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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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7년 경 한중일 역사학계가 말하는 한군현의 위치
낙랑군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204년)

낙랑군(樂浪郡, 조선말(북): 락랑군)은 한나라무제(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세운 한군현(漢郡縣) 중 하나로 현도군과 함께 최후까지 남은 변군이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북부의 중국 변군(邊郡)으로 존속하며 한반도 및 만주 일대의 제민족들과 대립하고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사[편집]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전한 무제우거왕이 지배하던 위만조선 영내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등 3군을 설치(이듬해에 현도군을 추가로 설치)하여 위만조선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82년에 진번·임둔의 두 군을 폐지하여 각기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시켰으며 기원전 75년에는 토착민들의 반발로 인해 현도군이 집안 방면(국내, 환도 지역)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현도군·구 임둔군의 일부 현들이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현도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南部都尉)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부도위는 변방의 이민족들을 통제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가진 부속 행정구역으로, 남부도위(황해도)와 동부도위(함경·강원도) 역시 한(韓)과 예맥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낙랑군 일대에는 위만조선의 유민뿐만 아니라 위만조선 및 그 이전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이주해온 한인(漢人)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를 ‘낙랑조선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낙랑군의 토착 세력은 고고학적으로 목곽묘(木槨墓)를 남긴 세력으로 구별된다. 기원전 1세기 전반부터 2세기까지 낙랑군은 '귀틀 무덤'[1]의 단계로 돌입한다. 기존 토착 낙랑인의 목곽묘를 대체한 귀틀 무덤 집단은 왕씨 세력을 필두로 많은 호화 부장품들과 철제 무기를 부장하였으며, 상당한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낙랑군은 황해를 통한 해상 교류로 산동반도 일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낙랑의 유력한 한인(漢人)들 가운데는 산동반도에서 이주해온 이들도 있었다.[2] 전한 시기에 상당한 번영을 누려서 25개 현을 거느리고 인구가 40만에 이르렀으며, 주변의 여러 부족 및 소국들에 조복과 의책을 수여하면서 통제하여 한반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新)의 왕망(王莽) 시기에도 낙랑군은 번영하였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산동 지방의 인구가 유입되기도 하였다. 25년에는 낙랑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인(土人) 왕조(王調)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 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후한이 건국되고 광무제가 군벌들을 제압하는 가운데 30년에 왕준(王遵)을 파견하여 낙랑의 호족 왕굉 등과 합세, 왕조를 죽이고 낙랑군을 다시 수복하였다. 이때 후한은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영동 7현을 포기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지역에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였는데, 화려, 불내 등의 소국이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대무신왕 때 정복된 낙랑국도 영동 7현의 세력 중 하나라 보기도 한다.

2세기 후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요동군을 중심으로 공손탁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 및 한(韓)이 강성하여 낙랑군은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공손강204년에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公孫摸)·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流民)을 막아 낙랑·대방군의 쇠퇴를 막았다.

(魏)가 건국된 후 238년 명제(明帝)가 사마의로 하여금 공손연을 토벌할 때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낙랑·대방도 평정하였다. 이후 3세기 동안 낙랑군은 고구려 및 한반도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에 지원군으로 참여하였으며, 마한의 소국 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서진(西晋)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되어 낙랑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낙랑군이 쇠퇴하면서 이를 대신해 한반도 및 남만주 일대의 제민족을 통제하기 위해 동이교위가 설치되었다. 304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군벌 장통(張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313년에 미천왕이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장통이 일부 민호를 이끌고 요동모용씨(摹容氏)에게 투항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낙랑군은 축출되었다.

