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당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견당사가 이용한 항로
견당사가 이용한 선박 모형

견당사(일본어: 遣唐使 (けんとうし) 겐토시[*])는 나라 시대(710년-794년)와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에 일본 조정에서 (618년 - 907년) 왕조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당나라에 파견한 조공 행렬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에는 이누가미노 미타스키(犬上御田鍬)를 필두로 한 일본 최초의 견당사들이 장안에 도착했다.[1]그 후에도 일본은 630년에서 894년에 이르는 200여년 동안 총 19차례나 견당사를 파견했다.[2]그 중에 두 차례는 실패했고, 한 번은 전(前) 견당사들의 귀국을 영접하기 위해 이뤄진 파견이었으며, 또 당나라 사절들의 귀국을 호송하기 위한 파견도 세 차례 있었으니, 실제로 일본이 정식으로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낸 횟수는 13번이라 해야 할 것이다.[3]

894년(간표 6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건의에 따라 견당사가 폐지되었다. 일반적으로 바다를 건널 때 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과 당 말의 내정불안이 874년 견당사 폐지의 이유로서 거론되고 있다. [4] 다른 한편으로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淸)는 귀족이 자신들의 문화에 자족하고 왕성한 모험과 탐구의 활력을 잃어버린 결과 견당사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5] 견당사 폐지가 복잡한 이유에 의한 것임은 틀림없지만 폐지 그 자체가 당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이 재고의 시기에 접어들었던 9세기 일본의 모습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6]

목차

견수사와 견당사[편집]

일본에서 견당사를 파견하기 이전에도 쇼토쿠 태자수나라에 견수사(일본어: 遣隋使 (けんずいし) 겐즈이시[*])와 유학승(留學僧)을 보냈다. [7]수가 망하고(618년) 당이 성립(618년)한 이후에도 이러한 전통은 이어져, 견수사를 견당사로 개칭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계속 파견하였다. 다이카 개신(646년) 뒤에는 국제 관계의 긴장으로 주로 정치, 경제적 목적으로만 행해졌다. [8]7세기 말까지 약 30년간 견당사 파견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702년에 다시 문화적인 목적으로 견당사를 파견하였다.[9]

경로[편집]

630년부터 665년까지는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서진하여 산둥 반도에 이르는 북로를 이용하였다. [10] 견당사 파견이 재개된 702년부터는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양쯔 강으로 이르는 남도로(南島路)가 이용되었고, 773년부터 838년까지는 양쯔 강으로 직행하는 남로(南路)가 이용되었다.[11] 현재의 고베 시의 항구는 당시, 오와다 정박지(大輪田泊)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견당사를 파견하는 항구 중 하나였다.

파견[편집]

653년(하쿠치 4년)에 2차 견당사가 파견되었다. 717년(레이키 2년), 다지히노 아가타모리(多治比県守)가 인솔하는 제9차 견당사가 파견되었다. 아베노 나카마로, 기비노 마키비, 겐보(玄昉) 도 일행 중 하나이다. 750년(덴표쇼호 2년) 견당사가 열여섯 번째로 파견되었다. 804년, 승려 구카이는 사이초와 함께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806년에 귀국하였다.

영향[편집]

일본은 견당사를 통해 당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여 덴무(天武)·지토(持統)·몬무(文武)의 3대(673년~707년)에는 활력에 찬 것이 특징인 하쿠호(白鳳)문화를 일으켰다. [12]또한 덴표 시대(729년~748년)에 이르러서는 대륙적 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수입된 서적과 기술은 이후 일본 문화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13]

참고 문헌[편집]

