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 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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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카 개신(たいかのかいしん, 大化改新)은, 일본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고토쿠 오키미(孝徳大王) 2년, 일본 연호로 다이카(大化) 2년(646년) 봄 정월 갑자 초하루(1일)에 발호된 「개신(改新)의 조(詔)」를 토대로 한 정치개혁 운동이다. 나카노오에노 미코(中大兄皇子, 훗날의 덴지 천황) 등이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암살하고 소가 씨(蘇我氏) 본종가(本宗家)를 멸한 을사의 변(乙巳の變) 뒤에 이루어졌다고 하며(이 암살사건까지 다이카 개신으로 포함시켜 부르기도 한다). 오키미(大王, 천황)의 궁(수도)을 아스카(飛鳥)에서 나니와 궁(難波宮, 지금의 오사카 시 주오 구)으로 옮기고, 소가 씨를 포함한 아스카의 호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정치 구조가 오키미 중심의 정치로 바뀌게 된 사건이자 「다이카」라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개요[편집]

20세기 중후반기까지 일본에서 다이카 개신은 일본의 율령제(律令制)가 도입된 시기로 이해되었다. 다음 항목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을 토대로 다이카 개신의 경과를 기록하겠지만, 1967년 12월 후지와라쿄(藤原京) 북쪽 외호(外濠)에서 발굴된 「기해년[1] 10월 가즈사 국 아와노고오리(阿波評) 마쓰사토 향(己亥年十月上捄国阿波評松里□)」이라는 명문이 적힌 목간(木簡)이 발굴되면서 그때까지의 「군평(郡評) 논쟁」(후술)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개신의 조」라 불리는 문서도 《일본서기》 편찬시에 가필되고 후세에 윤색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을사의 변[편집]

자세한 내용은 을사의 변 항목을 참조하십시오. 소가 씨는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 우마코(馬子) - 에미시(蝦夷) - 이루카의 4대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훗날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이러한 소가 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중국의 중앙집권제와 같은 군주, 즉 오키미케(大王家, 일본 황실)로 권력을 되돌리고자 가루노 미코(軽皇子, 훗날의 고토쿠 오키미)에게 접촉했으나, 그의 기량이 부족함을 알고 그만두고 나카노오에노 미코에게 접근하였다. 함께 견수사 출신의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에게 학문을 익히고 소가 씨 타도의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같은 소가 씨족임에도 에미시・이루카 부자에게 비판적이었던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소가노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결혼하고 사에키노 고마로(佐伯子麻呂), 가쓰시로노 와카이누카이노 쓰나다(葛城稚犬養網田) 등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고교쿠 오키미(皇極大王) 4년(645년) 6월 12일, 아스카의 이타부키 궁(板蓋宮)에서 나카노오에와 가마타리 등이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하는 쿠데타를 결행하고, 다음날 소가노 에미시까지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질러 자결함으로써 소가 씨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막을 내렸다. 이것을 사건이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라 「을사의 변」이라고 부른다.

신정권 발족[편집]

을사의 변 직후인 6월 14일에 고교쿠 오키미가 퇴위하고,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자신이 오키미가 되는 것을 사양하는 대신 가마타리와 상담하여 왕제(王弟) 가루노 미코를 즉위시키고(고토쿠 오키미)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 이것은 스이코 오키미(推古大王) 때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황태자로서 정치 실권을 쥐었던 것을 답습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새로 좌우 오오오미(大臣) 두 사람과 우치노오미(内臣)를 임명하고, (唐)의 율령제도를 실제로 운영하기 위한 「브레인」으로서 구니노 하카샤(國博士)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정치 교체는 쇼토쿠(聖德) 태자의 정책을 계승한 정치 변혁이기는 하나 당제(唐制)를 모방한 것으로, 소가 씨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 흐름에 반응하여 중앙집권적 · 관료제적인 정치기구로써 권력 집중과 국가 권력을 최고도로 집중시키고 발휘시키기 위한 국정 개혁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 대왕 고토쿠 오키미, 황태자 나카노오에노 미코
  • 좌대신(左大臣) 아베노 우치마로노 오미(阿部内麻呂臣), 우대신(右大臣)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 우치노오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 구니노하카샤 다카무코노 구로마로(高向玄理), 구니노하카샤 민(旻)

6월 19일, 고토쿠 오키미와 나카노오에가 군신을 큰 나무 아래 모아서 「제도(帝道)는 하나 뿐이다」, 「폭역(暴逆, 소가 씨)을 벌하였으니 이후 군주는 두 정치를 행하지 않고 신하는 두 조정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신에게 맹세하는 의식을 행하고, 「다이카 원년」이라는 최초의 연호도 정했다. 연호를 다이카(大化)라 정한 후 씨성제도(氏姓制度)를 부정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건설하는 정치개혁에 착수하였다.

