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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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사학계에서 말하는
한사군의 위치. 중국사학계와도 공통으로 일치한다.[1]

낙랑군(樂浪郡)은 한나라무제(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중 하나로 4군 중에서 현도군과 함께 최후까지 남은 변군이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북부의 중국 변군(邊郡)으로 존속하며 한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쳐 한반도의 삼한에 많은 문물 전파를 해주어 한반도 남부 변,진한의 문화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목차

역사 [편집]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은 위만조선 영내에 낙랑군을 비롯한 3개 군을 설치(이듬해에 현도군을 추가로 설치함)하여 위만조선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착민들의 저항에 무딪혀 기원전 82년, 진번·임둔의 두 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병합시켰으며 기원전 75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집안 방면(국내,환도 지역)의 고구려현高句麗縣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南部都尉)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여 관리하여 별 다른 탈 없이 군현을 운영하였다.

당시 낙랑군 일대에는 연나라의 진개 동정 이후 청천강 이남에 세형동검(한국식동검) 문화를 수립시킨 고조선의 유민뿐만 아니라 위만조선 및 그 이전 고조선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이주해온 한인(漢人)들 , 요동으로부터 이주해온 고조선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를 한서 지리지 현도군은‘낙랑조선인’이라 부른다. 낙랑군의 토착 세력은 고고학적으로 목곽묘(木槨墓)를 남긴 세력으로 구별된다. 기원전 1세기 전반부터 2세기까지 낙랑군은 '귀틀 무덤'의 단계로 돌입한다.

이들 낙랑군의 토착 세력은 목곽묘를 조영하며 세형동검, 고조선식 거마구(삿갓모양동기,권총모양동기,을자형 동기 등)를 사용하고 '낙랑 토기(대표적으로 화분형토기)' 를 사용하며 한나라의 철제 무기들을 일부 받아들여 낙랑군과 밀접한 교류를 하면서도 자신들만의 고유 문화를 유지했다.

기존 토착 낙랑인의 목곽묘를 대체한 귀틀 무덤 집단은 중국 산동 왕씨 세력을 필두로 많은 호화 부장품들과 철제 무기를 부장하였으며, 상당한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낙랑구역 정백리 고분군)

(新)의 왕망(王莽)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太尹)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 찍힌 봉니(捧泥)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사람 왕조(王調)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 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光武帝)는 서기 30년에 왕준(王遵)을 보내서 낙랑의 호족 왕굉 등과 합세하여 왕조를 죽이고 낙랑군을 다시 되찾았다. 이때 후한은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영동 7현을 표기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지역에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였는데, 화려,불내 등의 소국이 전해지며 후한 왕조는 이들을 후국侯國으로 책봉하였다. 일각에서는 대무신왕 때 정복된 낙랑국도 영동 7현의 세력 중 하나라 보기도 한다.

낙랑군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204년)[2]

2세기 후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요동군(遼東郡)을 중심으로 공손탁(公孫度)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 및 한이 강성하여 낙랑군은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공손강(公孫康)은 204년에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황해도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公孫摸)·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流民)을 막았다. 또한 삼한 종족과 예濊를 정벌하여 삼한 종족·예濊에 있던 옛 한나라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그러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군帶方郡에 복속되었다. (삼국지 동이전 한韓조) 서기 2세기 후반~ 3세기 초부터 황해도에서 나타나는 요동반도,산동반도 계통의 벽돌무덤( 전실묘塼室墓 )들은 귀틀 무덤을 대체하고 활발히 조영된다.

(魏)가 건국된 후 명제(明帝)는 238년, 사마의(司馬懿)를 파견하여 요동의 군벌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한다. 그 이유는 서기 3세기 전반부터 공손연,요동,낙랑,대방의 호족들이 오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며 위나라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삼국지 공손도전) 위명제 조예가 조서를 발표하여 요동,낙랑,대방의 호족들에게 오나라와 교류할 것을 금지하라고 촉구했으나 이를 듣지 않아 군대를 일으켜 요동,낙랑,대방을 정벌한 것이다. 명제는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낙랑군·대방군을 평정하고 마한의 신분고국과 싸워 신분고국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후 대방군은 3세기 중반 히미코의 야마타이 왕조의 조공을 받고 이를 위나라에 알려 위나라 황제가 히미코를 '친위왜왕'으로 책봉하게하는 등 낙랑군이 아닌 대방군 중심의 무역 체계가 활발히 가동되었다. 이 시기 일본열도 기나이 지역의 전방후원분들에서 출토되는 수백점의 삼각연신수 청동거울들은 위나라 명제의 연호를 새긴 청동 거울인데. 위나라의 대방군에서 제작하여 히미코의 야마타이 왕조에 수여된 위신재들임을 알 수 있다.

