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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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구야(狗耶)라고도 하며 외부에서는 임나(任那)라고도 불렸다. 삼국시대 대부분 동안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소국의 연맹체였다. 동쪽으로 신라, 서쪽으로 백제를 접했다.

서기 전후로 김해 등지에 있던 구야한국(狗邪韓國)을 중심으로 변한의 소국들이 결집해 전기 가야 연맹을 성립하였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을 만든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결국 562년 멸망한다. 삼국과 달리 각 소국이 유달리 강력했던 관계로 특별히 중심이 된 강국이 등장하지 못해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국가체제가 완성되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수준에서 머물렀던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된다.

건국 신화[편집]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 하나는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나라가 없던 때에 백성들이 하늘의 명을 받아 구지봉에 올라 “거북아,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하며 제사를 지내자, 하늘에서 붉은 도자기에 쌓인 황금 알 여섯 개가 내려왔다. 12일이 지난 후 가장 먼저 깨어 나온 수로를 백성들은 가락국의 왕으로 모시고, 나머지 다섯 알에서 나온 사내아이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여기서 5가야란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이고, 수로왕이 남은 성이 가락국금관가야이다. 그러나 6가야에 대해서는 다른 전승도 많은데, 《고려사략》(高麗史略)은 금관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의 다섯 가야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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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야연맹[편집]

당초에 경남일대에 있던 지역은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이었다. 변한은 작은 열두 나라로 이루어졌고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이는 인근의 진한도 마찬가지였다.[1] 그러나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여가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기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소 엉성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다.

가야, 즉 전기가야연맹의 맹주인 구야국 또는 가락국(駕洛國)은 지금의 김해평야고 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국가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일본과 경남내륙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야의 무역의 기반은 그 지역 일대에서 산출되는 철이었다. 가야지역에서 산출되는 철은 동아시아의 철의 공급량에서 거의 절대적이다시피해서 요동, 요서의 한군현들도 변진과 가야의 철을 수입하였다. 일본은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가야의 철에 의지했고 가야는 일본의 소국들에게 철과 선진 기술을 공급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한편, 변한의 내륙지역에서는 반파국이 자국의 내륙산간일대의 농업 생산력과 야로[2] 일대에서 산출되는 철광을 기반으로 인근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점진적으로 세력을 넓혔다.

3세기경까지 가야는 순조롭게 발전했지만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의 일방적인 무역 독점으로 구야국과 여타 소국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다.

결국 골포국[3], 고사포국[4],사물국[5] 등의 가야소속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 나라가 가야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가야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일련의 전쟁에서 연패해 쇠퇴하기 시작했고 신라의 원조로 가야가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상팔국 전쟁에서 가야 내부의 분쟁의 신라라는 외세를 끌여들임으써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이로인해 소국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한군현이 차례로 고구려에 정복되고 백제가 요서와 산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야를 중심으로 짜인 해상무역 네트워크가 위협받음으로써 가야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야와 신라는 실직국음즙벌국의 분쟁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도울 때도 있었지만 초기부터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전의 진한과 변한이 여러모로 겹치는 영역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탈해왕대에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을 벌인 것이다.

초기에 구야국의 왕위를 두고 구야국왕인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져 가야군 천 명이 전사하는가 하면 94년에는 가야군이 마두성(馬頭城)[6]을 함락하는데 이어서 96년에도 가야군에 의해 신라장수가 전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가야를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7]에서 대참패를 하고 물러나야 했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는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는 한편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신라와 가야 두 나라는 이렇게 한반도 동남지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영락 9년(399년) 기해(己亥)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平穰)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倭人)이 그 나라 안에 가득 차 성과 못(池)을 부수고 노객(奴客)을 (왜의) 신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에게 귀의(歸依)하여 명을 받고자 하였다.

태왕(太王)은 은혜롭고 자비로워 그 충성심을 칭찬하였다. 신라 사신을 특별히 돌려보내면서 비밀계책을 알려주어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更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도착하자 왜적(倭賊)은 퇴각하였다.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까지 이르니 성이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羅人)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광개토대왕비

드디어 한반도 동남 지방의 패권을 다투던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순간이 다가왔다. 400년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연패하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던 신라에 앙심을 품었고 결국 백제의 부추김을 받은 가야가 일본의 소국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기병이 있긴 했지만 보병이 주력이었던 신라군[8]과는 달리 가야군의 주력은 판갑의 갑옷으로 무장한 중기병이었고 여기에 가야군에 합류한 일본군으로 인해 가야, 왜국 연합군은 질적 양적으로 신라군보다 절대우세하에 있었다.

