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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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日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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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 시대(일본어: 古墳時代 (こふんじだい) 고훈지다이[*];고분시대)는 일본의 역사 구분으로, 3세기 중반부터 7세기 말까지의 약 400년을 가리킨다. 3세기 이후 도래인의 유입은 드물어지다가,[1] :19 3세기 후반부터 호족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조정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각지에 고분(고훈)이 축조되고, 대륙과 한반도에서 산업기술과 한자를 수입하여 고훈 문화가 성립되었다. [2]

정치[편집]

3세기 중반부터 6세기 말까지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북쪽으로는 도호쿠 지방에서 남쪽으로는 큐슈지방 남부까지 계속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전방후원분의 세기라고도 말한다.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조정이 통일정권으로서 확립되어가는 중에, 각지의 호족에게 허가한 형식이라고 여겨진다. 3세기 후반부터 나라 분지에서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전대보다 각별히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이 출현하고, 4세기 초기에는 오사카 평야에서 거대고분이 만들어졌으며, 4세기 말기 무렵에는 키나이(畿内)의 일부 지방에서 선진적인 고분군이 출현했다. 계속되는 5세기 중반에는 각지에 거대고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6세기 말기에는 일본 각지에서 거의 시간적으로 동일하게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야마토 정권이 확립에 따라 중앙・지방의 통치조직이 완성되어 더욱 강력한 정권으로 성장하였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된 7세기는 방분(方墳)·원분(円墳)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오오키미(大王)의 무덤은 특별히 팔각분(八角墳)으로 만들어졌다. 7세기 이후를 종말기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국가의 성립부터 고찰해보면, 전기・중기의 고대국가의 형성기를 지나, 후기에서 종말기에 걸쳐서 일본의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사회[편집]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기까지 도래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1] :19 고구려가 4세기 후반부터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가야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일본 열도로 피난 오는 사람들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1] :19 이 시기 일본 왕실은 백제를 비롯하여 백제 등지에서 피난 오는 도래 기술자로부터 유용한 대륙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백제가 고구려에 대적할 수 있도록 전면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 :20 이처럼 일본 왕실이 도래인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면서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도래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1] :21

문화[편집]

이 시기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문자와 불교, 유교가 전해졌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토사기(土師器)와 스에기(須惠器)를 사용했다. 청동기도 대륙에서 들어왔지만, 고대 오리엔트 지역과 달라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격차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할 기회가 없었고, 성능이 뛰어난 철이 대신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청동기는 동탁(銅鐸)과 같은 제사, 종교용으로만 쓰이게 되었다.

대외 관계[편집]

대외 관계로는, 5세기에는 야마토의 오왕(倭の五王)이 중국에 사자를 보냈다.

백제와의 관계[편집]

백제의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주 1]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기차게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 [3]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서기 366년(진구 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주 2]에 이뤄졌다.[4] 이처럼 왜는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하는 등[5],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근초고왕 때,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6] 당시 백제가 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 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 섬, 그리고 규슈마쓰우라 반도(松浦半島)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 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 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 [7]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8]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 [9][10][11]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12]516년 고안무(高安茂)[13]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문화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14] 이 불교의 전파를 기점으로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짓는다.

신라와의 관계[편집]

왜는 신라의 건국 초부터 시달리게 하였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으로서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 신라의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64년 음력 4월 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 왔는데,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마주하게 하였다. 왜병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달려들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 [16]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는데 이사금이 거부,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 [17]

주해[편집]

  1.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2. 일본서기진구 황후(神功皇后)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

주석[편집]

  1. 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
  2. (2004) 〈일본의 역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3세기 후반부터 호족(豪族)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각지에 고분이 축조되고, 대륙과 한반도(韓半島)에서 산업기술과 한자를 수입하여 고분문화가 성립되었다.”
  3.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근초고왕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4.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신공황후 46년(서기 366년)에 이뤄졌다.”
  5.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9쪽. ISBN 89-86142-81-3 “4세기말 이후가 되면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했다.”
  6. 조법종 (2007).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청아출판사, 210쪽. ISBN 978-89-368-0359-9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 때에는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7. 도민을 위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 200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8.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
  9.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10. 정윤미 (2011). 《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시루, 31쪽. ISBN 978-89-966493-2-8 “비상시국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주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린다.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바로 목협만치(木劦滿致)였다. ...말 그대로 문주왕은 목협만치를 남쪽으로 보냈고 그가 향한 남쪽은 바다 건너 섬나라, 즉 일본을 뜻했다.”
  11.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84쪽. ISBN 89-86361-55-8 “소가노의 증조부는 백제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서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라고도 함), 일본에서는 소가노 만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개로왕(蓋鹵王) 21년 (475)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목협만치가 개로왕의 아들 문주와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12. (720)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
  13. (720)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
  14.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
  15. 김용운 (2010). 《천황이 된 백제의 왕자들》. 한얼사, 45쪽. ISBN 978-89-89148 32-6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신라는 건국 초부터 왜의 침범에 시달린 것이 역력합니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의 왜였을 것입니다. 즉 신라를 침범한 왜는 이즈모에서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는 왜였을 것입니다.”
  16.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
  17.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