서진(西晋)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되어 낙랑 및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276년에는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신설하고 낙랑·대방을 속하게 하였다. 300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더 버틸 힘을 상실하였다. 313년 미천왕은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낙랑·대방의 군벌 왕준과 장통(張統)은 모용씨(摹容氏)에게 투항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낙랑군은 축출되었다.

낙랑,대방의 벽돌무덤( 전실묘塼室墓 ) 집단은 고구려의 통치에 복속하여 고구려 내에서 자치 세력을 형성하여 전실묘들을 여전히 활발히 조영하고 고구려 문화를 받아들여 소위 '고구려 벽화 문화'를 형성한다. (대표적으로 안악 3호분) 서기 4세기 중반 낙랑,대방의 호족 '동수冬壽'는 중국의 동진東晉 왕조로부터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 창려(昌黎)ㆍ현토(玄?)ㆍ대방(帶方)태수(太守)로 제수되어 고구려와 낙랑,대방군의 무역을 담당하였다.(안악3호분 동수 묵서명) 이로 보아 낙랑,대방의 중국계 호족들은 여전히 이 지역에서 세력의 위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모용씨 및 북위(北魏)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백제와 고구려는 낙랑, 대방 지역을 두고 서로 다투며 중국에게 ‘낙랑태수’ ,‘낙랑공’ 등의 작위를 받았으며,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에서 세력의 우위를 확고히 점유하게 되자 장수왕 이후부터 낙랑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계속 이어졌다.

소속 현 [편집]

낙랑군의 소속 현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다. 《한서》에는 25개 현, 《후한서》에는 18개 현이 소속된 것으로 나타나며, 《진서》에는 낙랑군 소속으로 6개 현, 대방군 소속으로 7개 현이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낙랑군의 호구 조사 목간(기원전 45년)에는 모두 25개 현의 호구가 기록되어 있다. 아래 표는 목간에 나타난 순서를 고려해 정리한 것이다.[3]

낙랑군의 소속 현
현의 이름 추정되는 위치 연혁
조선현(朝鮮縣)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토성동 낙랑토성 [4] 전한 무제가 점령한 후에 조선현(원래 고조선왕험성으로 추정되나 뚜렷한 고고학적 근거는 없다.)을 치소로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204년(후한 말기)에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313년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
남감현(䛁邯縣)[5] 위치 미상
증지현(增地縣)[5] 위치 미상
점제현(黏蟬縣)[5]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 [4][6]
패수현(浿水縣)[5] 위치 미상
탄열현(吞列縣)[5] 위치 미상
사망현(駟望縣) 위치 미상
누방현(鏤方縣) 평안남도 성천군 [7]
수성현(遂城縣) 위치 미상
(이병도는 황해북도 수안군에 비정)[8]
혼미현(渾彌縣) 위치 미상
둔유현(屯有縣) 위치 미상
(이병도는 황해북도 황주군에 비정)
대방현(帶方縣) 황해북도 사리원시 당토성(唐土城) [9]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한 후에 진번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진번군이 폐지된 후 낙랑군에 편입되어 남부도위에 속했으나, 기원후 30년에 남부도위가 폐지되었다.

