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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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
후백제의 1대 국왕
재위 892년 ~ 935년 음력 3월
왕비 왕비 박씨
부친 아자개
모친 상원부인
이전 왕 -
다음 왕 신검

견훤(甄萱, 867년~936년 음력 9월, 재위: 892년 또는 900년[1]~935년 음력 3월)은 신라 말기의 장군이자 후백제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래 이씨였으나 뒤에 견(甄)[2]씨로 고쳤다.

목차

[편집]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상주(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사람 아자개(阿慈介)이며, 원래 농사로 먹고 살다가 나중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일컬었다고 한다. 견훤이 아직 아기였을 때, 아자개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자개에게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면, 그 사이 범이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고 한다. 이후 장성하여 군에 들어가기 위해 왕경(王京)에 들어갔고 그는 서남해의 방수(防戍)에 배정되었다.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리는 그의 용맹은 특출했고, 곧 그 자질을 인정받아 비장이 되었다.

892년(진성여왕 6년)에 봉기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가 거병한지 열흘 만에 5천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한 그는 왕이라는 칭호 대신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는 칭호를 썼다. 비슷한 시기에 북원(北原)에서 양길(梁吉)이 그 휘하에 궁예(弓裔)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양길에게 비장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어 900년(효공왕 4년)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서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울분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이며 비로소 견훤은 백제왕을 칭하고[3], 제도와 관직을 정비하였으며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에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03년에는 후고구려(後高句麗)의 수군 기습에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의해 빼앗기고, 906년에는 상주의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다시 909년에서 9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 또는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912년에는 덕진포(德津浦)[4]에서 왕건의 화공책에 패하였고 견훤 자신은 겨우 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918년 태봉(泰封)에서 장수들에 의해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王建)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자, 견훤은 축하사절을 보내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다. 태봉 말기에 궁예 휘하의 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왕건의 난 이후 철원(鐵圓)으로 상경하자 백제에 항복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해 음력 9월 상주의 적수(賊帥) 아자개(阿慈蓋)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있다.[5]

920년에는 대야성을 드디어 함락시켰다.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구원을 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퇴각하였다. 924년 음력 7월에는 아들 수미강을 보내어 대야, 문소(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김천시 조마)을 공격하게 했으나, 조물성 사람들의 농성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음력 8월엔 절영도의 준마를 왕건에게 보냈으나, 나중에 이 준마와 관련한 도참을 듣고 돌려받는다. 이듬해 음력 10월엔 3천 기(騎)로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매우 유리했던 것 같다. 왕건은 참패를 면하고자 화친을 청하며 인질로 사촌아우 왕신(王信)을 보냈고, 견훤도 이에 응해 외조카 진호(眞虎)를 볼모로 보냈다. 곧이어 음력 12월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취하였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후당으로부터 백제왕의 관작을 봉받았다.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 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앞서 보낸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6]. 이는 궁예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의 본문은 공산 동수 전투입니다.

완건과 견훤의 패권다툼은 상대의 강세지역에서 비효율적인 공성전을 펼치는 것보다는 이미 군사적으로 약화된 구 신라권역을 차지함으로써 전력의 우위를 확보하려 노력하였기에 신라 지역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927년에는 고려와 백제 사이의 전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고려는 음력 1월 용주[7]를 공격, 왕건이 친히 항복받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 승리 이후 전쟁의 전반부에선 고려가 우세하였다. 음력 3월엔 운주[8]의 성주 긍준을 왕건의 고려군이 격파하였다. 같은 달 상주 일대의 근품성을 고려군이 함락시켰다. 음력 4월에는 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현재 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였으며, 전이산[9], 노포평, 서산, 돌산[10]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서쪽 전선에서는 왕건이 웅주를 공격하였으나 공성에 실패하였다. 음력 7월에는 대야성에서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이 성을 함락하고 장군 추허조 등을 포로로 삼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되어 고려에서 강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 음력 8월에는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였다고 한다. 순행을 틈타 고사갈이성[11] 성주 흥달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는 등 백제의 부근 성주들이 상당수 투항하였다고 한다.