처음에 가야군과 울산 일대에 상륙해 가야군 휘하에 합류한 일본군의 연합군은 서라벌 남쪽의 남천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함락하는 등 신라를 거의 멸망하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신라의 내물왕은 평양에 내려왔던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원군을 불렀고 결국 고구려는 기병 5만 명을 동원해 신라를 구원했다. 서라벌에서의 전투에서 먼저 노략질로 군기가 해이해진 왜군들이 궤멸당했고 이에 가야군도 남쪽으로 후퇴해 마지막 결전을 치러 결국 고구려, 신라연합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9] 이로 인해 가락국은 패망했고 이로써 전기가야연맹은 와해하여 버렸다. 가락국은 종발성[10]을 신라에 뺏김으로 고 김해만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한편 고 김해만의 지배권을 잃음으로써 경제기반이었던 해상무역도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후 가락국은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반파국안라국에 상실한 채 소국으로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결국 가야 전체가 신라에 합병당하기 전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후기가야연맹[편집]

옛 변한지역은 가야가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한동안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 시기를 전후해 그때까지 변한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내륙의 반파국이 가락국의 망명객을 받아들이고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면서 가야의 주도권을 잡았고 반파국을 중심으로 소위 후기가야연맹- 대가야국을 형성했다. 새로 결집한 대가야가 당면한 문제는 신라에 상실당한 낙동강수로와 고김해만 대신에 새로운 무역항구를 확보하는 문제였고 그 대안으로 당시에 다사강(多沙江),또는 기문하(基汶河)라 불리었던 섬진강유역이 선택되었다.[11] 이를 장악하기 위해 대가야는 호남으로의 진출을 개시했다.

당시에 호남일대는 노령산맥을 경계로 백제의 영역과 백제의 영향권에 속했던 침미다례로 나뉘고 있었는데 백제도 고구려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고 결국 475년 장수왕의 고구려군의 대거남침으로 한성백제가 패망하는 바람에 호남일대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성백제의 패망전까지 가야내부를 결속해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를 성립하기 전까지 이를만큼 국가체제를 정비한 대가야는 한성백제의 패망을 전후해 호남으로의 진출을 개시했고 그 결과 전북에서는 남원, 진안, 임실, 장수 일대에 기문지방을 이루었고 전남에서는 모루(牟婁)[12] , 사타(娑陀)·[13] 상,하다리[14] 일대를 장악해 소위 섭라지방을 형성했다. 이시기에 대가야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새로 장악한 섬진강 유역은 새로운 무역항이자 새로운 무역기반을 가야에게 제공했다. 섭라지방에서 산출되는 옥은 고구려로 수출되었고 고구려는 이 옥을 북위와의 무역에서 중요 결제수단으로 사용했다.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다시금 가야가 주도권을 잡기에 이르렀다. 479년에 가야는 남제에 사신을 보내어 국제사회에 이름을 널리 알렸고 481년에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가야의 전성기는 지극히 짧았다.

쇠퇴[편집]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조를 올렸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任那國)의 (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의 네 현(縣)을 달라하였다.다리의 국수(國守)수적신(穗積臣) 압산(押山)이 주청하길 "이 네 현은 백제와 가까이 이웃해 있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드나들기 쉽고 닭과 개의 주인도 가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지금 백제에 줘서 한나라로 만들면 보전의 대책이 이보다 좋은 게 없을 줄 생각합니다."-중략- 그래서 사신을 새로 임명하고 선물과 칙의 요지를 줘 임나 4현을 주었다.

