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왕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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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八王之亂)은 중국 서진(西晉)의 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황족들의 대결이 내란으로 번진 것을 말한다. 이 내란으로 인해 지방 통치 체제가 와해된 서진은 결국 영가의 난으로 멸망에 이르렀다. 이후 강남에서 동진이 서진의 정통성을 이었지만 결국 화북을 되찾지 못하여 화북은 오호 십육국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는 남북조시대로 이어지면서 중국은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전란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이 내란에 관련된 8명의 왕은 다음과 같다.

  •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선제 사마의의 5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 사마염의 5남.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선제 사마의의 9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 무제 사마염의 16남.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무제 사마염의 6남.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무제 사마염의 6촌.
  •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 사마욱의 손자,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무제 사마염의 6촌.

배경[편집]

서진의 초대 황제였던 무제(武帝)의 사망 후, 그의 아들인 혜제(惠帝)가 즉위했다. 하지만 혜제는 암우한 제왕이었기에 정치는 양준(楊駿)과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이 독식하게 되었다.

혜제의 황후였던 가씨(賈氏)는 양씨를 조정에서 추방하고 자신이 실권을 잡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윽고 가씨는 거대한 무력을 가지고 있던 혜제의 동생 초왕(楚王) 사마위와 협력해 낙양(洛陽)에 있던 양씨를 모두 죽였다.

양씨를 조정에서 추방한 가씨는 정권을 혜제의 대숙부였던 여남왕 사마량에게 맡겼으나, 사마량은 가씨의 의도대로 정권을 운영하지 않았다. 실망한 가씨는 혜제의 밀서를 이용해 사마위가 사마량을 공격하게 만들고, 사마량을 궁지에 몰리게 해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 후 이용가치가 없어진 사마위에게 사마량을 살해한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서 가씨는 자신의 지위를 안정화 시켰다.

혜제는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 사마휼(司馬遹)이 있었다. 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사실 무제는 혜제가 암우한 사실에 실망해서 제위를 양위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손자 사마휼의 재능을 인정해 혜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가씨는 한편 남자로써 만족스럽지 못한 혜제와의 사이를 멀리하고, 낙양의 미소년을 모아 밤마다 자신을 시중들게 하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살해했다.

가씨의 야심을 느낀 사마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 노점을 궁궐에 열 정도로 노력했으나, 가씨에게 모반 의혹을 받고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300년 가씨에 의해 사마휼은 살해당했으며 혜제의 대숙부이자 사마량의 동생이였던 조왕 사마륜은 혜제의 종제(從弟)인 제왕 사마경과 협력하여 혜제의 칙서를 위조해 궐기했다. 황태자를 살해한 죄를 물어 가씨는 일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301년 사마륜은 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그러나 사마륜과 측근 손수(孫秀)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마경은 혜제의 동생인 장사왕 사마애와 성도왕 사마영 그리고 사마의의 조카의 아들이었던 하간왕 사마옹을 낙양에 모이게 해 사마륜을 죽였다.

혜제를 복위시켰던 사마경은 곧 정치실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혜제의 황태자도 독단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사마애, 사마영, 사마옹은 다시 궐기하여 사마경을 살해했으나, 사마경의 후임을 누구로 할것인가를 두고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기어코 사마애가 사마영과 사마옹에게 공격당해 죽고 말았다.

이제 사마영이 황태자이자 승상으로서 정치를 맡게 되었으나, 낙양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마영은 사마옹의 부하 장방(張方)에게 낙양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서히 사마영이 승자로서 정치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이에 대해 이번엔 사마씨 일족인 동해왕 사마월과 혜제의 막내동생 예장왕(預章王) 사마치(司馬熾)가 반기를 들었다. 한때 사마영에게 패했던 그였으나 흉노와 선비등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번엔 사마영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낙양을 수호하던 장방과 사마옹을 공격한 것은 사마월이었고, 사마옹이 강화를 위해 나오자 그를 구속하였다. 기어코 사마영을 살해한 사마월은 306년에 죽은 혜제의 뒤를 이어 사마치를 회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였다. 가씨에 의해 양씨 추방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팔왕의 난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팔왕의 난 이후[편집]

팔왕의 난 때 각 왕들은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들은 강력하다고 생각하던 서진의 내부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손수, 장화, 양제 등 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

이것은 304년 유연에 의해 전조가 건국되면서 중국 전 지역을 포함한 거대한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