926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죽게 한 후 김부를 왕으로 삼고 철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신라의 많은 재보와 기술자들을 약취하여 돌아갔고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古昌)에서 왕건군에게 패전한 후부터 차차 형세가 기울어져 휘하 호족들이 하나 둘씩 왕건에게 투항, 934년 웅진(雄津)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그러나 음력 9월엔 전황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우선 근품성을 함락, 파괴하였는데 이는 강주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 길게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를 끊는 작전으로 보인다. 곧이어 고울부(영천)을 함락하자, 당시 친려(親麗) 정책을 펼치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단숨에 신라의 수도 서라벌(徐羅伐)로 단숨에 들이닥쳐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죽음으로 몰아간다. [12] 그리고는 왕의 외종제인 김부(金傅)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으며,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金樂)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13]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음력 10월에서 음력 11월 사이에는 완강히 고려를 지지하던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였고, 벽진군을 함락시켰다는 기사는 없으나 장군 색상이 전사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벽진군의 군사적 능력은 거의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시금 서라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최승우가 언제 봉직하였는지는, 그리고 이 글 이외에 어떤 활동을 백제를 위해 했는지는 기록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기에 백제에 봉직하였던 것은 확실하며, 따라서 신라에 대한 강경한 정책은 6두품 출신으로 백제에 봉직할 정도로 신라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최승우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이어진 일련의 군사 행동을 통해 왕건이 직접 순행하여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던 강주는 고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928년 정월엔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의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음력 5월엔 강주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이 강주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진경은 패배하였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고 한다. 한편 정월에는 왕건이 장문의 편지로 견훤의 편지에 답하였다. 강경한 전투 의지가 담겨 있는 서찰이었다. 강주는 고립되었고 928년 음력 5월엔 결국 무력화되었으므로 왕건은 공격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였다. 음력 4월에 왕건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으며, 음력 7월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패배하였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이처럼 서부전선의 대치 상황은 매우 견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음력 8월엔 충주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14]에 성을 쌓게 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왕건은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확보하였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명해 조물성 일대 정찰을 명한다. 음력 10월에는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다[15]. 음력 11월에는 견훤이 정병으로 부곡성(군위군 의흥)을 공격, 함락하고 고려 병졸 1천 명을 죽였다[16]. 같은 시기에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경상도 일대에서도 왕건이 함부로 진격할 수 없게끔 한 견훤은 경상도 일대의 친 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서부전선에서 견훤은 김훤, 애식, 한장 등에게 청주를 침공하게끔 하였으나 유금필에게 패퇴당했다[17]. 이 예에서도 서부전선은 매우 뚜렷하게 백제고려의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던 지점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유금필 열전에 따르면 이 해에 나주백제가 다시 찾은 것으로 보인다[18]. 동부전선에선, 929년 음력 7월에 견훤이 친히 5천의 병력으로 의성부를 침공, 성주 홍술을 죽였다. 음력 10월엔 가은현(문경시 가은)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음력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그해 음력 9월에 영주를 방문하는 등 경상도 일대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왕건고창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으로 출정하였다.

930년 정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대회전이 있었고, 이 회전에서 견훤은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내려와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19]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왕건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결코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심지어 경주 주둔 당시에는 약탈을 일삼게 했던 견훤의 강경한 조치는 견훤의 즉위시 드러내었던 백제의 원수를 갚겠다던 명분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볼 수도 있었고, 실제로도 신라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에게 수많은 군사적 토벌이 감행되었으므로 견훤은 명분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경상도의 호족들과 신라에 크게 거부감을 가지게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견훤이 신라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후삼국시대 패권경쟁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다. 신라출신인 그가 왜 고려출신인 왕건보다 신라인들에게 가혹했고 끝내 인심을 잃었는지는 중요한 역사적 연구소재이다. 신라귀족들에게 푸대접을 받은 개인적인 특별한 사연이 있었는지, 백제인들의 신임을 얻고자 의도적으로 신라인들에게 가혹했는지 살펴봐야할 문제이다.

