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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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천황
Emperor Godaigo.jpg
일본의 제96대 천황
재위 1318년 ~ 1339년
부황 고우다 천황
이전 천황 하나조노 천황
다음 천황 고무라카미 천황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후제호 천황, 1288년 11월 26일1339년 9월 19일)은 96대 일본 천황이다. 메이지 천황 즉위 이후의 사학자들은 그의 치세를 1318년에서 1339년까지로 산정하지만 그 이전에는 1318년에서 1332년까지로 고려되었다. 그때 그는 쇼군에 의해 폐위되었다. 9세기에 재위했던 다이고 천황의 이름을 따라서 지어졌다. 휘는 다카하루(尊治)이다.

생애[편집]

다이카쿠지통(大覺寺統)의 덴노로 고우다(後宇多) 천황의 차남이었다. 어머니는 이쓰쓰시 다다쓰구(五辻忠継, 미나모토노 다다쓰구)의 딸로 내대신(内大臣) 가잔인 모로쓰구(花山院師継, 후지와라노 모로쓰구)의 양녀가 된 닷테몬인(談天門院) 다다코(忠子)였다. 쇼오(正応) 원년 11월 2일(양력 1288년 11월 26일)에 태어나 겐겐(乾元) 원년(1302년)에 친왕선하(親王宣下)되었다. 가겐(嘉元) 2년(1304년)에 다자이노소치(大宰帥)가 되어 소치노미야(帥宮)로도 불렸다.

즉위[편집]

도쿠지(德治) 3년(1308년)에 지묘인통(持明院統)의 하나조노(花園) 천황의 즉위에 따라 황태자로 세워졌으며, 분포(文保) 2년 2월 26일(1318년 3월 29일)에 하나조노 천황의 양위를 받아 즉위, 3월 29일(4월 30일)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즉위 당시 천황의 나이는 31세였다. 즉위 후 3년 동안은 아버지 고우다 법황이 인세이를 실시했다. 고우다 법황의 유조에 따라 처음부터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는 형인 고니조(後二條) 천황의 어린 아들인 황태자ㆍ구니요시(邦良) 친왕이 성인이 되어 즉위할 때까지의 '중계'로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천황이 그 자신의 자손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은 불가능했다.(다만 고다이고 천황의 자손이 세습친왕가를 세우는 것은 인정되어 구니요시 친왕 계통의 황위계승자가 어릴 경우 장성할 때까지의 '중계'로서 즉위하거나, 후사가 아예 없을 시 고다이고 천황의 계통이 황위를 잇는 것도 고려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더욱이 천황 자신이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난 뒤에도 '치천(治天)의 군(君)'으로서 인세이를 행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천황의 불만은 더욱 쌓여갔다. 이것이 고우다 법황의 황위 계승 계획을 승인 및 보장하고 있던 가마쿠라 바쿠후에 대한 평생의 반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겐코(元亨) 원년(1321년), 인세이가 끝나고 천황의 친정이 개시되었다. 이보다 앞서 구니요시 친왕은 아들 야스히토(康仁) 친왕을 얻었는데, 장성했을 뿐 아니라 확실한 후사까지 얻어 황위계승 시기가 거의 눈앞에 다다른 그 시기에 고다이고 천황이 실질상의 '치천의 군'이 된 것은 오늘날까지 일본 역사의 큰 수수께끼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우다 법황의 불도수행설, 법황의 압력에 의한 강제 퇴위를 염려한 고다이고 천황에 의한 압박설, 지묘인통 측과 황위 위양 요구를 주고 받으려던 다이카쿠지통에 의한 정치적 공작설등이 존재한다.

