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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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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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시대(일본어: 奈良時代 나라지다이[*]; 내량시대, 710년~794년)는 넓은 의미로는 710년 겐메이 천황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한 때부터 794년 간무 천황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할 때까지의 84년의 기간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710년에서 784년에 간무 천황이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할 때 까지이 74년의 기간을 가리키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나라에 수도(헤이조쿄, 平城京)가 세워졌기 때문에 나라 시대라고 한다. 단, 740년 부터 745년 동안 쇼무 천황구니쿄(恭仁京, 교토 부 기즈가와 시), 나니와쿄(難波京, 오사카 부 오사카 시),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 시가 현 고카 시)에 각각 단 기간에 걸쳐 수도를 옮긴 일이 있다.

헤이조쿄는 중국의 수도 장안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도시로, 공무원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치도시였다. 헤이조쿄로 천도하는 데는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헤이죠코 천도에 앞서 선정되고 시행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일본국내의 실정에 맞게 여러 방면에서 검토하고 수정하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율령국가, 천황중심의 전제국가,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던 시대였다. 덴표 문화(天平文化)가 개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목차

[편집] 개요

710년에 수도를 나라의 헤이조쿄로 천도하였다. 이 시기의 율령국가는 호적계장(計帳)으로 인민을 파악하고, 조용조와 군역을 부과했다. 견당사를 자주 파견하여 을 비롯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전국에 고쿠분지(国分寺)를 세워, 불교적인 성격의 덴표 문화가 번성하였다. 고지키, 니혼쇼키, 만요슈같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문학작품이 등장했다. 이 시대에는 중앙에서 정쟁이 많이 발생하였고, 도호쿠에서는 에조(蝦夷)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사적으로는 710년 헤이죠쿄 천도부터 729년나가야 왕의 정변까지를 전기(前期). 후지와라 4형제(후지와라 후히토의 네 아들)의 집권부터 764년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藤原仲麻呂の乱)까지를 중기(中期), 고켄 천황과 도쿄(道鏡)의 집권 이후를 후기(後期)로 구분할 수 있다.

[편집] 전쟁과 황권의 동요

[편집] 나가야 왕의 변과 고묘시 황후 추대

나라 시대 초기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의 아들 후지와라 후히토가 정권을 쥐고 율령제도의 확립에 진력하는 동시에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며 후지와라 씨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후히토 사후에는 다케치 황자(高市皇子)의 아들로 덴무 천황의 손자인 나가야 왕(長屋王)이 우다이진이 되어 정권을 담당하였다. 전대부터 누적되어 온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유랑과 도망이 급격히 늘어나 사회 불안이 표면화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재원확보를 위해 723년(요로(養老) 7년)에는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을 시행하여 개간을 장려하였다. 몬무 천황과 후지와라 후히토의 딸인 후지와라 미야코(藤原宮子) 사이에서 태어난 쇼무 천황이 즉위한 724년(진키 원년) 즈음부터 후히토의 네 아들 무치마로(武智麻呂), 후사사키(房前), 우마카이(宇合), 마로(麻呂)가 정계에 진출하였다. 729년(진키 6년), 나가야 왕이 사실상 정계 최고직에 해당하는 사다이진에 취임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후지와라 4형제는 ‘좌도(左道)에 빠져 국정을 기울게 한다’고 참소하여 나가야 왕을 자결로 몰아넣고(나가야 왕의 정변), 정권을 장악했다. 정변 직후, 후지와라 씨는 후히토의 딸인 고묘시(光明子, 고묘 황후(光明皇后))를 쇼무 천황의 황후로 추대하는 데 성공하여, 고묘시는 신하로서는 최초의 황후가 되었다.

[편집] 다치바나 모로에 정권과 쇼무 천황

그러나 그런 후지와라 4형제도 737년(덴표 9년)에 유행한 천연두로 모두 사망하고, 황족 출신의 다치바나 모로에(橘諸兄)가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다. 모로에는 당나라에서 수학한 기비 마키비(吉備真備)와 승려 겐보(玄昉)등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후지와라 히로쓰구(藤原広嗣, 후지와라 우마카이의 장남)가 740년(덴표 12년)에 기비 등을 배제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규슈에서 거병하였으나, 정부군에 패배하고 전사하였다(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 비록 진압되긴 하였으나 이 반란 소식에 중앙 정권은 크게 동요하여, 쇼무 천황은 야마시로 국구니쿄(恭仁京), 셋쓰 국나니와쿄, 오미 국시가라키(紫香楽)를 전전하였다. 잦은 천도로 인한 조영 공사와 잇따른 역병과 천재지변으로 사회 불안은 한층 높아져갔다. 본래 깊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던 쇼무 천황은 진호국가의 사상에 기대어 사회의 동요를 가라앉히고자 741년(덴표 13년)에 고쿠분지(国分寺) 건립 칙명, 743년(덴표 15년)에는 대불 조성 교지를 내려 도다이지 대불이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대불은 752년에 완성되어, 고켄 천황과 쇼무 상황이 임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안공양이 이루어졌다.

