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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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南北國
국가 발해 신라
수도 상경성 금성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15 국왕
대조영
대인선
21 국왕
효소왕
효공왕
성립 698년 698년
멸망 926년 935년
统一新罗九州.jpg
685년, 삼국 통일 후 9주 5소경 설치(신라).
Balhae-Territory in 830.JPG
830년, 선왕대 전성기(발해).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 또는 통일신라 시대(統一新羅時代)는 698년 북부의 만주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발해의 건국 이후에 남부의 한반도에 있는 신라(900년부터는 후삼국 시대)와 공존하다가,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종료된 시대를 의미하는 역사 용어이다.

시기[편집]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이 끝나자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개혁하였고, 강화된 왕권으로 귀족들을 억눌렀다. 또한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라 조세가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 무렵 만주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발해 고왕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모아 발해를 건국하고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역사에 북국의 발해와 남국의 신라라는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서기 900년, 남쪽의 신라는 견훤이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궁예가 북부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남쪽에서는 신라가 분열되어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어 남북국 시대의 양상과 사실상 병존하였다. 918년후고구려왕건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로 국호를 개칭하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멸망하자 남국의 고려에서는 발해의 대광현 왕자를 비롯한 고구려계 유민들을 수용하기도 하면서 고구려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다져갔다. 요나라에 의해 북국인 발해가 멸망하면서 남북국 시대의 양상은 완전히 종료되었고, 한반도 내에서의 후삼국 시대만이 남게 되었다.

명칭[편집]

조선 전기에는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만이 '일통삼한'의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발해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발해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류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하며 삼국 시대가 끝난 후에 남쪽에는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구분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부르며 발해에 관해 어두웠으나, 1980년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자들 사이에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한국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1] 한국 사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중국 사학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는 발해를 배제하고 신라만을 정통 역사로 인정, "신라 하나로 통합하다"(統一)라는 뜻이므로 발해가 빠져 있다. 때문에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발해를 외면했다는 이유로 중국 일부 사학계의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된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한국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역사적 통일은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는 반성도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고려 태조 왕건은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계 유민들을 수용하였고,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족에 버금가는 반열에 들게 하였다. 도올 김용옥은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대신 "신라의 삼국해체"라는 용어를 자신의 저서에서 사용하였다.

신라[편집]

한국의 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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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
고조선 시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통일 왕조기
식민지 시대
분단 한국
v  d  e  h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편집]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대체로 대립적이었다. 733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발해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 금성에 이르는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가 서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이러한 교역로는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인데, “신라도”라고 불렀다. 신라도는 8세기 전반에 개설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자주 이용된 시기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까지이다.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박기성 특파원. "중국, 발해사 포함 고대사 송두리째 왜곡", 《한겨레신문》, 2006년 9월 5일 작성. 2009년 11월 10일 확인.

바깥 고리[편집]

  • 남북국시대, 《한국민족문화대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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