바쿠후 타도 계획[편집]

쇼추(正中) 원년(1324년) 4월, 고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바쿠후 타도 계획이 발각되고, 로쿠하라 단다이에 의해 천황의 측근 히노 스케토모(日野資朝) 등이 처분받는 사건이 일어난다.(쇼추의 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괴이한 점은 주모자 색출 과정에서 정작 최고 주동자였던 천황에 대해서 바쿠후는 어떠한 처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황은 이후로도 은밀하게 바쿠후 타도를 꾀하면서 다이고사(醍醐寺)의 승려 몬칸(文觀)이나 홋쇼지(法勝寺)의 엔칸(円觀) 등의 승려를 끌어들여, 겐토쿠(元德) 2년(1329년)에는 중궁 사이온지 키시(西園寺禧子, 후지와라노 키시)의 순산 기도를 핑계로 은밀히 간토 조복의 기도를 행하면서 고후쿠사나 엔랴쿠사 등 난토(南都, 나라)의 지샤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다만 당시의 유력 권문이었던 사이온지 집안 소생의 친왕은 구니요시 친왕 계통에 맞설 유력한 황위계승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실제로 순산 기도가 목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친(親)다이카쿠지통 계열의 귀족들은 원래 구니요시 친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지묘인통이나 바쿠후도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천황은 점차 궁지에 몰렸다. 더욱이 구니요시 친왕이 병으로 훙거하자 지묘인통의 적자인 카즈히토(量仁) 친왕이 바쿠후의 지명으로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퇴위의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겐코(元弘) 원년(1331년), 또 한 번, 천황이 주도한 바쿠후 타도 계획이 측근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의 밀고로 발각되면서 천황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 위기 앞에서 천황은 교토 탈출을 결단, 마침내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거병한다. 처음에는 히에이 산으로 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사기(笠置) 산(지금의 교토부 소우라쿠군 카사기쵸 내)에서 농성하며 군사를 모았으나, 바쿠후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결국 이듬해 성은 함락되고 천황은 사로잡혔다.(겐코의 난)

유배, 그리고 탈출[편집]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했을 때, 바쿠후는 즉시 천황을 폐위하고 대신 황태자 카즈히토 친왕을 즉위시켰다.(고곤(光嚴) 천황)포로가 된 고다이고 천황은 조큐의 난의 선례에 따라 모반인으로서 겐코 2년 즉 쇼쿄(正慶) 원년(1332년) 오키(隱岐) 섬에 유배된다. 그곳은 예전, 조큐의 난 때에 고토바(後鳥羽) 천황이 유배된 곳과 같은 장소였다.

이 시기 천황의 황자인 모리요시 친왕과 가와치 국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하리마 국의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 등 '악당'이라 불리는 반(反) 바쿠후 세력들이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겐코 3년 즉 쇼쿄 2년(1333년),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를 위시한 나와 집안의 도움으로 오키 섬에서 탈출, 호키 국 센조 산(지금의 돗토리 현 토우하쿠군 코토우라쵸 내)에서 거병한다. 이를 추토하기 위해 바쿠후가 파견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가 거꾸로 천황측에 가담하여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략했고, 그 직후에 토고쿠에서 거병한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마침내 가마쿠라를 함락시키고 호조 집안을 멸문시켰다.

겐무 신정[편집]

교토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퇴위와 고곤 천황의 즉위 및 재위를 부정하고, 고곤의 조정에서 이루어졌던 인사들을 모두 무효로 돌렸다. 동시에 바쿠후와 셋칸을 모조리 폐지하고 천황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이른바 겐무신정(建武新政)을 시작한다. 지묘인통뿐 아니라 다이카쿠지통의 본가 혈통이었던 구니요시 친왕의 어린 아들들까지 모두 황위계승에서 제외되고, 본래는 분명 방류였던 자신의 친아들 츠네요시(恒良) 친왕을 황태자로 세우면서, 자신의 자손에게만 황통을 독점적으로 세습시킬 의사를 명확히 했다. 겉으로는 바쿠후가 등장하기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를 표방했지만, 그 내면은 중국의 그것과 같은 천황 중심의 전제정치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급한 개혁과 불공평한 논공행상, 뚜렷한 기준도 없이 이리저리 바뀌는 법령과 정책, 귀족이나 거대 지샤에서 무사에 이르는 광범위한 기득권 세력들에 대한 기득권 침해로 인해 빈발하는 소송에 신정 체제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오로지 증세된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교토 대내리(大內裏) 건설 계획이나 지폐 발행 계획 같은 비현실적인 경제정책 등, 신정 체제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시책에 대한 불만은 마침내 정권 비판으로까지 이어졌다. 무사들뿐 아니라 교토 귀족 출신의 문신 상당수는 정권에 싸늘한 태도를 취했고, 니조가와라(二條河原)의 낙서 사건처럼 정부의 무능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면서 조정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거기다 바쿠후 타도에 공을 세웠던 모리요시 친왕이 예전 바쿠후의 수장이었던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지위를 바라게 되면서 친왕과의 사이도 벌어져, 끝내는 다카우지의 중상모략에 빠져 친왕을 가마쿠라로 유배해버렸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배반[편집]

