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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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朝鮮
불명 ~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위치
수도 아사달, 왕검성
공용어 고대 한국어
정부 형태
국왕

? ~ 기원전 194년
기원전 194년 ~ ?
? ~ 기원전 108년
군주제

부왕
준왕
위만왕
우거왕
국교 무교
약사
 •

고조선(古朝鮮, ?년 ~ 기원전 108년)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고대 국가이다. 성벽, 궁전, 도시 등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고조선 고유의 유물로 볼 수 있는 것도 발견되지 않아 연대와 강역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정선, 춘천 등에서 청동기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되고 있어 한국중국 등의 사료들을 토대로 실존했던 국가로 보고 있다.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으나 신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요녕(랴오닝), 러시아아무르 강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데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신석기 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하여 만주한반도에 실제 있었던 고대 국가라고 파악하고 있다.

역사[편집]

건국[편집]

고조선의 건국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무진년)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서 단군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이때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한 단군조선과 이후의 위만조선을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다. 그러나 현재 일반적으로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단군조선위만조선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며, 앞의 古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조선은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1]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사회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2]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일대의 청동기는 기원전 15세기 정도가 상한으로, 이에 따라 고조선의 실질적인 성립 연대를 기원전 12 ~ 10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기[편집]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v  d  e  h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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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단군조선
위만조선
진국









 
고구려
 
신 라
 
발 해



고 려
고려의 역대 국왕
고려-거란 전쟁
무신정권, 최씨정권
고려-몽골 전쟁
조 선
조선의 역대 국왕
세종대왕한글 창제
임진왜란
병자호란·정묘호란
갑신정변·동학운동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정기
미군정 소련군정

대한민국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고조선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이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특정한 국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요동지방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을 통칭한 것으로 본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적어도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戰國時代)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 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한다.

기원전 4 ~3세기경에 한족흉노족의 활발한 움직임에 따라서 고조선에는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 문화와 중국 전국 시대 계통의 철기문화가 전해졌다. 발전된 금속문화의 전래는 고조선 사회의 생활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새로운 난방 장치나 목조 가옥이 등장하였고, 분묘 형식에서는 널무덤독무덤의 양식이 생겨났다. 견고한 중국식 토기인 회도(灰陶)가 나타났다. 철기문화가 전해지면서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었고 농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그밖에 철제 무기와 장신구가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철기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물과 각지에서 발견되는 용범(鎔范)이 뒷받침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새로운 금속문화는 고조선인에게 수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변형·발전, 토착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출처 필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조선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연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고 장성도 쌓았다. 이때 고조선이 상실한 지역은 랴오닝 성 일대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패배로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기원전 221년(秦)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4년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 그러나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한 것으로 보아 표면적인 복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의 뒤를 이은 준왕(準王) 시기 진나라에 내란이 발생하고 뒤이어 유방항우가 전쟁을 벌이는 등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 유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은 연·진 시기의 장성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을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위만조선[편집]

기원전 195년에 한나라가 임명한 제후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나라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위만(衛滿)은 이들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위만은 중국에서 철을 가져와 고조선에 널리 전파했다) 중국 문물(대표적인 문물 '철')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나라는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 등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각각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다시 외교적 절충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는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위만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갔다. 또한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 삼(尼谿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4군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고조선 지역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국호[편집]

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며, 《삼국유사》에서는 위만이 찬탈한 조선(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지칭하며,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 합쳐 고조선으로 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군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런 시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전조선과 후조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존재하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된 설로는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張晏)의 견해로 그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그 원래 명칭이 주신(珠申)이라 주장하였으며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을 한역한 것이 조선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의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치[편집]

위만조선의 관명(官名)으로는 박사(博士)·대부(大夫)·상(相)·대신(大臣)·장군(將軍)·비왕(裨王) 등이 보인다. 이들 관직 모두의 구체적인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관직을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한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에서 왕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천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탈해 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 같은 이가 그런 예이다. 한나라와 전쟁 중 전선을 이탈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계상(尼谿相) 삼(參) 등 세 명의 ‘상(相)’도 그러한 이들로 추측되는데, 상은 일정한 세력 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지닌 관직의 이름으로 여겨진다. 당시 위만조선에는 여러 명의 상이 있었는데, 이름으로 보아 다수가 고조선 인이었다. 상의 휘하에 있던 집단에 대해선 왕실의 통제력이 어느 정도 미쳤겠지만, 적어도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다는 점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

왕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고, 위만조선 왕실의 경우 중국계 유이민 집단이 그 직할 집단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주요 결정은 이들 상들이 참가한 회의체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 왕권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중국식 제도에서 비롯된 관직명이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관료 조직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정치 조직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집단들의 연맹체와 같은 것이었다.