8월 5일에는 도고쿠(東國)에 고쿠시(國司)를 파견하고, 신정권이 목표로 하던 정치개혁에 착수했다(다만 이들 고쿠시는 임시 관직으로서 훗날의 고쿠시와는 같지 않다). 이들 고쿠시는 여덟 개 조(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어느 지역에 파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제3조는 게누(毛野) 방면, 제5조는 도카이(東海) 방면으로 보내졌음을 훗날의 복명(復命) 및 논공행상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신정권은 이같은 넓이를 단위구역으로서 여덟 개 조의 고쿠시를 도고쿠로 파견했다. 가네히쓰(鐘櫃)의 제도도 정하고, 남녀의 법과 양민・노비의 자손의 귀속도 결정되었다.

한편 소가 씨와 혈연이 있어 소가노 이루카에 의해 차기 오키미로서 주목받았으나 을사의 변 이후 출가하여 요시노(吉野)로 달아났던 후루히토노오에노 미코(古人大兄皇子)가 9월에 모반죄로 처형되고, 12월에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셋쓰(攝津)의 나니와(難波, 현재의 오사카 시 주오 구) 나가라노 도요사키 궁(長柄豊碕宮)으로 옮겨 정치의 중심을 호족에서 천황으로 바꾼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다이카 개신의 개요[편집]

다이카 2년(646년) 봄 정월 초하루, 신년 축하의 예가 끝나고 「개신의 조」를 선포하였다(이 「개신의 조」 선포를 다이카 개신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나, 앞서의 에미시 · 이루카 부자를 암살한 「을사의 변」을 개신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개신의 조」로서 발호된 주요 정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 지금까지 여러 호족들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부민(部民)과 전장(田莊)을 폐지하고 그 전답과 백성은 모두 천황의 것으로 한다(공지공민제).
  2. . 기존의 구니(國), 고오리(郡), 아가타(縣), 고오리(縣) 등을 정리하고 영제국(令制國)과 그에 부수한 고오리(郡)로서 정비한다(국군제도).[2]
  3. . 호적과 계장(호구 대장)을 만들어 나라에서 공민(백성)에게 공지(논밭)를 나누어 준다(반전수수법).[3]
  4. . 예로부터 내려오는 부역 제도를 폐지하고, 논밭을 기준으로 각 고을의 특산물을 바치게 한다(조용조).[4]

이 밖의 다른 제도에 대해서도 큰 개혁이 이루어졌다.

박장령(薄葬令)
지금까지의 능묘(陵墓)는 자유롭게 제작되어 왔으나, 신분에 따라 제작 가능한 능묘의 규모가 규제되었다. 순사(殉死) 금지, 왕릉 제작에 걸리는 시간은 7일 이내로 제한한다는 등의 규제책이 마련되었다(이 박장령으로 일본은 고분 시대를 사실상 청산했다).
습속 개혁
남녀의 법 정리
교통 문제의 해결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시나베(品部) 폐지와 팔성백관(八省百官) 제정
기존의 세습제 직책이던 도모노 미야쓰코와 시나베를 폐지하고, 특정 씨족이 특정 직무를 세습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예를 들어 모노노베 씨物部氏는 군사를, 나카토미 씨中臣氏는 제사를 맡던). 더불어 팔성백관(八省百官)이 제정되면서 중국식 관료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그러나 이후의 제사 등에서 나카토미 씨가 이를 그대로 맡는 등 세습제가 유지된 경우도 있었다).
오오오미(大臣), 오오무라치(大連) 폐지
오오오미 ・ 오오무라치를 폐지하고 대신 태정관(太政官)을 두어 좌대신 ・ 우대신으로 그 역할을 교체했다. 오오오미는 오미(臣)의 가바네(姓)에서, 오오무라치는 무라치(連)의 가바네에서 임명되었지만, 좌대신 ・ 우대신(후에 태정대신이 부가됨) 등의 임명은 오미 ・ 무라치의 제약이 없었다.
관위(冠位) 제도의 개정
과거 쇼토쿠 태자가 제정했던 관위 12계를 개정하여, 다이카 3년(647년) 관위 13계에서 다이카 5년(649년)에는 19계로 늘어났으며, 덴지 3년(664년)에는 26계로 개정되었다. 이것은 종래 관위 12계에 포함되지 못한, 그러나 오오오미 ・ 오오무라치 등을 배출하던 유력 씨족들을 관위 제도로 편성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서열을 매기기 위한 개혁으로 여겨진다. 관위 수가 해마다 늘어난 것은 관료제로 전환되면서 하급 관료에게까지 지급할 관위가 부족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법(礼法) 책정
직위에 따른 관(冠)과 의복, 예의 작법을 규정했다. 관위에 따라 착용하는 의복과 예법이 정해지고, 관위가 없는 양민은 흰 옷을 입게 했으며, 이들을 백정(白丁)이라 불렀다.

