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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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야국(仇耶國)(전기 가야연맹)
伽倻聯盟
국가 금관국(金官國) 고동람국(古冬攬國) 아라국(阿羅國) 고자국(古自國) 성산국(星山國) 비화국(非火國)
수도 경상남도 김해시 경상북도 고령군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 성주군 경상남도 창녕군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10 왕
수로왕
구형왕
16 왕
이진아시왕
도설지왕
 ?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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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42년 42년 ? ? ? ?
멸망 532년 562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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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의 위치(※ 각 점은 6 가야의 중심지)
한국의 역사
韓國史
Geunjeongjeon.jpg
선사 시대
고조선 시대
  • 단군조선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94년)
  • 위만조선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08년)
  • 진국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2세기)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 고구려 (기원전 37년 ~ 668년)
  • 백제 (기원전 18년 ~ 660년)
  • 신라 (기원전 57년 ~ 935년)
  • 가야 (42년 ~ 562년)
남북국 시대
  • 신라 (기원전 57년 ~ 935년)
  • 발해 (698년 ~ 926년)
후삼국 시대
통일 왕조기
식민지 시대
분단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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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伽耶)는 서기 전후로 김해 등지에 있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변한의 소국들이 결집해 전기 가야 연맹을 성립하였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국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지고 562년 멸망했다.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되고있다. 당초에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의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인근의 진한도 마찬가지였었다.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여가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기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소 엉성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었다. 구야국의 왕위를 두고 구야국왕인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1] 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었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2] 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었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었다. 전기 가야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이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구야국은 지금의 김해평야고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국가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일본과 변한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요동, 요서의 한사군들도 변진과 전기 가야연맹의 철을 수입하였었다. 일본은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철에 의지했었다.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구야국과 여타 소국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었다. 골포국[3], 고사포국[4],사물국[5]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연맹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일련의 전쟁에서 연패해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의 원조로 전기 가야연맹이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를 끌여들이고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구야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소국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한사군이 고구려에 정복되고 백제가 요서와 산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구야국을 중심으로 짜인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고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했었다. 영락 9년(399년) 기해(己亥)년에 백잔이 태왕의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고 10년(400년) 경자(更子)년에 태왕이 보병과 기병을 보내 신라를 구원해주었었다. 관군(官軍)이 도착하자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의 왜국 병들은 퇴각하였었다. 400년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연패하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던 신라에 앙심을 품었고 결국 백제의 부추김을 받은 전기 가야동맹이 일본의 소국까지 끌어들이고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었다. 전기 가야동맹의 중기병들과 신라에 상륙한 왜국 군들은 신라 보병들의 장창(長槍)과 방진(方陣)보다 강력하여 서라벌 남쪽의 남천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신라의 서라벌을 함락하나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원군(援軍)이 동원되고 신라가 구원되었었다. 서라벌의 왜국 군들이 궤멸당하고 가야 군들도 남쪽으로 후퇴해 결국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구야국을 패망시키고 전기 가야연맹은 와해되었다. 신라는 구야국의 종발성을 빼앗고 고김해만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고김해만의 지배권을 잃고 경제 기반이었던 해상 무역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주도권이 상실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신라에 합병되고 멸망했다.

역사[편집]

구야국(仇耶國)(전기 가야연맹)[편집]

본래 이름 중심 지역
금관국(金官國) 가락국(駕洛國)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고동람국(古冬攬國) 반파국(伴跛國)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아라국(阿羅國) 안라국(安羅國)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고자국(古自國) 고사포국(古史浦國)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성산국(星山國) 벽진국(碧珍國)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비화국(非火國) 불사국(不斯國)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가야연맹의 소국들[편집]

가야 토기의 출토 범위를 통해서 보면 가야연맹체를 이루는 소국의 수는 6개가 아니라 10개가 이상이었었다. 위지 동이전에 수록된 변한 소국의 수는 12국이다. 3세기에 구야국에 반기를 들었던 포상팔국이 8개국이었고 소위 6가야는 1개였다.