이후에도 모용씨 및 북위(北魏)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백제와 고구려는 낙랑, 대방 지역을 두고 서로 다투며 중국에게 명목상 ‘낙랑태수’, ‘낙랑공’ 등의 작위를 받았으며, 낙랑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계속 이어졌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신라를 가리켜 낙랑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소속 현[편집]

낙랑군의 소속 현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다. 《한서》에는 25개 현, 《후한서》에는 18개 현이 소속된 것으로 나타나며, 《진서》에는 낙랑군 소속으로 6개 현, 대방군 소속으로 7개 현이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낙랑군의 호구 조사 목간(기원전 45년)에는 모두 25개 현의 호구가 기록되어 있다. 아래 표는 목간에 나타난 순서를 고려해 정리한 것이다.[3]

낙랑군의 소속 현
현의 이름 추정되는 위치 연혁
조선현(朝鮮縣)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토성동 낙랑토성 [4] 전한 무제가 점령한 후에 조선현(원래 고조선왕험성으로 추정)을 치소로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204년(후한 말기)에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313년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
남감현(䛁邯縣)[5] 위치 미상
증지현(增地縣)[5] 위치 미상
점제현(黏蟬縣)[5]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 [4][6]
패수현(浿水縣)[5] 위치 미상
탄열현(吞列縣)[5] 위치 미상
사망현(駟望縣) 위치 미상
누방현(鏤方縣) 평안남도 성천군 [7]
수성현(遂城縣) 위치 미상
(이병도는 황해북도 수안군에 비정)[8]
혼미현(渾彌縣) 위치 미상
둔유현(屯有縣) 위치 미상
(이병도는 황해북도 황주군에 비정)
대방현(帶方縣) 황해북도 사리원시 당토성(唐土城) [9] 원래 위만조선의 진번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한 후에 진번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진번군이 폐지된 후 낙랑군에 편입되어 남부도위에 속했으나, 기원후 30년에 남부도위가 폐지되었다.

204년(후한 말기)에 공손강이 대방현을 치소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314년에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

열구현(列口縣) 황해남도 은률군 [10]
장잠현(長岑縣) 위치 미상
황해남도 신천군 남부면 봉황리 추정[11][4]
해명현(海冥縣) 위치 미상
소명현(昭明縣)[12] 황해남도 신천군 북부면 서호리
제해현(提奚縣) 위치 미상
함자현(含資縣) 위치 미상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 유성리 추정[13][4]
동이현(東暆縣) 위치 미상 원래 위만조선의 임둔 땅이었으며, 전한 무제가 점령한 후에 임둔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이 폐지된 후 현도군에 편입되었으며, 기원전 75년 낙랑군에 편입되어 동부도위가 설치되었다. 전·후한 교체기에 유명무실해져 중국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기원후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었다.
잠태현(蠶台縣) 위치 미상
불이현(不而縣) 위치 미상
화려현(華麗縣) 함경남도 금야군 [14]
사두매현(邪頭昧縣) 위치 미상
전막현(前莫縣) 위치 미상
부조현(夫租縣) 함경남도 함주군 [15]

문화[편집]

위치 및 성격에 대한 논란[편집]

낙랑군 위치에 관한 학설

위치[편집]

한국중국, 일본 등 대부분의 역사학계는 각종 문헌 자료와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낙랑군이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존속하였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와 대한민국의 일부 학자, 재야사학자들은 중국의 랴오닝 성이나 허베이 성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16]

낙랑군의 위치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사료인 《당서》와 《신당서》〈고구려전〉에는 고구려수도 평양성이 과거 낙랑군이라 기록되어 있다.[17]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모두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반면에 《요사》〈지리지〉를 비롯한 일부 사료에는 낙랑군이 만주 서부(요동 혹은 요서)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8]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고 비정하는 견해들이 일부 남아 있다.

한편 중국의 고대 하천지리를 기록한 《수경》(水經)은 낙랑군의 패수(浿水)가 동쪽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고 하였으나[19]한서》〈지리지〉는 서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20] 일반적으로 패수는 대동강으로 비정되는데, 《수경》에 기록된 강의 흐름이 대동강과 다르기 때문에 패수와 접한 낙랑군의 위치도 문제가 된 것이다. 《수경》에 상세한 주석을 달았던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고구려 사신에게 직접 패수의 방향과 성의 위치를 확인하여 《수경》에 기록된 방향이 틀렸다고 지적하였으며 옛 낙랑군의 위치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라 기록하였다.[21] 《삼국사기》,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모두 패수를 평양대동강이라 비정하고 있다.[22]

