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마진/태봉
高麗/摩震/泰封

901년 ~ 918년
History of Korea-Later three Kingdoms Period-915 CE.gif
915년의 한반도. 황색이 태봉.
수도 개경, 철원
정치
공용어 중세 한국어
정부 형태 군주제
국왕 궁예(901년 ~ 918년)

태봉(泰封, 901년~918년)은 신라 말기에 고구려 부흥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후삼국 시대의 나라로 궁예901년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삼아 건국하였다. 건국할 때의 국호는 고려(高麗)였으며, 이것은 장수왕 때 변경된 고구려의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고, 훗날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도 부른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약자인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하였다. 905년 수도를 철원(鐵原)으로 옮겼으며,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변경하였다. 918년 왕건을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으로 멸망하고 고려가 세워진다. 이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역사[편집]

궁예892년 북원(北原 : 원주)의 적괴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고 강원도 각지를 공략하는 한편 수년 간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하고 임진강(臨津江) 일대를 공취하여 차차 독자적 기반을 닦아 898년에는 송악군(宋岳郡 : 開成)에 웅거하여 자립의 기초를 세웠다.

이 무렵 왕건(王建)이 궁예의 휘하로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철원태수(鐵圓太守)의 벼슬을 주고 북원양길에게 대항하게 하여 그 땅을 빼앗고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당시 궁예신라에게 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 복수한다고 호언하며 서북지방의 인심을 모으려 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으며 신라의 관제를 참작하여 관제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새 국호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약자이며, 마하는 산스크리트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중국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 '동방의 제국'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즉, 마진은 '대동방국'(大東方國)을 뜻하는 국호이다.

905년 국도(國都)를 철원으로 옮기고 성책(聖冊)이라 개원(改元)하였다가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개원, 914년 다시 정개(政開)라고 고쳤다. 궁예철원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견훤(甄萱)의 후백제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태봉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는 한편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진도(珍島)·고이도성(皐夷島城)을 격파하고 금성(錦城 : 나주)을 점령하였다.(금성 싸움) 이리하여 국토가 넓어짐에 궁예는 대규모의 궁궐을 건축하고, 오행사상(五行思想)을 믿어 신라의 금덕(金德)에 이기고자 자기를 수덕(水德)으로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 칭하며 일상의 기거동작을 불심을 따르고 불교사상을 통하여 국가를 통치하려 하였다.

궁예의 호족 세력 견제와 민중 지향적 정치 방향에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게 된 측근자들과 호족은 전전긍긍하게 되어 마침내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 측근 4인이 의논하여 호족 세력의 대표격인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는 김순식이 있는 명주성(강릉)으로 도피하는 도중 부양(斧壤 : 평강)에서 왕건의 추격군을 만나 퇴로가 차단당하고 추격군과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 자결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에서 맞아 죽었다고 되어 왕건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고 백성들도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육당 최남선은 풍악기유에서 궁예는 지방 호족들에게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쫒겨났다고 언급하였다.

궁예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모든 기거동작을 불교식으로 하여 그가 남긴 석등롱(石燈籠)이나,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한 일 등은 뒤에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다.

태봉의 역대 국왕[편집]

  1. 궁예, 재위 901년-918년

같이 보기[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