[편집] 나카마로 정권 몰락

이러던 사이에 고묘 황후의 신임을 얻은 후지와라 남가(南家)의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 후지와라 무치마로의 아들)이 대두하여, 시비추타이(紫微中台)를 조직하여 755년에는 다치바나 모로에를 실각시키고, 757년에는 모로에의 아들인 다치바나 나라마로(橘奈良麻呂) 역시 정권에서 배제하는데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다치바나 나라마로의 변). 나카마로는 독재적 권력을 손에 넣고 허수아비로 준닌 천황을 옹립하여 에미 오시카쓰라고 개명하고 유교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풍의 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고묘 황후가 사망하고, 고켄 상황의 총애를 얻은 승려 도쿄(道鏡)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오시카쓰는 이를 막고자 794년(덴표호지 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사하였다(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준닌 천황은 폐위되어 아와지로 유배되고, 고켄 상황이 쇼토쿠 천황으로 중조하였다.

[편집] 도쿄 사건과 고닌 천황

도쿄는 765년에는 다이조다이진선사, 이듬해에는 법왕이 되어, 일족과 수족들을 고위관직에 출사시켜 권세를 휘두르고, 사이다이지(西大寺)를 조영하는 등 불교에 기반하여 정권 안정을 꾀하였다. 쇼토쿠 천황과 도쿄는 우사 하치만 궁(宇佐八幡宮)의 신탁을 빙자하여 도쿄를 황위계승자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후지와라 모모카와(藤原百川)와 와케 기요마로(和気清麻呂)에게 저지당하고 770년 쇼토쿠 천황이 사망하자 도쿄는 실각하였다(도쿄 사건).

쇼토쿠 천황의 뒤를 이은 고닌 천황(光仁天皇)은 덴무 천황의 혈통이 아니라 덴무 천황의 형인 덴지 천황의 자손으로 이후 천황위는 덴지 천황의 혈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닌 천황은 관인의 인원을 삭감하는 등 제정 긴축 정책을 펴고 지방관인 고쿠시군지의 감독을 강화하여 지방 정치의 투명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780년(호키 11년)에는 무쓰 국에서 고레하리 아자마로(伊治呰麻呂)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도호쿠 지방에서는 에미시(蝦夷)의 저항이 강화되었다.

[편집] 나가오카쿄, 헤이안쿄 천도

간무 천황은 지나치게 강대해진 사원·신사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784년야마시로 국 나가오카에 새로운 도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공사책임자인 후지와라 다네쓰구(藤原種継)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사주한 혐의를 받은 친동생 사와라 친왕(早良親王)이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794년 새로운 도성을 축조하여 야마시로 국(山背)을 야마시로(山城)로 개칭하고, 새로운 도성은 헤이안쿄라 이름하였다. 이 천도로 나라 시대라 불리는 시대는 완전히 종언을 고하고 헤이안 시대가 시작된다.

[편집] 덴표 문화

율령제에 의해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가 확립되어가자, 국가의 부가 중앙에 집중되어 수도 나라의 황족과 귀족은 이러한 부를 배경으로 호사를 누리며 귀족적. 불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의 귀족은 견당사 등이 가져온 당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덴표 문화는 측천무후당 현종 연간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당나라 문화의 유입에는 다자이후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쿠가(国衙, 구니의 관할 관청)·고쿠분지 등에 임명된 고쿠시(国司), 관인과 긍려 등에 의해서 지방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퍼져나갔다. 이렇게, 중국풍·불교풍 문화의 영향이 일본 사회에 스며들었다. 비단길에 의해 서아시아에서 당나라로 유입된 문화도, 견당사를 통해 일본까지 전해지기도 하였다.

중앙 정부는 학생과 승려를 당나라로 유학시켜 여러가지 문물을 받아 들였으며, 한반도와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러한 교역의 결과물은 정창원 보물로 다수 남아 있다. 대표적인 유학생들로는 716년(레이키 2년)에 당나라로 건너간 아베 나카마로(阿倍仲麻呂, 당나라에서 객사), 기비 마키비, 승려 겐보 등이 있다.

역사서로는 고지키, 니혼쇼키가, 문학 작품으로는 와카집인 만요슈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시집 가이후소(懐風藻)가 편찬되었으며, 각 지방의 지리·전설·유래 등을 기록한 지지(地志)인 풍토기(風土記)도 활발하게 편찬되었다.

불교 역시 진호국가(鎮護国家)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쇼무 천황도다이지(東大寺)를 조영하고, 전국 각지에 고쿠분지를 세워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여 불교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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