—일본서기 게이타이천황 6년조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요서, 산동과, 한강 이북의 북방영토를 거의 잃고 475년수도인 한성에서 고구려군의 대거남침으로 패망해 천안 이남까지 밀려나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고 심지어 그 와중에 왕권다툼까지 벌어지는 등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백제는 동성왕 대에 들면서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고구려와 북위와의 항쟁에서 승리하는 등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해 무령왕대에 이르면 다시 강대국이 되었다 할만큼 세력이 확충되어 있었다. 무령왕은 한때 자신들의 세력권이었던 호남일대로 다시금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침미다례를 병합한 무령왕은 512년(백제 무령왕 12년)당시에 대가야가 지배하고 있던 기문지방과 하다리·사타(娑陀)·모루(牟婁) 등의 4현(縣)-섭라지방을 그 지역이 원래 마한의 영역이었고 마한은 곧 백제이므로 해당지역도 원래의 소유권이 백제에 있음을 주장해 대가야와 영토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백제로서는 기문지방이 원산성 일대에서 가까워 백제의 호남지배에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기문과 섭라가 자리잡고 있는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면 일본으로의 소통이 원활해지기 때문에 일본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던 백제로서는 기문과 섭라가 꼭 필요했다. 더 나아가 백제는 이를 발판으로 변한으로의 진출도 동시에 꾀하고 있었다.

3월 반파는 자탄(子呑).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까지 연결하고 봉화대와 군량고를 만들어 일본[15]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爾列比),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연결했다.

군대와 무기를 모아 신라와 친했다. 자녀를 약취하고 마을을 약탈했다. 흉적(凶賊)이 가는 곳마다 남는 것이 드물었다. 포학하고 사치하고 침략하고 살상하는 일이 많았다.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서기 게이타이천황 8년조

대가야는 이에 격렬히 저항해 군사력을 두 지역으로 대거 확충하는 한편 오랜 무역파트너였던 일본의 야마토 조정에 조정을 요청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미 백제에 매수되어 버린 야마토 조정은 기왕에 대륙의 선진문물을 한결 손쉽게 수입할 수 있는 백제와의 교류를 원했고 결국 야마토조정은 대가야를 배신하고 백제의 편을 들고 말았다. 외교전에서 백제에 패배한 대가야는 군사력에서도 백제에 밀려서 호남일대의 영토를 백제에 모두 잃고 말았고 이는 대가야의 쇠퇴의 서막이 되고 말았다. 백제와의 항쟁에서 패배해 세력이 약화된 대가야는 자구책으로 522년신라와 결혼동맹을 맻었지만 애초에 가야에 흑심을 품고 있던 신라는 오히려 결혼동맹 과정에서 신라의 신부쪽 사람들에게 일부러 신라 옷을 입혀 보내는 등 가야와의 외교분쟁을 야기한 뒤 529년 탁기탄(啄己呑)[16]을 점령했고 이는 대가야 조정에 대한 가야제국 전체의 불신을 초래해 한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성립직전까지 발전했던 대가야는 이를 기화로 공중분해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멸망[편집]

남방의 안라국은 반파국이 상가라도(上加羅都)라 불리는 것에 대해 하가라도(下加羅都)라고 불릴만큼 대가야의 제2의 중핵을 담당했지만 대가야가 백제에 패배해 세력이 약화되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맻으면서 굴욕적인 추태를 보이고 백제가 안라국의 옆의 대사(帶沙)[17]까지 진출해 안라국까지 위협하자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대가야와 결별하다시피하면서 남부가야의 소국들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가야는 남북으로 2분되었고 이는 백제, 신라등의 외세의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백제는 530년 경에 구례모라(久禮牟羅)[18]까지 군대를 진주시켜 가야 전역을 자신의 세력권하에 넣으려 했고 이에 신라군이 백제군을 패퇴시키면서 532년 소국상태로 명맥을 유지하던 금관국과 안라국 바로 옆의 탁순국을 합병하자 540년 안라국은 백제·신라·의 사신을 초청하여 회의를 열었고 그 결과 생겨난 것 중에 하나가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 즉 소위 말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이지만 별 소득은 없었고 오히려 백제등의 외세에 대한 부용화(附庸化)만 자초했다. 이를 타개하고자 548년에 안라국은 고구려를 부추겨 백제를 공격케 하는 독산성 전투를 유발하지만 고구려의 패퇴로 오히려 가야 전체가 백제의 영향권에 놓이고 말았다. 한편 이무렵에는 가야에서 일단 한발 뺐던 신라는 가야를 존치하면서 부용화를 추구했던 백제와는 달리 애초에 가야 전역의 병합을 추구해 백제의 중핵이었던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해 백제 세력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6세기 중반부터 백제를 배제시킨채 본격적인 가야 병합에 착수했다. 결국 안라국 중심의 남가야는 559년신라에 완전히 투항했고 신라는 안라국이 있던 함안에 아시촌 소경을 설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9]