여기에 서부전선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932년 고려에 투항하였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도 백제는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저력은 남아 있어서, 음력 9월에는 일길찬 상귀를 시켜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게 하였다. 음력 10월엔 해군장군 상애를 시켜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하였고, 대광 만세를 패퇴시켰다. 백제 수군은 당시 곡도로 귀양와있던 유금필에게 몇몇 지점에서 저지당했던 것 같다. 다시금 위세를 얻은 백제군은 933년신검을 통군으로 하여 신라를 위협하였는데, 이 군대신라에 위협을 가하기는커녕 유금필에게 돌파당하여 소수의 유금필군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20]. 견훤이 주도한 최후의 전투는 934년 음력 9월 운주(홍성)전투다. 왕건이 운주로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견훤은 갑사 5천 명으로 운주로 진군하여 왕건에게 화의를 신청하였다. 위세를 보여 백제가 힘을 회복할 시간을 벌고자 하는 계책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유금필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

라며 아직 대오가 정돈되지 않은 견훤군에게 용맹한 기병 수천으로 돌격[21], 술사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장 부근의 웅진에 속한 30개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백제의 패권은 옛 백제의 영토였던 웅주 일대에서도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편집] 생애 후반

[편집] 신검의 정변

935년 음력 3월 완산주에서는 정변이 일어난다. 주도자는 장자 신검이었다.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자 후계자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 차자와 삼자[22]양검용검은 각각 강주 도독과 무주 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있었고 신검만이 완산주에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능환은 신검에게 견훤을 김제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살해할 것을 권하였다. 그대로 시행되어 이때 금강은 형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신검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쿠데타 세력의 정당성을 밝히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적어도 조서의 효력은 반란을 일으킨 지 6개월 이후인 음력 10월 17일에 발효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검 일파가 국내를 장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견훤이 창업주로서의 권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 이 조서에서도 또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이 권위가 무능력해졌다는 것이 신검측의 주장이었으나, 그렇지 않다는 점이 차후의 사건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편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왕위 계승 문제 뿐만 아니라,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고려와 강화를 하거나 항복을 하자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근왕파와 계속 전쟁을 하자는 강경파 사이의 대립이 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견훤의 발언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군사가 북쪽의 고려군보다 배나 많은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
 
— 견훤(936년 정월), 《삼국유사

라고 아들들에게 발언하였으나,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미 935년 음력 6월에 백제를 떠났던 견훤이 시기상 할 수 없는 발언이고, 신검의 정변 이전에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934년 이후 견훤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편집] 고려 망명과 신검 토벌

그런데 이 조서가 효력을 지니기 이전인 935년 음력 6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 고려로 망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 해에 유금필나주를 다시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자신이 견훤보다 10여 세가 어리다고 하여 견훤을 상보(尙父)로 불렀으며, 남궁을 주었으며 직위를 백관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23]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어 936년 음력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가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936년 음력 6월에는 견훤이 직접

老臣(노신)이 殿下(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殿下(전하)의 威勢(위세)에 의지하여 逆子(역자)를 誅(주)하기 위하여서입니다. 바라건대 大王(대왕)께서는 神兵(신병)을 내어 亂賊(난적)을 殲滅(섬멸)하게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여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왕무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936년 음력 9월, 왕건은 3군을 이끌고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쳤으며 내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진격까지 세 달이 걸린 것은 왕건이 특별히 전국 각지에서 대군을 징집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 명[24] 또는 총 8만 6천 8백 명[25]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을 본 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진 앞[24]또는 견훤 앞[25]에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백제 장수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 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한 차례 싸움에 백제군은 크게 패하였고, "적장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 명을 사로잡고 5천 7백 명의 목을 베었"[25]으며 군기가 문란해진 "적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25] 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이에 신검청주(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권유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한다(삼형제를 모두 죽였다는 설도 있다).