다이카 개신의 주요 정책들은 당시 견당사(遣唐使)를 통해 유입된 정보를 바탕으로 당의 관료제와 유교(儒敎)를 적극 수용한 부분이 보이지만, 기존의 씨족 제도를 한번에 바꾸지는 못하고 일본식으로 상당히 변경된 부분도 보인다.

정치 제도 개혁과 함께 외교면에서는 다카무코노 구로마로를 신라(新羅)에 파견하기도 했으며, 당에는 견당사를 보내어 법제와 문화 수입에 힘썼다. 또한 고시(越) 땅에 누타리(渟足)와 이와후네(磐舟) 두 목책을 쌓아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의 에미시(蝦夷)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순조롭게만 진행되지 못해서, 다이카 4년(648년) 개정된 관위 13계를 좌대신과 우대신조차 그에 따라 관을 착용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일본서기》는 기록되어 있다. 다이카 5년(649년)에는 좌대신 아베노 우치마로가 죽고, 우대신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모반 혐의를 받아 야마다사(山田寺)에서 자결하였다. 무고함이 후에 드러나긴 했지만 그 뒤 대규모 정치 개혁의 움직임은 줄어들었으며, 650년에 연호가 하쿠치(白雉)로 바뀌면서 일단 다이카 개신은 끝이 났다.

그 뒤[편집]

고토쿠 오키미와 나카노오에의 불화로 하쿠치 4년(653년) 나카노오에노 미코가 나니와를 떠나 아스카로 돌아가 버리면서 군신들은 모두 나카노오에를 따랐고, 고토쿠 오키미는 완전히 고립된 채 울분 속에서 이듬해 서거한다(이 불화의 배경은 고토쿠 오키미와 나카노오에 사이의 권력 다툼과 외교 정책의 대립이 지적되고 있으나 부족한 점이 많다). 이번에도 황태자인 나카노오에는 자신이 즉위하는 대신 어머니 고교쿠를 다시 즉위시킨다(사이메이 오키미).

사이메이 오키미의 시대에는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를 도호쿠 지방으로 보내어 에미시를 토벌하게 하는 등 지배권을 넓혔으나, 한편으로 정치 불안이 계속되어 658년에는 아리마노 미코(有間皇子)가 모반을 꾀하다 처형되기도 했다.

660년, 왜의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백제(百濟)가 나 ・ 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백제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661년 백제로의 구원병을 파병하는 것이 결정되고 사이메이 오키미와 나카노오에가 함께 지쿠시(筑紫)까지 나아가기도 했으나, 사이메이 오키미는 지쿠시에서 그만 서거하고, 백제에 보냈던 구원군도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나 ・ 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궤멸당한다. 668년에는 고구려(高句麗)까지 멸망하고 대륙의 공격 위협에 노출된 상태에서 나카노오에는 지쿠젠(筑前)이나 쓰시마(対馬) 등지에 미즈키(水城)를 쌓고 사키모리(防人)나 봉수대를 설치하며, 오쓰 궁(大津宮)으로 천도하는 한편 기존의 부곡(部曲)을 부활시키고 호족간 융화를 꾀하는 등 국토 방위를 중심으로 국내 제도 정비에 힘을 쏟았다. 또한 이때까지 「칭제(稱制)」 형식으로 국정을 지휘하며 즉위식을 미루어오던 나카노오에는 668년 오키미로 즉위하였다(덴지 오키미). 670년에는 새로운 호적을 만들고(경오년적) 671년에는 최초의 율령법전인 「오미령(近江令)」을 시행하였다.

671년에 덴지 오키미가 서거하고, 덴지 오키미의 동생 오오아마노 미코(大海人皇子, 훗날의 덴무 천황)와 덴지 오키미의 아들 오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 사이의 불화로 672년 임신의 난이 일어난다. 오오아마노 미코는 이 난에서 승리하고 즉위하였으며, 최초로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형 덴지 오키미보다 더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다이카 개신의 의문점[편집]

일본 역사에서 다이카 개신이 높게 평가된 것은 에도 막부 말기 기슈 번(紀州藩)의 중신(重臣)이었던 다테 지히로(伊達千広, 무쓰 무네미쓰의 친아버지)가 『대세삼전고(大勢三転考)』를 저술하면서 처음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발견했고 그것이 메이지 시대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은 다이카 시대(645년에서 650년까지)에 한정되지 않고 고토쿠 오키미 및 나카노오에노 미코(덴지 오키미), 덴무 천황, 그리고 지토 천황(持統天皇)의 전제 통치화를 통해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이라는 설이 요즘은 뿌리깊게 되어 있다.

