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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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 ~ 841년
시대 신라 후기(9세기)
다른 이름 아명: 궁복(또는 궁파)
관직 직책: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
주군 흥덕왕신무왕문성왕

장보고(張保皐)[1]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무장 출신으로 신라의 해상 호족이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이며, 다른 이름은 장보고(張寶高)이다.

생애[편집]

장보고는 언제 태어났는지 어떤 계통인지도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그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2]라고만 적고 있다.

일찍부터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3]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 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참상을 전하며,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해적 토벌에서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받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법회를 열 때 200~400명까지 인파가 몰려들었다.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자신의 진영에 환대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하였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죽고, 신라에서 일어난 왕위 다툼에서 제륭(희강왕)에게 패하고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제륭도 재위 3년만인 838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이 스스로 즉위하자(민애왕), 예전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동의한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김양과 함께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왕경에 입성, 왕경군을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추대한다. 이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장보고가 사망한 연대를 문성왕 8년(846년)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에서는 조와 7년(841년) 11월 중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회창(會昌) 5년(845년) 7월에 전 청해진 병마사가 국난을 당하여 중국에 망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현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죽은 때를 841년 11월 중으로 보고 있다.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평가[편집]

장보고와 정년이 원래 지기였고 당에서 무령군중소장이 된 사실을 소개한 《삼국사기》장보고열전의 저본은 중국 당나라 두목이 지은 장보고전 즉 《신당서》권220 신라전이다. 장보고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 높은 관위(청해진대사)를 얻은 뒤, 반대로 관직에서 물러나 한미하게 지내던 정년이 장보고를 믿고 그를 찾아갔을 때에 정년을 예를 갖추어 환대한 것, 환영 연회를 벌이는 동안에 국왕이 살해당하고 수도가 혼란에 빠진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가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자네(정년)가 아니면, 이 화란을 진압할 수 없다.”며 반란을 토벌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으며, 장보고는 재상에 등용되고 정년이 청해진대사를 이어받은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나아가 두목이 장보고와 정년의 교제를 안녹산의 난 때의 곽분양ㆍ이림회의 교제에 빗대어 인의(仁義)의 사람이라 칭찬한 것을 전하면서, 《신당서》열전을 편찬한 송기의 평으로 국난의 시기에 의를 품고 국가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서 진(晉)의 기해와 당의 곽분양, 그리고 장보고를 거론하고 "어찌 동쪽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하고 있다. 이를 다시 《삼국사기》에 기재한 김부식은 신라본기와의 기사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장보고에 대한 두목과 송기의 평가를 지지한다. 또한 김유신전의 말미에서도 김유신의 공적을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도 고구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무용을 함께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 조선조의 안정복에게까지 이어졌다.

적산대명신과 신라대명신[편집]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 전반, 산동 반도의 항구도시였던 적산(赤山), 지금의 룽청 시(荣成市)에는 장보고와 연계한 당시 많은 신라 상인이 거류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이곳에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세웠는데, 이 무렵 당 조정의 명령으로 서둘러 귀국해야만 했지만 불법으로나마 당에 남아서 천태종을 배우기로 결의한 일본의 입당청익승(入唐請益僧) 엔닌(円仁)을 위해 그를 적산법화원에 머물도록 배려하고, 현지의 중국 관인들과 교섭해 공험(公驗, 여행허가증)을 얻어내주기도 하는 등 엔닌의 9년 6개월에 걸친 구법행(行)을 물심 양면에 걸쳐서 지원했던 것도 장보고였다. 엔닌이 일본으로 귀국할 무렵에는 이미 장보고 자신은 암살된 뒤였지만, 장보고 휘하에 있던 장수 장영(張永)이 대신 엔닌이 귀국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었다고 한다.

신라선신당

오늘날 일본 교토 시 북쪽의 히에이(比睿) 산 엔랴쿠사(延曆寺)에 있는 적산선원에 모셔져 있는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은 엔닌의 제자가 엔닌의 뜻을 이어 신라인들이 섬기던 신을 모시기 위해 닌나 4년(888년)에 세운 것이다. 흔히 도교의 최고신인 태산부군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신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 신이 장보고를 모티브로 한 신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적산대명신과 함께 엔랴쿠사 경내에는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을 모신 신사도 존재하고 있는데, 현재 일본 시가 현 오쓰 시의 온죠사(園城寺)에도 마찬가지로 이 신라대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남아 있다. 엔닌과 마찬가지로 당에 유학했다가 돌아오던 승려 엔친(圓珍)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붉은 옷을 입고 흰 활을 들고 나타나’ 풍랑을 잠잠하게 가라앉혀 엔친을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가 가지고 돌아오던 경법(經法)을 영원히 수호할 것을 맹세한 신이었다 하여 엔친이 가지고 온 경전과 법구를 이 온죠사에 보관하게 된 것이라 한다. 센고쿠 시대 다케다(武田) 집안의 시조로 추앙되었던 헤이안 시대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가 이곳에서 관례를 올리고 신라사부로(新羅三郞)를 칭한 이래 다케다 집안에서도 이 신라대명신을 가신(家神)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신라선신당 건물은 조와(貞和) 3년(1347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기부한 것이다.