204년(후한 말기)에 공손강이 대방현을 치소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314년에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

열구현(列口縣) 황해남도 은률군 [10]
장잠현(長岑縣) 위치 미상
황해남도 신천군 남부면 봉황리 추정[11][4]
해명현(海冥縣) 위치 미상
소명현(昭明縣)[12] 황해남도 신천군 북부면 서호리
제해현(提奚縣) 위치 미상
함자현(含資縣) 위치 미상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 유성리 추정[13][4]
동이현(東暆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한 후에 임둔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이 폐지된 후 현도군에 편입되었으며, 기원전 75년 낙랑군에 편입되어 동부도위가 설치되었다. 전·후한 교체기에 유명무실해져 중국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기원후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었다.
잠태현(蠶台縣) 위치 미상
불이현(不而縣) 위치 미상
화려현(華麗縣) 함경남도 금야군 [14]
사두매현(邪頭昧縣) 위치 미상
전막현(前莫縣) 위치 미상
부조현(夫租縣) 함경남도 함주군 [15]

문화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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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어 실제로 조선을 통치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玄菟郡) 정도였으며, 그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다. 동쪽(東)의 임둔군(臨屯郡)과 남쪽(南)의 진번군(眞番郡) 그리고 후일 설치된 대방군(帶方郡) 역시 1세기밖에 존속하지 못하였고, 현도군도 두 차례나 이동하였기 때문에 한군현의 문화는 대체적으로 낙랑 중심의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낙랑군의 위치 및 성격에 대한 논란 [편집]

위치 [편집]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였다.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봉니(封泥)·한식(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낙랑의 위치는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임이 확증되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16]

그러나 신채호 등의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낙랑군이 요동 일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조선의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 일부 학자들은 낙랑군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17]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8] 1993년에 랴오닝 성 금성현에서 임둔태수의 인장이 찍힌 봉니가 발견되어 ‘요서설’의 주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19]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국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자의적 해석, 사료 오독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써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20]

성격 [편집]

  • 낙랑군은 한사군의 대표격으로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및 국사교과서에는 낙랑군만이 평안도 일대에 남아 한나라와의 교역을 관리하는 무역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언급 외에는 한사군에 대해서 거의 설명되지 않고 있다.
  • 낙랑군 자체의 성격에 대하여 실질적인 중국의 군현 체제로 존속하였던 것은 전한 및 후한 시기에 불과하였으며 대부분의 시대에는 중국계 유이민 세력의 군벌 세력으로 존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낙랑과 낙랑국 [편집]

서기 30년 에 고구려의 대무신왕과 관련된 호동 설화(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최리의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보기도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자체가 호동 왕자가 낙랑왕 최리를 만난 지역이 옥저라고 나온다는 점에서 서기 30년에 낙랑군의 동부도위가 통치하는 영동 7현이 낙랑군에서 독립하여 옥저,예 지역에 낙랑후국樂浪侯國들과 세워진 것과 동일. 옥저 낙랑후국 = 최리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로 낙랑군=낙랑국 설은 허무맹랑한 것에 불과하다.

관련 항목 [편집]

주석 [편집]

  1.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편,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출판사, 2004 중 24페이지를 참고
  2. 한국 사학계에서 추정하는 위치
  3. 이 표의 전체 내용은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두산백과사전 EnCyber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박영사, 1976를 참고하였다.
  4.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
  5. 후한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서진 시기 중에 폐지되었다.
  6. 점제현신사비 출토
  7.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2장 낙랑군고 149~150쪽, 박영사, 1976
  8.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2장 낙랑군고, 박영사, 1976, 148
  9.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1장 진번군고 125~126쪽, 박영사, 1976
  10.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1장 진번군고, 박영사, 1976, 126
  11. 전주농, 〈신천에서 대방군 장잠장왕경의 무덤 발견〉, 《문화유산》 1962-3, 1962년, 76~77페이지
  12. 대방군에는 소명현이 없고, 남신현(南新縣)이 나타남.
  13. 일민함자왕군묘(逸民含資王君墓) 명문전 출토
  14.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4장 임둔군고 207~208쪽, 박영사, 1976
  15.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4장 임둔군고 206~207쪽, 박영사, 1976
  16. 한국목간학회 판독회 보도
  17. 송호정, 〈남북역사학의 쟁점 고대사의 강역, 어디까지 우리 땅이었나〉, 《역사비평》13호, 1990, 박선희 교수,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
  18.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19. 1. "요서땅 임둔군은 고조선 유물의 보고, " 국제신문 2008년 9월 3일자
  20.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

바깥 고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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