조선시대에도 한백겸(韓百謙), 안정복(安鼎福), 한치윤(韓致奫), 정약용(丁若鏞) 등 대다수의 학자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23] 조선 정부에서 편찬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도 낙랑군을 평양에 있었다고 하였다. 반면 권람(權擥)은 낙랑군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했으며[24], 박지원(朴趾源), 이규경(李圭景), 신채호(申采浩) 등은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였다.[25]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실학안정복, 한진서 등은 모용씨북위 시기에 요동ㆍ요서로 낙랑군을 교치하였던 사실을 《요사》 등의 저자들이 혼동하여 한나라 때부터 요동ㆍ요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 비판하였다.[26]

일제강점기현재에 걸쳐서 평양 일대에서는 봉니(封泥)·한식(漢式) 무덤·인장(印章)·벽돌·그릇·칠기 등 한나라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낙랑군은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가 중심이라는 통설을 뒷받침했다. 2007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되었던 목간을 분석하여 낙랑지역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 평양 일대라고 확실시하고 있다.[27] 이러한 고고학 발굴 결과에 대해 신채호 등은 일제가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일부 재야사학자들 역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28] 고구려에 의해 포로로 끌려온 한족들의 유적이라는 주장도 있다.[29] 반면 낙랑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는 주장에서 고고학적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1993년에 랴오닝 성 후루다오시에서 나온 임둔태수 봉니 하나뿐이며 이외의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30]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지배적 정설은 평양 중심의 한반도북부설이다. 그외 소수설로 윤내현, 복기대 등의 요서라는 주장,[31]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는 학계 밖의 주장[32] 등이 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해방 후 근 3,000기에 달하는 평양 일대의 낙랑 무덤들을 발굴·정리하면서 관련 유적·유물들이 한나라 낙랑군의 것이 아닌 고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낙랑국의 것이라고 발표하였고,[33] 평양에서 2005년 출토된 낙랑 목간을 분석한 결과, 낙랑군이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34]

일부 소수의 학자들 및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은 언론 매체를 통해서 자주 재생산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하였으며[28], 2015년에는 국회의원을 통해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35]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및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은 다수의 고고학적인 증거를 근거 없이 무시하고 잘못된 문헌 사료의 취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16]

성격[편집]

  • 낙랑군은 한군현의 대표격으로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및 국사교과서에는 낙랑군만이 평안도 일대에 남아 한나라와의 교역을 관리하는 무역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언급 외에는 한군현에 대해서 거의 설명되지 않고 있다.
  • 평양 낙랑고분에서는 고조선 고유의 비단과[36] 독특한 세형동검문화가 나타나는 등 고조선 지배세력의 기반은 낙랑군에서도 어느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묘제의 변천 역시 기원 전후까지는 주로 목곽묘였다가 이후 1세기를 중심으로 중국 중원 및 다른 한반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귀틀묘가 유행한다. 즉 낙랑군 설치 이후 한나라계 주민은 고조선화하고, 고조선계 주민은 한화(漢化)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다만 시간이 갈수록 한화가 가속화된다. 오영찬은 ‘낙랑문화는 중국과 고조선 세력의 영향력이 교차하고 융합해서 이룬 독특한 문화’라고 보고, 낙랑인이라는 종족집단(ethnic group)을 거론하였다.[37]

낙랑과 낙랑국[편집]