후기 가야연맹[편집]

옛 변한지역은 가야가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한동안 혼란을 겪었었다. 그 시기를 전후해 그때까지 변한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내륙의 반파국이 가락국의 망명객을 받아들이고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면서 가야의 주도권을 잡고 반파국을 중심으로 소위 후기 가야연맹대가야를 형성했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군들이 한성백제를 침범하고 패망시키고 백제침미다례를 압박했었다. 중앙집권적국가체제를 정비한 대가야는 신라의 낙동강수로와 고김해만 대신으로 호남의 패망한 한성백제의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고 섬진강 유역은 새로운 무역항이자 새로운 무역기반이 되고 전북에서 남원, 진안, 임실, 장수 일대에 기문지방이 이루어지고 전남에서는 모루(牟婁)[6] , 사타(娑陀)·[7] 상,하다리[8] 등의 지역을 장악해 소위 섭라지방이 형성되고 대가야는 전성기를 이루었었다. 섭라지방에서 산출된 옥은 고구려로 수출되고 고구려는 옥을 북위와의 무역에서 중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고 일본의 무역 주도권을 잡았었다. 479년에 가야는 남제에 사신을 보내고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리고 481년에 백제와 연합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에 대가야 군이 동원되고 신라가 구원되었었다.

쇠퇴[편집]

475년백제의 동성왕은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고구려와 북위와의 항쟁에서 승리하고 무령왕은 다시 세력을 확충했었다. 무령왕은 침미다례를 병합하고 512년(백제 무령왕 12년)에 대가야가 지배하고 있던 기문지방과 하다리·사타(娑陀)·모루(牟婁) 등의 4현(縣)을 돌려받고 3월 반파는 자탄(子呑),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까지 연결하고 봉화대와 군량고를 만들고 이열비(爾列比),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연결하고 군과 무기를 모으고 신라와 친하고 흉적(兇賊)들은 포학하고 사치하고 침략하고 살상하고 자녀를 약취하고 마을을 약탈했었다. |일본서기 게이타이천황 8년조}} 대가야는 격렬히 저항해 군사력을 확충했었다. 야마토 조정은 대륙과 백제의 선진문물을 원하고 백제의 편이었다. 백제는 호남의 영토를 빼앗고 대가야는 쇠퇴했다. 대가야는 522년신라와 결혼동맹을 맻었지만 가야에 흑심을 품고있던 신라는 가야와의 외교분쟁을 야기하고 529년 탁기탄(啄己呑)은[9] 을 점령하고 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대가야 조정을 불신하게 되고 대가야는 무산되었다.

멸망[편집]

백제가 안라국의 옆의 대사(帶沙)[10] 까지 진출해 안라국까지 위협했었다. 안라국은 대가야와 결별하고 남부가야의 소국들을 결집하고 대가야는 2분되었었다. 백제는 530년 경에 구례모라(久禮牟羅)[11] 까지 군대를 진주시켰다. 신라 군이 백제 군을 패퇴시키고 532년 소국상태로 명맥을 유지하던 금관국와 안라국 옆의 탁순국을 합병하고 540년 안라국은 백제·신라·의 사신을 초청하여 회의를 열고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만들었다. 548년에 안라국은 고구려와 백제의 독산성 전투를 유발했었다. 고구려가 독산성 전투에서 패퇴하고 백제는 후기 가야연맹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라는 가야연맹을 존치하고 백제의 중핵이었던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6세기 중반부터 가야 병합에 착수하고 남가야를 559년 완전히 투항시키고 아시촌 소경을 설치했었다. 554년 북가야 군, 일본 군은 백제와 제휴하고 관산성 전투에 참전했었다. 신라는 백제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562년에 대대적으로 북가야를 침공했었다. 북가야는 패배하고 신라와 병합되고 멸망했다.

6가야[편집]

고려 말에 가야의 이름을 개정하고 삼국유사 5가야 조에 6가야의 이름이 실렸다.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가야가 후고구려나 후백제와 같이 생겨났고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의 일곱 가야의 이름이 나온다.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의 6가야는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이다. 6가야는 신라와 가야가 완전히 병탄되고 신라 말기에 전국에 군웅이 할거하자 옛 가야땅의 토호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옛 가야의 소국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 후백제와 고려에 흡수되어 고려 전기까지 자치세력이 되었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삼국유사에서 6가야로 와전(訛傳)되고있다.

6란(六卵) 설화[편집]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지고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하고 그 하나는 수로왕이 되고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나라가 없던 때에 백성들이 하늘의 명을 받아 구지봉에 올라 “거북아,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하며 제사를 지내자, 하늘에서 붉은 도자기에 쌓인 황금 알 여섯 개가 내려왔다. 12일이 지난 후 가장 먼저 깨어 나온 수로를 백성들은 가락국의 왕으로 모시고, 나머지 다섯 알에서 나온 사내아이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가야의 문화[편집]

가야인들은 신라사회에 편입하면서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고 정치와 군사, 문화에서 활약을 하였었다. 금관국의 왕족인 김씨 일족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지만 경원시되고 있었다. 금관국의 김구해(金仇亥)의 손자 김무력(金武力)은 관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신라 장군으로 활약하고 김무력의 손자인 김유신김흠순 형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하면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맻었었다. 금관국의 김씨 일족은 김해 김씨는 한국의 주요성이다.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 가야금을 전수하고 우륵의 음악이 신라의 주요 궁중 음악이 되었다.