유력한 수장 휘하에서는 촌락이 여러 개 귀속되어 있었다. 단 수장이 사적으로 지닌 우월한 경제적·군사적 힘이 이들 촌락을 규합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에서, 수장은 이미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력한 수장들을 통합하여 성립한 것이 위만조선이며, 위만조선의 왕권하에서 수장들은 ‘상’으로 상당한 자치권을 지닌 세력 집단을 대표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을 이룬 이들 집단의 외곽에는 피복속 촌락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삼국 초기의 정치 구조와 연관성을 지닌다.

단군왕검[편집]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3]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4]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5]

단군 신화[편집]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오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단군고기》가 인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설명은 《고기(古記)》에 기록된 단군의 건국과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고기》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단군신화의 내용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거하였으며, 그 아들인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 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출처 필요]

참성단[편집]

참성단(塹星壇)은 오늘날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니산 꼭대기에 있으며,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알려진 제단이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예로부터 마이(摩利)·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 또 개국신화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의 권속이므로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짐작케 한다.

사회 및 문화[편집]

사마천사기반고한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다.

  • '8조법'이라는 법률이 정해져 있었다. 이 법은 권력층의 사회질서 유지 수단이었다. 그와 함께 가부장(家父長) 중심의 계급 사회로서, 사유 재산을 중히 여겼으며, 응보주의(應報主義)에 따른 형법을 지녔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는 그 중에서 3개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그 죄를 갚는다.
    •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다.
  • 모두들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서 음란하고 편벽된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노비의 존재와 사유 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가지면서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 경제의 발달, 도시의 번창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당시 농업이 지닌 낮은 생산력과,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의 불안정성 및 철제 농기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小農) 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역사서의 내용[편집]

한편 고조선의 역사는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기록 내용은 사서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래의 사서들 중 일부는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기도 하며, 설령 진서라도 신화적 요소가 많은 경우도 있다.

삼국유사[편집]

삼국 시대의 역사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따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인간 세상을 다스리길 원해, 천부인 세 개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신시라 했다. 태백산에 주를 달아 묘향산이라고 했다.

이후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한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평양에 도읍하여 단군조선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1500년을 다스렸다.

단군왕검이 도읍한 지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은나라에서 기자(箕子)가 동래하여 임금이 되고, 단군은 신(神)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기자조선의 시작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유무와 기자조선의 성격 그리고 기자의 혈통에 관하여 논란이 많다.

사기[편집]

사기》(史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위만조선의 역사를 고조선의 역사에 편입하는 학자들도 있고,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고조선의 봉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6] 또한 한사군에 대해서도 기록하였으나, 한사군의 구성 조차 밝히지 않고 있어, 후대의 논란을 야기하였다.

기타 자료[편집]

'태원 선우씨'의 족보인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와 허목(許穆)의 《동사(東史)》에 따르면 선우씨는 기자조선의 48세의 왕과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마한에 간 뒤의 일인) 마한의 9세의 왕을 지냈다고 하고, <청장관전서> 에는 기자조선의 41세 왕과 8세의 왕이 기록되어 있다.

위서 《환단고기》는 기자조선을 기술하지 않고 있고, 단군조선이 2096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규원사화》의 1195년과 901년의 차이가 난다.

건국 연대 및 치세[편집]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 10월에 건국되었다고 알려졌고 단기도 그에 따르고 있으나, 사서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와 치세의 기간은 다양하다.

