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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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명왕
新羅 景明王
신라의 제54대 국왕
본명 박승영(朴昇英)
재위 917년 ~ 924년
왕후 장사택(長沙宅)
부왕 신덕왕
모후 의성왕후(義成王后)
이전 왕 신덕왕
다음 왕 경애왕

경명왕(景明王, ? ~ 924년, 재위: 917년 ~ 924년)은 신라의 제54대 이다. 성은 (朴)씨, 이름은 승영(昇英)이다. 신덕왕(神德王)과 의성왕후(義成王后)의 아들이며 경애왕(景哀王)의 형이다. 왕비는 장사택(長沙宅)이며, 각간 대존(大尊)의 딸이다.[1]

생애[편집]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 뒤 왕건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왕릉 전설[편집]

경주군 남쪽 배동 배일산(拜日山)의 세 왕릉 중 맨 위의 왕릉이 아달라 이사금의 능이고 가운데는 신덕왕릉, 맨 앞은 경명왕의 능이라 한다.

가계[편집]

  • 부왕 : 신덕왕(神德王)
  • 모후 : 의성왕후 김씨(義成王后 金氏)
    • 왕후 : 장사택(長沙宅) - 각각 대존(大尊)의 딸
      • 장남 :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忱) : 밀양 박씨의 시조
      • 차남 : 고양대군 언성 : 고령 박씨의 시조
      • 3남 : 속함대군(速咸大君) 언신(彦信) : 함양(咸陽) 박씨(朴氏)의 시조
      • 4남 : 죽성대군 언립(彦立): 陰城, 竹山, 固城, 天安 박씨의 시조
      • 5남 : 사벌대군 언창(彦昌) : 상주 박씨의 시조
      • 6남 : 완산대군 언화(彦華)
      • 7남 : 강남대군 언지
      • 8남 : 월성대군 언의
      • 9남 : 국상공 교순 (交舜) : 울산(蔚山) 박씨의 시조 박윤웅[朴允雄]의 아버지

관련 작품[편집]

참고[편집]

주석[편집]

  1. 삼국유사 왕력편 경명왕조
전 대
신덕왕
제54대 신라 국왕
917년 - 924년
후 대
경애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