[편집] 최후

935년 왕위 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 상부(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 후백제를 멸망케 하였으며, 얼마 뒤에 황산사(黃山寺)에서 등창으로 죽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매우 심하게 되어 며칠만에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9일이라고 하는데, 대 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 되기에는 9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 그가 쓸쓸하게 사망한 곳은 연산현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을 한다.

[편집] 사후

폐위 후 왕국이 멸망하였으므로 묘호와 시호는 없다. 능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에 있다.

[편집] 가족 관계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제가기(李啼家記)에서는 견훤은 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전하고 있다. 진흥왕의 후손 가운데 원선의 아들이 아자개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수록하였다. 고대 한국에서는 甄(견)은 이 아니라 으로 발음 되었으며, 동사강목에도 진훤의 이름 앞 글자의 음이 (眞)이라고 하였다. 견(甄)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 질그릇장인 두가지로 이고, 병음은 (Zhen)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李을 이, 리로 발음하고 리를 원조을 삼듯이, 甄은 견, 진으로 발음되지만 진(전)이 원조이다.

견훤의 아버지는 성은 이(李)씨, 이름은 아자개이며,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李啼家記)에 따르면 장남은 견훤, 차남은 능애(能哀), 삼남은 용개(龍盖), 사남은 보개(寶盖), 오남은 소개(小盖)이며 딸로 대주도금(大主刀金)을 두었다고 한다. 부인은 상원·남원부인의 두 명이며 누가 누구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남부터 이름 끝자가 개盖라는 점 때문에, 삼남부터 오남까지는 남원부인의 소생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능애부터 소개까지는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도 불명확하다.

삼국사기》에는 명확한 가족관계가 드러나있지 않고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하며,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935년의 내란에 관련된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 924년 조물성을 공격할 때 군을 이끌었던 수미강(須彌强), 그리고 고려로 함께 망명한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뿐이다. 한편 《이제가기》에는 8남 1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여러 곳에서 몇 명의 부인을 얻었다는 삼국사기의 언급이 있으며 또한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신검, 양검, 용검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 때문에 행하는 추정이지 다른 증거는 없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제가기》의 8남 1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26].

  • 상원부인. 이는 견훤의 제1모친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1부인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하 9인 모두를 이 소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제가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 신검(神劍)
    • 양검
    • 용검
    • 금강
    • 종우(宗祐)
    • 알려지지 않음(闕)
    • 위흥(位興)
    • 청구(靑丘)

(능예)

    • 국대부인 (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故比)및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이 등장한다. 특히 비록 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는 견훤이 말년에 총애하던 애첩이지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오래 전에 결혼을 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집] 평가

  • 김부식삼국사기 견훤열전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그는 궁예와 견훤을 과도기적 인물 가운데서도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로 다루었으며, 특히 신라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여줬다는 점을 그들에 대한 공격 근거로 삼았다.

"[史臣(사신)은] 論(논)한다. 신라는 운수가 궁하고 道(도)가 喪(상)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歸依(귀의)할 곳이 없었다. 이에 여러 도적이 틈을 타서 고슴도치털과 같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도 심한 자가 弓裔(궁예)·甄萱(견훤) 두 사람이었다. 弓裔(궁예)는 본시 신라의 王子(왕자)로서 도리어 宗國(종국)을 원수로 삼아 멸망시킬 것을 도모하여, 先祖(선조)의 畫像(화상)을 (칼로) 치기까지 하였으니, 그 不仁(불인)함이 심하다. 萱(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서 신라의 祿(녹)을 먹고 살았는데, 속으로 禍心(화심)을 품고 나라가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기어 都邑(도읍)을 침략하고 君臣(군신)을 殺戮(살륙)하기를 금수 죽이듯, 풀 베듯 하였으니, 실로 天下(천하)의 元惡(원악)이요 大罪(대죄)이다. 그러므로 弓裔(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을 당하고 甄萱(견훤)은 禍(화)가 그 아들에게서 일어났으니, 모두 自取(자취)한 것이다. 또 누구를 허물하리요. 비록 項羽(항우)와 李密(이밀)의 雄才(웅재)로도 漢(한)과 唐(당)의 興起(흥기)를 敵對(적대)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弓裔(궁예)·甄萱(견훤)의 凶惡(흉악)한 人間(인간)이 어찌 我太祖(아태조)에게 서로 抗拒(항거)할 수 있으랴? 다만 太祖(태조)를 위하여 백성을 몰아다 준 자(歐民者(구민자))이었다.