겐무 2년(1335년), 나카센다이(中先代)의 난을 진압하러 칙허도 없이 토고쿠로 향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난의 진압을 수행했던 장수와 사졸들에게 가마쿠라에서 독자적으로 은상을 주는 등 신정 체제를 이탈했다.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 추토를 명했다. 요시사다는 하코네ㆍ타케노시타의 싸움에서 패했지만, 교토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顯家) 등과 연계해 아시카가군을 물리친다. 하지만 다카우지는 무사히 규슈로 달아나 이듬해에 규슈에서 체제를 정비하고, 고곤 상황의 인센(院宣)를 얻어 다시 한 번 교토로 진격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천황에게 다카우지와의 화목을 진언했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듣지 않고 요시사다와 마사시게에게 다카우지 추토를 명했다. 하지만 이들은 미나토가와(湊川)의 싸움에서 다카우지에게 대패했고, 마사시게는 죽고 요시사다는 교토로 도망쳐왔다.

남북조 시대의 시작[편집]

아시카가군이 교토로 들어오자, 천황은 그를 피해 히에이 산으로 도망쳐 저항했지만, 아시카가측의 화친 요청에 따라 삼종의 신기를 아시카가측에게 건네주었고, 다카우지는 고곤 상황의 인세이 형식으로 지묘인통의 고묘(光明) 천황을 신황으로 옹립, 겐무시키모쿠(建武式目)를 제정하고 교토에 새로이 바쿠후를 열었다.(무로마치(室町) 바쿠후) 한편 고다이고 천황은 유폐되어 있던 카잔인(花山院)에서 도망쳤다. 다카우지에게 넘겨주었던 신기는 가짜라 주장하며, 천황은 요시노(지금의 나라 현 요시노군 요시노쵸)에 따로 조정을 세웠다. 이로써 교토의 조정(북조)과 요시노의 조정(남조)이 병립하는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시작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요시(尊良) 친왕이나 츠네요시 친왕 등을 닛타 요시사다에게 받들게 하여 호쿠리쿠(北陸)로 보내고, 가네요시(懐良) 친왕은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큐슈에, 무네요시(宗良) 친왕은 토고쿠, 노리요시(義良) 친왕은 무쓰 국으로 보내는 등, 자신의 황자들을 각지에 보내 북조측에 맞서려 했다. 하지만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끝내 병으로 쓰러져 엔겐(延元) 4년 즉 랴쿠오(曆應) 2년(1339년) 8월 15일에 요시노에 돌아와 있던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한다.(고무라카미(後村上) 천황) 그리고 다음 날, 요시노의 금륜왕사(金輪王寺)에서 반드시 역적(다카우지)을 토멸하고 교토를 되찾을 것을 유언으로 남긴 채 붕어한다. 향년 52세(만 50세)였다.

셋쓰 국의 스미요시(住吉) 행궁에 있던 고무라카미 천황은 남조측의 스미요시 대사의 궁사 츠모리(津守) 집안이 맡고 있던 장엄정토사(莊嚴淨土寺)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대법요를 실시했고, 또한 다카우지도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고자 교토에 덴류사(天竜寺)를 지었다.

가계도[편집]