한편 대가야 세력에 잔존했던 북가야는 백제와 제휴해 신라에 항쟁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554년 가야군은 일본군과 함께 관산성 전투에 백제편으로 참전했다. 이 전투는 그러나 백제의 대 참패로 끝났고 그 결과 보복전까지 불러들인 것이다. 관산성 전투로 가야에서 백제세력을 물리치고 남가야를 병합한 신라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562년이사부를 주장으로 대대적으로 가야를 침공했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전쟁에서 가야는 완전히 패배해 결국 신라에 군사적으로 병합되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라는 남부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백제와 직접 국경 충돌을 자주 일으켰다.

가야 사람들[편집]

가야의 패망후 가야인들은 신라사회에 편입하면서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며 정치와 군사, 문화에서 활약을 하였다.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씨일족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지만 경원시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구해(金仇亥)의 손자 김무력(金武力)은 관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신라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그 아들 김서현을 거쳐 김유신김흠순대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하면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맻는 등 두각을 나타내었다.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증되어 신라왕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이후 그 후손이 천문관을 하는 것과 같이 토착 진골로부터의 차별을 받고 6두품으로까지 떨어졌다. 가야의 김씨일족은 김해 김씨를 중심으로 한국의 주요성씨의 뿌리가 되었다. 대가야는 그 외손인 문노가 화랑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4두품으로까지 전락해 그 후손이 분명치 않다. 단재 신채호선생의 본관인 고령신씨가 그 후손이다는 설이 있다. 고성 김씨의 선조는 고사포국 왕실의 후예라고 한다.

문화에서는 음악부분에서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 가야금을 전수시켜 그의 음악이 신라의 중요 궁중음악이 되었다.

6가야[편집]

가야를 완전히 병탄한 뒤 신라는 창녕일대의 하주정(下州停:比子伐停)을 다라국이 있던 합천으로 옮겨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했고 통일후에는 강주삽량주를 설치했다.

신라말기에 전국에 군웅이 할거하자 옛 가야땅에도 토호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옛 가야의 소국들의 후예임을 자처했는데 뜻밖에도 이전 가야와 무관했거나 이전에 가야에는 속하지 않았던 고령군[20]벽진군의 가야인 공동체까지 거주지역에서 새로운 가야 소국을 세워 일어섰다. 이 "후가야"는 이총언이나 왕봉규등의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도 있었음에도 중심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 후백제와 고려에 흡수되어 고려 전기까지 자치세력으로 해당지역을 지배해 나갔다.

후삼국 통일 후인 940년 고려 태조는 통일한 영토의 행정체제를 제편하는 과정에 이 "후가야"세력을 위해 가야연맹의 금관가야를 제외하고 5가야의 명칭을 개정했는데 옛 안라국인 아라가야, 함창일대의 고령가야, 반파국이었던 대가야, 벽진군의 성산가야또는 벽진가야, 옛 고사포국이었던 소가야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중에 고령가야와 성산가야는 지역상 원래의 가야소국들과는 무관하지만 가야유민세력을 중심으로 가야의 후예임을 자처했고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더해 금관가야까지 가야연맹은 삼국유사등을 통해 6가야로 와전(訛傳)되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가야라 하면 엉뚱하게도 이 6가야가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가야 소국의 변천[편집]