[편집] 대중문화와 견훤

  • 이환경이 극본을 썼던 태조 왕건에서 서인석이 연기한 견훤은 초반에는 참모 최승우의 합리적 지적을 무시하고 저돌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려 하다가 많은 실패를 맛보는 군주로 묘사되었으며, 후반에는 현실적 힘을 중시하는 군주로 묘사되었다.

[편집] 후백제 견훤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주석

  1. 내부적으로 군주가 된 때는 892년이고, 외부로부터 공인받은 왕이 된 때는 900년이다.
  2. 견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 질그릇장인 두가지이고, 병음은 전(Zhen)이라는 설이다.
  3. '정개(政開)'라는 연호까지 정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4. 이병도에 따르면, 웅주 [[|회덕군|비풍군]] 적오현 또는 덕진현이라 하였다.(《삼국사기》잡지제5, 지리3 신라) 912년의 전투는 나주 지역을 두고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충남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라 보긴 힘들고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영암군 덕진면 일대로 추정되며, 이 지역은 대대로 덕진진이 위치하고 있었다.
  5. 이때 항복한 아자개가 견훤의 친아버지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6. 고려사》제1권 세가 제1 태조세가 태조 9년.
  7. 예천 용궁
  8. 홍성
  9. 남해
  10. 여수
  11. 문경
  12.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는 경애왕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게 하였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에게 약탈을 마음대로 하라고 명하였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또한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13. 팔공산 인근의 지명 및 대구지하철 1호선역의 역명을 참조하라.
  14. 영동 양산
  15. 이는〈신라본기〉경순왕 2년 음력 10월에만 보인다.
  16. 삼국사기》의 설을 따랐다. 《고려사》의 경우 오어곡성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앞서 관흔이 확보한 곳의 지명과 동일하므로 부정확한 설명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본기경순왕 2년 음력 10월의 무곡성 함락 기사로 보아 이 시기 군위 일대에서 백제 군의 군사 행동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7. 《고려사》 권92 열전 제5 유금필. 태조 11년929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18. 나주(羅州) 지방 40여 군은 … 근자에는 백제에게 약탈당하므로 6년간에 바닷길도 통하지 않으니…
     
    왕건(재위 18년: 935년), 《고려사》 권92 열전 제5 유금필
  19. 이는 삼국사기의 설이다. 고려사에서는 영주 순흥으로 이야기하며, 또한 929년 음력 7월에 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력 9월에 왕건이 영주로 오기 위해서는 바로 옆 고을인 순흥을 견훤이 점령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의 지명 및 사건 배열 순서를 따랐다.
  20. 이 전투는《고려사》 권92 열전 제5 유금필열전에만 수록되어 있다.
  21. 고려사 유금필열전에 따른 설명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적이 진을 치기도 전에 돌격하였다고라고만 되어 있다
  22. 이는 금강이 4자이며 그 형으로 양검용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유추하는 것으로, 누가 차자이고 삼자인지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23. 경순왕에게는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식읍으로 양주를 택한 것은 초기 백제가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24. 삼국사기
  25. 고려사
  26. 이병도의 《삼국사기》주석에 이러한 주장이 등장한다.

[편집] 바깥고리

[편집] 참고

전 대
초대 군주
제1대 후백제 국왕
892년 ~ 935년 3월
후 대
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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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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