건국 연대[편집]

  •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동국통감》과 《고려사》 지리지에 모두 ‘당요 무진년에 단군이 평양에 도읍하였다’하였는데, 요의 즉위가 상원갑자 갑진에 있었으니 무진은 곧 25년”이라고 하여, 기원전 2333년을 단군의 원년으로 삼았다.
  • 허목은 《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 ‘조선이 평양(平壤)에 도읍한 것은 도당씨(요임금)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던 해’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에서는 당요 50년 경인년(기원전 2311년)을 단군의 원년으로 하였다.
    • 삼국유사》에서는 《고기》를 인용하여,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했다. 저자 일연은 당요 건국 후 50년인 경인년에 건국했다고 하고 주 무왕 기묘년에 기자가 오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하였다. 이 1500년설은 그 후에도 여러 사서에서 소개되어 왔다. 예컨대 조운흘(趙云仡)의 《삼한시귀감(1370년대)》 주석 이외에도 유희령(柳希齡)의 《동국사략(1529년)》, 이종휘의 《수산집》에 실린 《동사》의 〈단군본기〉, 홍경모(洪敬謨)의 《총사(叢史)》 등에 실려있다. 이것은 '기자조선설'을 인정한 조건에서도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622년 또는 기원전 2786년(《제왕운기(帝王韻紀)》의 종말 연대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으로 간주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황윤석(黃胤錫)이 단군조선 존속 기간에 대한 몇 개의 설을 소개하면서 '또는 말하기를 2800년이라 한다'라고 지적했다.[출처 필요]
  • 중국의 당요 즉위년 간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즉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 '제요(帝堯)'조의 한 주석에 의하면 황보밀(皇甫謐)은 당요(제요)가 갑신년(기원전 2377년)에 태어나서 갑진년(기원전 2357년)에 즉위하였다고 했다. 이 갑진년설은 그 후 송나라의 소옹이 지은 《황극경세서》에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1711년에 쓴 서문이 붙어있는 오승권(吳乘權)의 《강감이지록(綱鑑易知錄)》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 송나라의 류서가 쓴 《자치통감외기(資治通鑑外紀)》에는 제요의 즉위년으로서 세가지 간지들을 전하고 있다. 즉 무진년(기원전 2333년), 무인년(기원전 2323년), 신묘년(기원전 2310년)이다.
  • 해동역사》에 인용된 중국 《조선세가》에는 경자년(기원전 2361년)으로 되어있다.
  • 16세기 사람인 심언광(沈彦光)은 《단군사(檀君祠)》라는 시에서 단군의 건국 연대를 요임금 갑자년(기원전 2337년)이었다고 썼다(《어촌집》 권4).
  • 갑자년(기원전 2457년) 개기(開基)설이 있는데, 최명길의 시 등에 한마디 나오며, 그 의미는 명백치 않다
  • 조선 《성종실록》의 양성지 상언 내용 중에 단군 이후로 3,9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가 기원전 2420년이 된다.
  • 고려사》 열전의 〈백문보전〉에 백문보공민왕에 단군 이후로 3,6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가 기원전 2240년 부근이 된다.
  • 《제왕운기》의 연대를 따르면 기자조선의 치세 928년, 공백기간 164년, 단군조선의 치세 1028년으로, 건국연대는 기원전 2313년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본책에서 단군 원년이 무진년이라는 내용과 달라, 일반적으로 1028년을 1048년의 잘못으로 보고 원년을 2333년으로 본다.
  •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홍산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라고 보며 고조선의 성립이 기원전 30 ~ 24세기라고 주장한다.[출처 필요]

치세[편집]

  • 조선《세종실록》 75권, 18년 12월 26일 정해 4번째 기사에서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柳思訥)이 《세년가》에는 단군이 나라를 누린 것은 1048년이었다고 주장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 《제왕운기》는 1028년으로 기록되었으며, 《본기(本紀)》에는 1038년이라 인용하였다.
  •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했다.
  • 응제시주》는 단군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1000년 이상이며, 단군의 수명은 1048세라고 했다.
  • 역대세년가》는 단군의 수명을 1048세 라고 했다.
  • 동국통감》은 1048년이 단군의 수명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 역대로 다스린 햇수라고 기록했다.
  • 동사강목》은 단군의 수명을 1048세라고 했다.
  • 기년아람》은 단군의 수명은 1048세 혹은 1908세라고 했다.
  • 여암전서》는 '무진년에서 을미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인데, 이는 재위년수'라고 했다.
  • 규원사화》에는 1205년으로 기록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 송호정, 《한국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3. 이병도, 《한국사대관》, 1983년, 20쪽.
  4. 이병도, 〈고조선 연구〉, 1975년.
  5. 정호완, 〈단군왕검의 형태론적 풀이〉, 《한글》 제219호, 한글학회, 1993년 3월, 5쪽 ~ 32쪽.
  6. 고조선 연구, 윤내현

참고 문헌 및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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