  •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는 쿠데타가 「삼한(三韓)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자리」에서 거행되었다는 점. 당시의 상식으로서는 외교 의식 도중에 쿠데타가 일어날 수가 없다(외국의 사절에게 「우리 나라는 현재 내분 중이다」 즉 지금이 자국을 도모할 절호의 기회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 또한 「삼한의 사신」이 온다고 이루카를 속여서 암살 현장으로 불러낸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허구를 당시 국가 정책의 중심에 있던 이루카가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5] 다만 몇 년 뒤의 백강구 전투로까지 이어지는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의 정보 전달망을 생각하면 꽤 빠른 시간에 중국이나 한반도 관련 국가들이 왜에서의 쿠데타를 알았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루카 자신이 불온한 소식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한들 그것이 소가 씨에 대한 불만이며 일상적으로 나도는 소문이었다면 굳이 마음에 두지 않고 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
  • 조칙을 공포한 날이 「봄 정월 갑자 초하루(즉 정월 초하루)」인 점. 연초에 조칙을 내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정월 초하루에 발포되었을 가능성은 적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 일본에서 「고오리」를 「郡」이라는 한자로 표기하는 것은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제정된 뒤의 일로, 그 이전에는 「評」을 사용한 것을 목간 등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개신의 조 제1조에서 공지공민(公地公民), 즉 호족 소유의 사지사민(私地私民) 폐지를 외치면서도 도모노 미야쓰코나 구니노 미야쓰코(国造)가 소유한 부곡과 전장에 대해서는 그 소유권을 인정했다.
  • 「호적(戸籍)」, 「계장(計帳)」, 「반전수수(班田収授)」 등의 단어는 다이호 율령에서 처음 보이는 용어로 그 이전의 문서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 개신의 조에서 「처음으로 경사(京師)를 수리하였다」고 했지만 실제 야마토 왕권이 도성제(都城制)를 도입한 것은 694년 후지와라쿄가 최초였다.
  • 연호가 띄엄띄엄 기록되었거나 아예 없었던 시대도 존재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연호 제도가 정착된 것은 다이호(大宝) 원년으로 그때까지 일본에 연호 제도라는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 다이카 2년(646년)에 내려진 박장령에 따라 최초로 「화장(火葬)」된 군주는 지토 천황이 최초이며(남편인 덴무 천황과 「합장」된 것도 덴무 천황이 최초이다), 조를 반포한 고토쿠 오키미 본인조차 박장령을 따르지 않았다(고토쿠 오키미는 654년, 지토 천황은 703년에 서거).
  • 소가노 에미시, 이루카 부자가 죽은 뒤에도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개신 정권에서 우대신을 맡는 등 소가 씨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카 4년에 이시카와마로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결하긴 했지만 이 또한 다이카 정권의 기반이 취약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가 씨의 세력권이었던 아스카를 떠나서 나니와 궁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아스카로 돌아왔으며, 덴지 오키미의 시대에야 아스카에서 오미로 조정을 옮겼고, 임신의 난에서 승리한 오오아마노 미코는 다시 조정을 아스카로 돌렸다. 일본 황실이 아스카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694년의 후지와라쿄 천도 때부터였으며, 701년에 다이호 율령이 반포되었다.

이러한 점 등을 들어 7세기 중후반에 다이카 개신 같은 모종의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그 견해가 일치하지만, 그 시기는 645년보다 더 이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씨족 내의 내부 갈등을 이용해 세력을 꺾고 왕실의 힘을 뻗쳐 나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에서 왕권이 강해진 이유의 하나로서는 임신의 난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율령제도가 완성된 것은 다이호 율령에 의해서였으며, 그 다이호 율령을 중심으로 《일본서기》가 풀어 기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가 아버지 가마타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조[편집]

  1. 기해년은 서기 699년에 해당한다.
  2. 국군제도는 과거 호족의 세력권이던 구니나 아가타 등을 정비하여 오늘날과 같은 구니의 모습으로 다듬어져 갔지만, 실제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것은 개신의 조 이후 몇 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3. 50호를 1리로 하고 장(長) 1인을 둔다. 이장은 마을 안의 호구를 조사하고, 농경과 양잠을 권하며, 법을 위반하는 자를 단속하고, 부역에 고을 사람을 징발하는 것을 관장한다.
  4. 비단 · 명주 · 무명 등은 지역마다의 사정에 따라 골라 낼 수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호(戶)별로 특산물을 바치도록 한다.
  5. 中村修也 『偽りの大化改新』(講談社、2006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