까지 어머니인 지소태후섭정을 하였으며 그 후 551년부터 친정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고[2] 팔관회를 두었다. 가야 사람인 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다.[3] 553년, 황룡사를 창건했다.[4] 568년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으며[5], 572년에 다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6]576년, 원화(源花) 제도를 만들어 남모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花郞)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576년(진흥왕 37년), 5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영토 확장[편집]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7]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8]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을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7월,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9][10]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11] 같은해, 음력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 [12] 한편, 이듬해 백제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554년). [13]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562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같은 해,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 [14]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15]

외교[편집]

564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6] 565년, 북제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17]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8] [19] [20] [21][22] 572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23]

가계[편집]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참고[편집]

참조[편집]

  1. (2004)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2.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12년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
  3.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十二年 ...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 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12년... 3월에 왕이 순행(巡行)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12줄 현금[十二弦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12달의 음률을 본뜬 것이다. 이에 우륵에게 명하여 곡을 만들게 하였던 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그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加耶琴)이다.)”
  4.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14년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 곳에서 나타났으므로 왕이 이상하게 여겨 [계획을] 바꿔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
  5.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九年 改元大昌 (29년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다. )”
  6.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三十三年 春正月 改元鴻濟 (33년 봄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
  7.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3]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平成)[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
  8. (2004)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551년(진흥왕)에는 백제와 더불어 북진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9.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十四年 ...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軍主 (14년 ...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
  10.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31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쪽의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
  11. (2004)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12.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三十一年 ...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31년(553)... 겨울 10월에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
  13.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15년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14.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2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
  15. (2004)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16.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五年 遣使北齊朝貢 (25년(564)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17.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 陳遣使劉思與僧明觀 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26년 봄 2월에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
  18.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七年...遣使於陳貢方物 (7년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19.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八年 春三月 遣使於陳貢方物 (28년 봄 3월에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20.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二十九年 ... 夏六月 遣使於陳貢方物 (29년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21.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三十一年 夏六月 遣使於陳獻方物 (31년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22.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三十二年 遣使於陳貢方物 (32년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23.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三十三年 ... . 遣使北齊朝貢 . (33년...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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