  • 황후 : 고코쿄쿠인(後京極院) 사이온지(후지와라) 키시(西園寺(藤原) 禧子) (1303-1333) 사이온지 카네자네(西園寺 実兼)의 딸
    • 황녀 : ? (1314-?)
    • 황녀 : 신시츠쵸인(新室町院) 센세이몬인(宣政門院) 요시코(킨시) 내친왕(懽子 内親王) (1315-1362)
  • 황후 : 쥬시 내친왕(珣子 内親王) (1311-1337) - 고후시미 천황의 황녀
    • 황녀 : 사치코(코우시) 내친왕(幸子 内親王) (1335-?)
  • 뇨고 : 안후쿠텐(安福殿) 산죠(후지와라) 시게코(에이시)(二条(藤原) 榮子) - 산죠 미치히라(二条 道平)의 딸
  • 텐지 : 츄나곤텐지(中納言典侍) 카잔인(후지와라) 타시코(신시)(花山院(藤原) 親子) - 카잔인 무네타시(花山院 宗親)의 딸
    • 황자 : 하나조노노미야(花園宮) 미츠요시 친왕(満良 親王)
  • 텐지 : 다이나곤텐지(大納言典侍) 키타바타케(미나모토)씨(北畠(源)氏) - 키타바타케 모로시게(北畠 師重)의 딸
  • 텐지 : 신안사츠텐지(新按察典侍) 지묘인(후지와라)씨(持明院(藤原)氏) - 지묘인 야스후지(持明院 保藤)의 딸
  • 텐지 : 스이텐지사누키(帥典侍讃岐)
  • 쇼지 : 코토나이시(勾當内侍) 세손지(후지와라)씨(世尊寺(藤原)氏) - 세손지 츠네타다(世尊寺 經尹)의 딸
    • 황녀 : ?
  • 쇼지 : 쇼쇼나이시(少将内侍) 스가와라씨(菅原氏) - 스가와라 이마나카(菅原 在仲)의 딸
    • 황자 : 쇼죠 법친왕(聖助 法親王)
  • 후궁 : 신타이켄몬인(新待賢門院) 아노(후지와라) 야스코(레이시)(阿野(藤原) 廉子) (1301-1359) - 아소 킨야스(阿野 公廉)의 딸이자 토우인 킨카타(洞院 公賢)의 양녀
    • 황자 : 츠네요시 친왕(恒良 親王) (1325-1338)
    • 황자 : 나리요시 친왕(成良 親王) (1326-1344)
    • 황자 : 노리요시 친왕(義良 親王) - (고무라카미 천황)
    • 황녀 : 쇼우시 내친왕(祥子 内親王)
    • 황녀 : 이시 내친왕(惟子 内親王)
    • 황녀? : 신센요몬인(新宣陽門院) 노리코(켄시) 내친왕(憲子 内親王) (1345?-1391?)
  • 후궁 : 토우인(후지와라) 모리코(스시)(洞院(藤原) 守子) (1303-1357) - 토우인 사네야스(洞院 実泰)의 딸
    • 황자 : 겐엔 법친왕(玄円 法親王) (?-1348)
    • 황자? : 사이에 법친왕(最恵 法親王) (?-1370)
  • 후궁 : 민부켄산이(民部卿三位) 키타바타케(미나모토) 타시코(신시) - 키타바타케 모로타시(北畠 師親)의 딸
    • 황자 : 다이토노미야(大塔宮) 모리요시 친왕(護良 親王) 또는 손운 법친왕(尊雲 法親王) (1308-1335)
    • 황녀 : 료시 내친왕(姚子 内親王)
    • 황자 : 손세이 법친왕(尊性 法親王)
    • 황녀 : ? - 고노에 모토츠구(近衛 基嗣)의 부인
  • 후궁 : 곤다이나곤노 츠보네(権大納言局) 니죠(후지와라) 타메코(이시)(二条(藤原) 為子) - 니죠 타메오(二条 為世)의 딸
    • 황자 : 이치노미야(一宮) 타카요시 친왕(尊良 親王) (?-1337)
    • 황자 : 무네요시 친왕(宗良 親王) 또는 손쵸 법친왕(尊澄 法親王) (1311-1385)
    • 황녀 : 켄시 내친왕(瓊子 内親王) (1316-1339)
    • 황녀 : ?
  • 후궁 : 토우인(후지와라) 사네코(지츠시)(藤原(洞院)実子) - 토우인 사네오(洞院 実雄)의 아들
    • 황녀 : ?
  • 후궁 : 소케이몬인(昭慶門院) 키시 내친왕(憙子 内親王) (1270-1324) - 가메야마 천황의 황녀
    • 황자 : 코스나카노미야(越中宮) 츠네나리 친왕(恒性 親王) 또는 코쇼 법친왕(恒性 法親王) (1305-1333)
    • 황자 : 무몬겐센(無文元選) (1323-1390)
  • 후궁 : 레이쇼인(霊照院) 니죠(후지와라)씨(二条(藤原)氏) (?-1351) - 니죠 타메미치(二条 為道)의 딸
