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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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다른이름: 대마도
Tsushima island ko.png
지리
위치 동아시아
면적 696.10 km²(본섬)
708.5 km²(부속섬 포함)
실효 지배
일본 일본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
영유권 주장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상남도 대마군
일본 일본
나가사키 현

쓰시마 섬(일본어: 対馬 (つしま), 문화어: 쯔시마 섬) 또는 대마도(對馬島)는 한반도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이다.

지리[편집]

규슈까지의 거리는 약 132km,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49.5km로 한반도 쪽에 더 가깝다. 섬 크기는 남북에 82km, 동서에 18km이다. 섬 넓이는 700km²이며, 섬의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34,610명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4%이며, 대부분이 산지이다.

관광업이 번성하였고, 일본 이외에, 대한민국, 중국 등에서 많은 관광객이 온다.

역사[편집]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가 쓰시마를 토벌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인 1419년 음력 6월 조선세종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하여 대마도 원정을 하는 등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또한 조선의 국왕이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에 따라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후에도 조선은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근거지가 되면서부터 차츰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이 설치되었고, 쓰시마 도주인 소(宗) 가문이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에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 후추 번이 폐지되고,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설치되었다. 1876년에 나가사키 현(長崎縣)에 편입되었으며, 소 가문은 일본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일본 제국의 강요로 소 가문과 정략 결혼을 하기도 했다.

쓰시마 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672년 21대 도주이자 쓰시마 후추 번 3대 번주인 소 요시자네(종의진,宗義眞)때 작은 배가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대선월,大船越)이라는 운하를 만들어 두개의 섬으로 나뉘었고 1900년 일본 제국 해군러일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소만(浅茅湾)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제키세토(万関瀬戸)라 불리는 더 큰 폭의 운하를 만들게 되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쓰시마 섬 북부를 가미시마(上島), 남부를 시모시마(下島)라 부른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1][2]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2013년 3월 22일에는 대한민국 경기도에 위치한 의정부시의회가 대마도 반환을 촉구 하는 한편 대한민국정부차원의반환 촉구를 요청하고 있다. 》

최근에는 일본의 한 언론에서 "한국이 쓰시마 섬을 넘본다"라는 기사를 써서 영토분쟁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3] 그리고 산케이 신문에서는 "쓰시마가 위험하다"라는 쓰시마 위기론을 기사로 써 넣었다. [4]

2008년 일본의 독도 교과서 명기 사건 관련[편집]

2008년 일본 정부가 중학 교과서에 독도 관련한 자국 영토 주장을 하기로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한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최고의원 허태열은 2008년 7월 16일 한나라당 지도부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영유권 주장의 예와 B형간염유전자의 유사성을 예로 들며 쓰시마 섬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5]

대마도포럼[편집]

201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 37명 의원들은 대마도 포럼을 창립하였다.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은 이날 포럼 창립식에서 "대마도는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우리 영토임이 분명하다"며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초대 제헌국회에서의 영유권 주장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의 반환 요구 이후로 사실상 전무한 상태로 현재까지 이르러왔다"고 지적하였고 여야 의원들은 일본이 불법으로 강점하고 있는 대마도를 조속히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실제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깝고 대마도 주민의 혈통조사에서도 한국 혈통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대마도 영유권 주장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내용을 설립 목적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포럼 소속 의원들은 향후 활동과 관련, 매년 상반기(3월)와 하반기(11월)로 나눠 정책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결의안 채택과 국민운동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6]

대마도의 날[편집]

영토 분쟁[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이한우 기자. "[Why] "대마도는 우리 땅" 역사 근거 많다 (한국어)", 2008년 7월 25일 작성. 2009년 5월 27일 확인.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2. 드림위즈사전 : 오늘속의 역사 - 이승만 대통령, 대마도 일본에 반환요구. 드림위즈 사전 (2006년 1월 7일). 2010년 1월 12일에 확인.
  3. "日언론 “한국이 쓰시마를 넘본다” 호들갑", 《서울신문》, 2008년 8월 29일 작성. 2010년 1월 12일 확인.
  4. "日 산케이 '쓰시마 위기론' 제기", 《연합뉴스》, 2008년 10월 21일 작성. 2010년 1월 12일 확인.
  5. "허태열 “대마도 우리땅이라 하자” 한나라 지도부회의 맞아?", 《한겨레》, 2008년 7월 16일 작성. 2010년 1월 12일 확인.
  6. "대마도는 우리땅" 여야 의원 37명 대마도포럼 창립 아시아경제 2010년 9월 28일 작성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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