30년 경에 고구려의 대무신왕과 관련된 호동 설화에 등장하는 최리의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하나의 묘광 속에 사각형 형태의 외곽을 조영한 뒤 그 내부에 다시 두 개 이상의 목관을 두는 형태
  2. 후한서》〈순리열전〉“왕경”條
  3. 이 표의 전체 내용은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두산백과사전 EnCyber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박영사, 1976를 참고하였다.
  4.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
  5. 후한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서진 시기 중에 폐지되었다.
  6. 점제현신사비 출토
  7.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2장 낙랑군고 149~150쪽, 박영사, 1976
  8.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2장 낙랑군고, 박영사, 1976, 148
  9.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1장 진번군고 125~126쪽, 박영사, 1976
  10.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1장 진번군고, 박영사, 1976, 126
  11. 전주농, 〈신천에서 대방군 장잠장왕경의 무덤 발견〉, 《문화유산》 1962-3, 1962년, 76~77페이지
  12. 대방군에는 소명현이 없고, 남신현(南新縣)이 나타남.
  13. 일민함자왕군묘(逸民含資王君墓) 명문전 출토
  14.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4장 임둔군고 207~208쪽, 박영사, 1976
  15.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제2편 한사군문제의 연구 제4장 임둔군고 206~207쪽, 박영사, 1976
  16.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
  17. 《당서》199권上 열전 제149上 동이 고려조 :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신당서》220권 열전 제145 동이 고려조 :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18. 《요사》38권 지 제8 지리지2 동경도 동경요양부조 : 遼陽縣, 本渤海國金德縣地. 漢浿水縣. ... 紫蒙縣, 本漢鏤方縣地. 동경도 흥주조: 興州, 本漢海冥縣地. 동경도 숭주조: 崇州, 本漢長岑縣地.
  19.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20. 《한서》28권 지리지 제8下 낙랑군조 : 浿水, 水西至增地入海
  21. 《수경주》14권 패수조 : 其地今高句麗之國治. 餘訪番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誌》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 以朝鮮為遠,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22. 《삼국사기》37권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평양성 조 : 平壤城似今西亰而浿水則大同江是也. 《고려사》58권 지 제12 지리3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조 : 有大同江 卽浿江, 又名王城江.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조 : 大川曰大同江, 卽古之浿江又云王城江. 《신증동국여지승람》51권 평안도 평양부조 : 大同江 在府東一理 一名浿江又名王城江
  23. 한백겸, 《동국지리지》. 안정복, 《동사강목》. 한치윤, 《해동역사》. 정약용 《여유당전서
  24. 권람, 《응제시주
  25. 박지원, 《열하일기》,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신채호, 《조선상고사
  26.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서는 낙랑, 대방 등의 군현을 요서(遼西) 지역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중략)...중국의 서책에서 혹 요동의 여러 현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한치윤, 《해동역사》〈지리고〉4 ‘사군’ / “모용외(慕容廆)가 낙랑군을 두어 장통(張統)으로 태수를 삼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별도로 요계(遼界)에 두어 옛 이름을 그대로 칭하기를 마치 후세의 요령(遙領)하는 예와 같이 한 것이지 한나라 때의 옛 군은 아니다.” - 안정복, 《동사강목》〈사군고〉
  27. 윤용구 "새로 발견된 樂浪木簡", 한국고대사연구 46, 한국고대사학회, 2007
  28. 3ㆍ1절 특집 SBS스페셜 역사전쟁 - 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조작〉, 2011년 2월 27일
  29.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 한겨레 기사
  30. 한민족의 뿌리 - 단군조선을 찾아서 <4> 잠든 임둔군을 깨우다〉, 《국제신문》, 2008년 9월 2일
  31. 송호정, 〈남북역사학의 쟁점 고대사의 강역, 어디까지 우리 땅이었나〉, 《역사비평》13호, 1990
  3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3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 중심, 2001
  34. 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한겨레》, 2007년 4월 26일
  35. 동북아역사재단 추진 역사지도, 중 ‘동북공정’ 지도 베끼기 의혹
  36. 박선희, 〈복식으로 본 고조선문명과 고대사 체계의 재정립〉, 《고조선단군학》Vol.26, 고조선단군학회, 2012
  37. 낙랑은 어느 나라 역사입니까? 경향신문(2013.12.02)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

참고 자료[편집]

  • 「삼국유사」, 낙랑국(樂浪國), 일연 저,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1998년, 62~65p)
  • 「동아시아 역사속의 중국과 한국」, 4세기 이후의 낙랑교군과 낙랑유민, 박지훈 저, 서해문집(2005년, 203~241p)
  •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낙랑군의 존재를 알리지 마라, 김병훈 저, 반디출판사(2006년, 194~195p)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