가야소국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6가야가 아닌 최소 10개 이상의 소국들의 집합체였다. 위지 동이전에 수록된 변한 소국의 수는 12국이다. 하지만 3세기에 금관가야에 반기를 들었던 포상팔국이 문자그대로 8개국이었고 그중에 소위 6가야는 1개였음을 생각하면 훨씬 많은 나라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남은 최후의 가야소국은 대략 10국이다. 한편 우륵의 12곡의 10개 지명등의 일부지명은 일본서기의 임나 4현(縣)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소국이었다기보다는 대가야의 직할영지든가 단순한 지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경북지역-
지역 변한 변진. 진한 가야(1~5세기) 대가야,우륵의 12곡(5~6,5세기) 신라군현 6가야(고려시대)
고령군 반로국(半路國) 반파국(伴跛國) 상가라도(上加羅都) 고령군(高靈郡) 대가야(大伽倻)
김천시 감로국(甘路國) 감문국(甘文國):진한 신라영토
성주군 - 원래 신라영토 - 본피현(本彼縣)/벽진군(碧珍郡) 성산가야(星山伽倻)
청도군 우유국(優由國):진한 이서국(伊西國) -신라영토-
상주시 함창읍 진한 사벌국 -원래 신라영토 - 고령군(古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
-경남지역-
지역 변한 변진 가야/포상팔국(1~5세기) 대가야,우륵의 12곡(5~6,5세기) 신라군현 6가야(고려시대)
밀양시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탁기탄(啄己呑), 추봉(推封) 밀성군(密城郡)
밀양시 삼랑진읍 마차해(麻且奚) 밀진현(密鎭縣)
창녕군 영산면 마수비(麻須比) 상약현(尙藥縣)
고성군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사포국(古史浦國) 고자국(古自國)/ 고(구)차국(古(久)嵯國) 고성군(固城郡) 소가야(小伽倻)
산청군 단성면 고순시국(古淳是國) 걸손(乞飡) 궐성군(闕城郡)
진주시 자타(子他),자탄(子呑) 거타주(居陀州),강주(康州)
의령군 임례국(稔禮國) 의령현(宜寧縣)
의령군 부림면 사이기(斯二岐),이열비(爾列比)/이사(爾赦) 의상현(宜桑縣)
거창군 거열(居列) 거창군(居昌郡)
하동군 대사(帶沙) 하동군(河東郡)
하동군 악양면 악노국(樂奴國) 악양현(岳陽縣)
합천군 다라(多羅) 대야성(大耶城),강양군(江陽郡)
합천군 초계면 초팔국(草八國):진한 사팔혜(沙八兮) 팔계현(八谿縣)
합천군 삼가면 산반해/하(散半奚/下) 가수현(嘉壽縣)
사천시 사물국(史勿國) 사물(思勿) 사수현(泗水縣)
사천시 곤양 군미국(軍彌國) 곤미(昆彌) 하읍현,성량현
창원시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골포국(骨浦國) 탁순국(卓淳國) 의안군,합포현
함안군 안야국(安邪國)/안라국(安羅國) 하가라도(下加羅都) 함안군(咸安郡)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군 칠원면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칠포국(漆浦國) 구례모라(久禮牟羅) 칠제현(漆堤縣)
부산광역시 동래 독로국(瀆盧國) 종발성(從拔城) 신라영토
김해시 구야국(狗邪國) 가락국(駕洛國) 금관국(金冠國) 김해경 금관가야
-호남지역-
지역 마한 ,침미다례 대가야,우륵의 12곡(5~6,5세기) 신라군현
남원시 고랍국 하기물(下奇勿) 남원경
장수군, 임실군 상기물(上奇勿) 청웅현(靑雄縣)
순천시 사타(娑陀) 승평군(昇平郡)
광양시 물혜(勿慧)/모루(牟婁) 희양현(晞陽縣)
여수시 상다리(上哆唎), 달이(達已) 해읍현(海邑縣)
여수시 돌산읍 하다리(下哆唎) 돌산현(突山縣)

가야의 문화[편집]

낙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가야 문화가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한(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고, 또한 인접 지방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의 문헌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구야한국(狗耶韓國)도 이곳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고유의 문물(文物)로 가야금도 이 나라에서 비롯되었으며 작곡가 우륵(于勒)도 가락국의 유민이다.

일본과의 관계[편집]

가야는 형성기에 일본 기타큐슈 지방와 관계가 가까웠다. 가야와 의 관계에 대해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일본어로 미마나[21])가 속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록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고고학적으로도 당시 가야는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다양한 마구와 판갑을 이용·활용한 조직적인 군대를 운용한 선진 군사문화를 이룬 반면 는 6세기 초까지 제련로를 만들지 못하였으며 무기도 단도와 얇은 양날창 등 초보적인 무기가 활용되어 조직적인 군대 운용의 흔적이 없는 시기였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는 이런 설을 부정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야와 는 가까운 관계이나 지배관계는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4세기 가야는 왜와 연합하여 함께 신라을 공격하는데 광개토대왕이 신라을 구원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왜는 가야 연맹에 한부분이었거나 4세기 이전 가야에서 분리된 세력이라는 추정되기도 한다. 고대 일본의 건국 신화의 구조는 가야 신화와 동일하며 왜계 유물이 가야지방에서 많이 출토되었고 고대 일본 왕조의 배경인 구지후루봉이라는 지명이 김해의 구지봉과 흡사하여 가야와 왜는 매우 밀접한 세력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가야와 왜는 한반도 고대 종족 예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예족은 고대 고구려 시대에는 한반도 중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고구려의 팽창과 함께 한반도 남부와 일본으로 건너가 가야와 왜가 되었다고 한다. 예족의 예의 발음이 왜라는 발음의 단초였다는 견해도 있다.