앞서 엔닌이 당나라에서 오대산의 하나인 북대엽두봉(北台葉頭峰, 해발 3,058미터)에 올랐을 때 얻은 향나무로 만든 문수상을 귀국한 뒤인 죠간 3년(861년) 10월에 엔랴쿠사 경내에 따로 문수루(文殊樓)을 지어 모셨는데, 이 문수루는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히에이 산을 불태웠을 때 소실되고 현재는 재건된 것이다. 이 문수루 옆에는 현재 장보고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편집]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 장도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송징장군(송징)을 주신(主神)으로 정년장군(정년)과 혜일대사를 좌우에 모신 사당에서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1982년부터 장보고를 함께 합사하여 당제를 거행한다.[4]

장보고를 소재로 한 작품[편집]

소설
* 김동인 《아기네》, 1932년 - 동아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일환이라는 청자에게 역사 속의 사건을 화자가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신문연재분 129호부터 136화까지 궁파(장보고)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기존의 《삼국사기》의 시각대로 궁파를 왕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도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가 쫓겨난 것을 보고 홧김에 반란을 일으키려다 염장에게 살해되고 마는, "용기의 뒤에 잇어서 그 용기를 빛나게 할만한 사려라는 것이 없은" 인물로 평가하였다.
* 정한숙 《바다의 왕자(王者)》 - 1960년 4월 29일부터 1961년 6월 3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장편소설. 결말을 맺지 못한 채 연재 중단됐다가 1975년 《민족문학대계》권5에 작가의 퇴고를 거쳐 전재되었고, 문학평론가인 최영호 해군사관학교 인문학과 교수가 남은 원고를 정리해 2008년에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재출간하였다.
* 조세호 《해상왕 장보고》, 1999년
* 김중명(金重明) 《고(皐)의 백성》(원제: 皐の民), 고단샤(講談社), 2000년
* 최인호 《해신》(海神), 열림원, 2003년
애니메이션
* 《모험왕 장보고》- 서울무비(2002년) 장보고의 일생을 다룬 교육용 플래시 애니메이션.
* 《바다의 전설 장보고》(Legend of Blue) - 서울무비(2002년) 장보고를 모델로 한 SF애니메이션
드라마
KBS 드라마 《해신》(海神) (2004년~2005년, 배우 : 최수종, 백성현)

장보고함[편집]

한국 최초의 잠수함인 장보고함은 독일제 209형 잠수함으로, 모두 아홉 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장보고급으로 불리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장보고의 한문표기에 대해 중국 기록은 張保皐, 일본 기록은 張寶高로 표기하고 있다.
  2.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궁복, 《신당서(新唐書)》 신라전이나 《삼국사기》장보고열전에는 장보고, 《삼국유사》기이편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는 궁파,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장보고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의 이름에 대해서는 원래 성이 없고 ‘궁복’이라는 고유 이름만으로 불렸던 것이 당에 건너간 뒤 중국식의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궁(弓)’은 중국에 많은 성씨인 ‘장(張)’씨로 치환하고, ‘복(福, 또는 파巴)'’은 그 글자의 중국식 발음을 한자로 음차표기한 것이라는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의 지적이 있다.
  3. 군중소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1천 명에서 5천 명 정도의 군사를 휘하에 거느릴 수 있는 지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장도는 장군도(將軍島) 또는 조음도라고도 불렸는데, 장좌교 서북쪽 100m의 장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의 동백나무숲 언덕에 여섯 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 목 없는 시신이 묻힌 1기가 장보고의 것이고 나머지는 그의 양친과 근친 선대의 것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장보고는 반농반어로 먹고 살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이곳 장도 바깥의 바다에서 고기잡이와 노젓기, 수영을 배우고 활과 창으로 무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참고 문헌[편집]

  • 완도문화원,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당서, 속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 장보고의 신연구》 (완도문화원, 1985)
  • 김상기, 고대교역연구와 나말의 해상발전에 취하여 (震檀學報 1·2, 1935)
  • 이영택, 장보고해상노력에 관한 고찰 (한국해양대학논문집 14, 1979)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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