일본과의 관계[편집]

전기 가야연맹은 와 가까웠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일본어로 미마나[12])가 속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기 가야연맹은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다양한 마구와 판갑을 이용·활용한 조직적인 군대를 운용한 선진 군사문화를 이루고 는 6세기 초까지 제련로를 만들지 못하고 조직적인 군대 운용의 흔적이 없었다.

대표적인 유물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경북-
지역 변한 변진. 진한 가야(1~5세기) 대가야,우륵의 12곡(5~6,5세기) 신라군현 6가야(고려시대)
고령군 반로국(半路國) 반파국(伴跛國) 상가라도(上加羅都) 고령군(高靈郡) 대가야(大伽倻)
김천시 감로국(甘路國) 감문국(甘文國):진한 신라영토
성주군 - 원래 신라영토 - 본피현(本彼縣)/벽진군(碧珍郡) 성산가야(星山伽倻)
청도군 우유국(優由國):진한 이서국(伊西國) -신라영토-
상주시 함창읍 진한 사벌국 -원래 신라영토 - 고령군(古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
-경남-
지역 변한 변진 가야/포상팔국(1~5세기) 대가야,우륵의 12곡(5~6,5세기) 신라군현 6가야(고려시대)
밀양시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탁기탄(啄己呑), 추봉(推封) 밀성군(密城郡)
밀양시 삼랑진읍 마차해(麻且奚) 밀진현(密鎭縣)
창녕군 영산면 마수비(麻須比) 상약현(尙藥縣)
고성군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사포국(古史浦國) 고자국(古自國)/ 고(구)차국(古(久)嵯國) 고성군(固城郡) 소가야(小伽倻)
산청군 단성면 고순시국(古淳是國) 걸손(乞飡) 궐성군(闕城郡)
진주시 자타(子他),자탄(子呑) 거타주(居陀州),강주(康州)
의령군 임례국(稔禮國) 의령현(宜寧縣)
의령군 부림면 사이기(斯二岐),이열비(爾列比)/이사(爾赦) 의상현(宜桑縣)
거창군 거열(居列) 거창군(居昌郡)
하동군 대사(帶沙) 하동군(河東郡)
하동군 악양면 악노국(樂奴國) 악양현(岳陽縣)
합천군 다라(多羅) 대야성(大耶城),강양군(江陽郡)
합천군 초계면 초팔국(草八國):진한 사팔혜(沙八兮) 팔계현(八谿縣)
합천군 삼가면 산반해/하(散半奚/下) 가수현(嘉壽縣)
사천시 사물국(史勿國) 사물(思勿) 사수현(泗水縣)
사천시 곤양 군미국(軍彌國) 곤미(昆彌) 하읍현,성량현
창원시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골포국(骨浦國) 탁순국(卓淳國) 의안군,합포현
함안군 안야국(安邪國)/안라국(安羅國) 하가라도(下加羅都) 함안군(咸安郡)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군 칠원면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칠포국(漆浦國) 구례모라(久禮牟羅) 칠제현(漆堤縣)
부산광역시 동래 독로국(瀆盧國) 종발성(從拔城) 신라영토
김해시 구야국(狗邪國) 가락국(駕洛國) 금관국(金冠國) 김해경 금관가야
-호남-
지역 마한 ,침미다례 대가야,우륵의 12곡(5~6,5세기) 신라군현
남원시 고랍국 하기물(下奇勿) 남원경
장수군, 임실군 상기물(上奇勿) 청웅현(靑雄縣)
순천시 사타(娑陀) 승평군(昇平郡)
광양시 물혜(勿慧)/모루(牟婁) 희양현(晞陽縣)
여수시 상다리(上哆唎), 달이(達已) 해읍현(海邑縣)
여수시 돌산읍 하다리(下哆唎) 돌산현(突山縣)

참고 자료[편집]

  • 조희승 (1990년 5월 15일).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평양: 백과사전출판사 (대한민국 출판본은 한국문화사에서 펴냄). 

각주[편집]

  1. 양산시 물금 금정산
  2. 낙동강
  3. 마산
  4. 고성
  5. 사천
  6. 광양
  7. 여수
  8. 순천
  9. 경남 밀양
  10. 하동
  11. 함안 칠원
  12. 일본서기 권6 垂仁王 2년 기사의 注에 “국호를 ‘미마나노구니(彌摩那國)’라고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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