    • 황자 : 키와요시 친왕(躬良 親王) 또는 호닌 법친왕(法仁 法親王) (1325-1352)
    • 황자 : 친제이노미야(鎮西宮) 또는 츠쿠시노미야(筑紫宮) 카네요시 친왕(懐良 親王) (1329-1383)
    • 황녀 : ?
  • 후궁 : 유키몬인이치죠노 츠보네(遊義門院一条局) 하시모토(후지와라)씨(橋本(藤原)氏) - 하시모토 사네토시(橋本 実俊)의 딸
    • 황자 : 토키요시(요요시) 친왕(世良 親王) (?-1330)
    • 황자 : 죠손 법친왕(静尊 法親王) 또는 에손 법친왕(恵尊 法親王)
    • 황녀 : 준삼후(准三后) 요로코(킨시) 내친왕(欣子 内親王)
  • 후궁 : 오이나이곤나이시(少納言内侍) 시죠(후지와라)씨(四条(藤原)氏) - 시죠 타카스케(四条 隆資)의 딸
    • 황자 : 다이고노미야(醍醐宮) 손신 법친왕(尊真 法親王) 또는 코손 법친왕(杲尊 法親王)
  • 후궁 : 다이나곤노 츠보네(大納言局) 토우인(후지와라)씨(洞院(藤原)氏) - 토우인 킨사토(洞院 公敏)의 딸
    • 황녀 : 유시 내친왕(瑜子 内親王)
  • 후궁 : 우에몬토쿠노 츠보네(左衛門督局) 니죠(후지와라)씨(二条(藤原)氏) - 니죠 타메타다(二条 為忠)의 딸
    • 황녀 : 킨린니쇼(今林尼衆)
  • 후궁 : 콘츄나곤노 츠보네(権中納言局) 토우인(후지와라)씨(洞院(藤原)氏) - 토우인 킨야스(洞院 公泰)의 딸
    • 황녀 : 사다코(데이시) 내친왕(貞子内親王)
  • 후궁 : 요시다(후지와라)씨(吉田(藤原)氏) - 요시다 사다후사(吉田 定房)의 딸
  • 후궁 : 보몬노 츠보네(坊門局) - 보몬 키요타다(坊門 清忠)의 딸
    • 황녀 : ?
  • 후궁 : 호리카와(미나모토)씨(堀川(源)氏) - 호리카와 모토토키(堀川 基時)의 딸
    • 황녀 : ?
  • 후궁 : 엔쇼몬인하리마(延政門院播磨) 사카도(미나모토) 야스코(코우시)(坂戸(源) 康子) - 사카도 야스모치(坂戸 康持)의 딸
  • 후궁 : 와카미즈노 츠보네(若水局) 사카도(미나모토)씨(坂戸(源)氏) - 사카도 야스모치(坂戸 康持)의 딸
  • 후궁 : 호리구치(미나모토)씨(堀口(源)氏) - 호리구치 사다요시(堀口貞義)의 딸
    • 황녀 : ? - 요시미즈인 무네노부(吉水院 宗信)의 부인
  • 후궁 : 쇼쿤몬인고노에노 츠보네(昭訓門院近衛局)
    • 황자 : 시로히토왕(知良王)
  • 생모 불명
    • 황녀 : 요도니(用堂尼) (?-1396)
    • 황녀 : ? - 로쿠죠 아리후사(六条 有房)의 부인
    • 황자? : 류세이료시 (?-1366)

평가[편집]

  • 천황의 측근이었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는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보수적 문신관으로 신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 근세에 들어서는 고다이고 천황을 부덕한 군주로 인식하는 평가가 정착되었는데,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명에 의해 편찬된 《대일본사》에서는 남조를 정통으로 하는 입장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부덕했다고 평가하는 인식을 볼 수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독사여론》에서 왕조 정치가 쇠퇴하고 무가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은 누대에 걸친 천황이 실덕이 한 원인이었다는 관점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그 말미에 붙였다.
  •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하면서도 즉위 직후의 친정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