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노 미치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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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일본어: 菅原道真 (すがわらの みちざね), 죠와 12년 6월 25일(845년 8월 1일) ~ 엔기(延喜) 3년 2월 25일(903년 3월 26일)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학자, 한시인(漢詩人), 정치가이다. 참의(参議) 스가와라노 고레요시의 셋째 아들이다. 관위는 종2위, 우대신(右大臣)이며, 정1위, 태정대신에 추증되었다. 스기와라노 미치마사, 스기와라노 도신이라고도 한다.

우다 천황에게 중용되어 승진하고, 다이고 천황 치세에서는 우대신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의 참소로 인해, 죄를 얻어 다자이곤노소치(大宰権帥)직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사후에 덴만 덴진(天満天神)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는 학문의 신으로서 받들어진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계보

[편집] 사적・작품

저서로는 자신의 시와 산문을 모은 『관가문초(菅家文草)』전 12권(쇼타이 3년, 900년), 다자이후에서의 작품을 모은 『관가후집(菅家後集)』(엔기 3년, 903년경), 편저에 유취국사가 있다. 일본기략에 의하면 간표 5년(893년), 우다 천황에게 『신찬 만요슈(新撰万葉集)』 2권을 바쳤다고 전해진다. 신찬 만요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편집하였다는 것이 일반설이지만, 이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와카집으로 『관가어집(菅家御集)』등이 있지만, 후세의 위작이 다수 들어있다는 지적이 있다.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2수의 와카가 채록되어 있다.

육국사의 하나인 일본삼대실록의 편자이기도 하다. 일본삼대실록은 좌천 직후의 엔기 원년(901년) 8월에 완성되었다. 다만, 좌천되었기 때문에 미치자네의 이름은 편찬자의 명단에서는 빠져 있다.

할아버지가 시작한 스가와라 가문의 사숙인 칸케로카(菅家廊下, 산인테이(山陰停))를 주재하면서, 인재를 육성하였다. 한때는 일본 조정에 그 출신자가 100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편집] 와카

此の度は 幣も取り敢へず 手向山 紅葉の錦 神の随に

海ならず 湛へる水の 底までに 清き心は 月ぞ照らさむ

東風吹かば にほひおこせよ 梅の花 主なしとて 春を忘るな (처음 출판된 『拾遺和歌集』에 의한 표기. 후세에 '春な忘れそ'라고도 쓰이게 되었다)

[편집] 사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은 이후, 수도에서는 재난이 빈발했다. 우선 미치자네의 정적이었던 후지와라노 도키히로가 엔기 9년(909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들어 죽었다.

엔기 23년 4월 20일(923년 5월 13일), 다시 좌천되기 이전 직위였던 우대신으로 복위되었고, 정2위의 품계를 추증한 것을 시작으로, 쇼랴쿠 4년(993년)에는 정1위, 좌대신, 같은 해에 다시 태정대신에 추증되었다(이러한 명예 회복의 배경에는 미치자네를 참소한 도키히라가 요절하여 대가 이어지지 못하고, 우다 천황의 측근으로 미치자네에게 호의적이었던 도키히로의 동생 후지와라노 다다히라후지와라 가문의 적통을 계승하게 되었다는 이유가 작용하였다고 한다).

근대, 특히 2차 대전 이전에는 황실의 충신으로서의 면모가 강조되었다. 지폐 인물로도 채택되었다.

[편집] 관련항목


[편집] 관련서적

[편집] 갤러리

[편집] 외부 링크

[편집] 각주

  1. 오오토모노 사데히코(大伴狹手彦)의 6세 손.(中田憲信『菅公系譜』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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