  1. 양지에 (2007).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 상 : 문화편 정치편 전쟁 편》, 문소라 역, 북공간, 112쪽. ISBN 978899015053 “당 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에는 이누가미노 미타스키(犬上御田鍬)를 필두로 한 일본 최초의 견당사들이 장안에 도착했다.”
  2. 양지에 (2007).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 상 : 문화편 정치편 전쟁 편》, 문소라 역, 북공간, 112쪽. ISBN 978899015053 “그 후에도 일본은 630년에서 894년에 이르는 200여년 동안 총 19차례나 견당사를 파견했다.”
  3. 양지에 (2007).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 상 : 문화편 정치편 전쟁 편》, 문소라 역, 북공간, 112쪽. ISBN 978899015053 “그 중에 두 차례는 실패했고, 한 번은 전(前) 견당사들의 귀국을 영접하기 위해 이뤄진 파견이었으며, 또 당나라 사절들의 귀국을 호송하기 위한 파견도 세 차례 있었으니, 실제로 일본이 정식으로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낸 횟수는 13번이라 해야 할 것이다.”
  4. 오오누키 에미코 (2004).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ねじ曲げられた?―美意識と軍國主義)》, 이향철 역, 모멘토, 129쪽. ISBN 8991136036 “일반적으로 바다를 건널 때 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과 당 말의 내정불안이 874년 견당사 폐지의 이유로서 거론되고 있다.”
  5. 오오누키 에미코 (2004).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ねじ曲げられた?―美意識と軍國主義)》, 이향철 역, 모멘토, 129쪽. ISBN 8991136036 “다른 한편으로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淸)30)는 귀족이 자신들의 문화에 자족하고 왕성한 모험과 탐구의 활력을 잃어버린 결과 견당사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6. 오오누키 에미코 (2004).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ねじ曲げられた?―美意識と軍國主義)》, 이향철 역, 모멘토, 129쪽. ISBN 8991136036 “견당사 폐지가 복잡한 이유에 의한 것임은 틀림없지만 폐지 그 자체가 당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이 재고의 시기에 접어들었던 9세기 일본의 모습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7. (2004) 〈견당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일본은 이미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때에 수(隋)에 견수사(遣隋使)를 보내고, 유학승(留學僧)을 파견하여 중국의 문물제도를 섭취하는 데 힘썼다.”
  8. (2004) 〈견당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이러한 사자의 파견은 618년 수가 망하고 신흥의 당제국(唐帝國)이 성립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 견당사의 파견은 다이카(大化) 개신 뒤에는 국제관계의 긴장으로 인해 주로 정치·경제상의 목적으로만 행하여졌다.”
  9. (2004) 〈견당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그러나 그 후 7세기 말엽까지의 약 30년간 율령제(律令制) 국가건설의 중요시기에는 견당사의 파견이 중단되었었으나, 702년에 다시 문화목적을 주로 한 견당사의 파견이 재개되어,”
  10. (2004) 〈견당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항로는 처음 한국의 서해안을 따라서 북상하여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이르렀으나,”
  11. (2004) 〈견당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7세기 후반부터는 동(東)지나해를 횡단하여 양쯔강으로 이르는 남로(南路)가 개척되었고, 9세기에는 양쯔강으로 직행하였다.”
  12.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52쪽. ISBN 89-86142-81-3 “덴무(天武)·지토(持統)·몬무(文武)의 3대는 천황중심의 국가체제가 완성되는 시기로 궁정에서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여기에 견당사, 견신라사 등의 파견에 의해 선진문화가 섭취되었기 때문에 활력에 찬 문화가 번성하였다18). 이 시대의 문화를 하쿠호(白鳳)문화라고 한다19). … 18) 견당사는 … 덴무(天武)·지토(持統)조에는 일시 중단되었지만 몬무(文武)조때에 아와타노 마히토(栗田真人)가 파견되었다.”
  13. (2004) 〈견당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당시의 당은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를 포함하는 세계적 문화권의 중심이었는데, 일본은 이 성당문화(盛唐文化)를 섭취함으로써 비로소 덴표(天平)시대의 대륙적 문화가 개화할 수 있었다. 이 견당사에 의해 수입된 서적과 기술자가 습득한 여러 기술은 이후 일본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