임나[편집]

임나는 미마나(彌摩那), 밈나로도 불린다. 임나가야(任那伽倻)의 줄임말로 창원,또는 고령에 있었다는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의 이름에서 어원을 찾기도 한다. 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가야가 임나일 경우 이는 외국에서 지칭한 이름일 뿐 그 자신은 어디까지나 가야(伽倻)나 가라(加羅)라고 불렀다. 가야 외의 지역을 이르는 이름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설이 부분한데 한국쪽에서는 심지어 일본열도 어딘가로 비정하기까지하고 일본에서는 어떻게든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단을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인양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바, 가야지역에서 이를 입증할 유적이 없는 참에 최근에 옛 침미다례지역에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한 장구형무덤듬의 유적이 나오자, 전남지역을 임나로 비정하며 일각에서 임나일본부가 사실인양 이야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당대에 침미다례지역에서 나온 인골의 유전자 조사결과 그 구조가 현대 일본인과 같다는 뜻밖의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했지만 고대 일본인과는 또 전혀 달랐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한반도지역이 고대에 문화, 인종적인 면에서 고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결과는 될 수 있어도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임을 증명할 증거는 될 수 없다.[22]

임나가야 국왕[편집]

  • 이리구모왕(爾利久牟왕)
  • 용주왕(龍主王)
  • 좌리왕(佐利王)
  • 풍귀왕(豊貴王)
  • 모유지왕(牟留知王)

대표적인 유물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 조희승 (1990년 5월 15일).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평양: 백과사전출판사 (대한민국 출판본은 한국문화사에서 펴냄)
  • 김태식(1993)가야연맹사-일조각
  • 김태식(2002)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1~3권
  • 가야제국의 왕권(국제학술회의 논문집)-신서원
  • 국사편찬위원회 편집부(1970)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3 신라.가야)
  • 박영규(2000)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웅진닷컴

주석[편집]

  1. 애초에 삼한의 소국이라는 게 당시에는 실제로 국가라기보다는 마한의 행정 단위라는 견해도 있다. 헤이안 시대에 일본에서는 구니(國)가 행정단위였다.
  2. 합천군 야로면
  3. 마산
  4. 고성
  5. 사천
  6. 양산시 물금 금정산
  7. 낙동강
  8. 실제로 신라군 보병은 장창(長槍)과 방진(方陣)을 무기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나중에 나당 전쟁때에 신라의 장창 보병은 불과 3만으로 당나라의 20만 기병을 격파하기도 했다.
  9. 김성남(2005년)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수막새
  10. 부산 동래
  11.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섬진강도 웬만한 큰 배가 다닐만큼 수량이 풍부했다.
  12. 광양
  13. 여수
  14. 순천
  15. 실은 백제. 일본서기에서 일본이 삼한에서 했다는 군사행동은 대개 백제의 군사행동이다. 그것을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일본의 것으로 변조해 일본이 마치 한반도를 지배했던 것인 양 왜곡시켰던 것으로 이로 인해 고대한국사를 이해하는 주요 사료인 일본서기의 신빈성을 크게 저하시키고 말았다.
  16. 경남 밀양
  17. 하동
  18. 함안 칠원
  19. 아시촌 소경은 안라국이 있던 안라국으로 추정되지만 설치년도가 514년으로 되어 있어 경북의 경주 안강읍이나 상주시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 기사와 기타 여러 근거로 함안의 안라국과 후가야시대의 안라국을 다른나라로 해석해 후자및 일본서기상의 임나가라 소국들을 일본 큐슈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
  20. 반파국이 있던 고령군이 아니다
  21. 일본서기 권6 垂仁王 2년 기사의 注에 “국호를 ‘미마나노구니(彌摩那國)’라고 한다” 하였다.
  22. KBS 역사추적 제023회 HD 영산강 아파트형 고분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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