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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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
朝鮮 世祖
Joeseon Sejo01.jpg
조선의 7대 국왕
본명 이유(李瑈)
재위 1455년 ~ 1468년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
출생일 1417년 11월 2일
사망일 1468년 9월 23일 (50세)
왕비 정희왕후
부왕 세종
모비 소헌왕후
이전 왕 단종
다음 왕 예종
왕조 조선
묘호 세조
시호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조선 세조
朝鮮 世祖
1417년 11월 2일 (음력 9월 24일) ~ 1468년 9월 23일 (음력 9월 8일)
태어난 곳 조선 한성부
죽은 곳 조선 한성부
별명 별칭 대호(大虎), 작위는 진평대군, 함평대군, 함양대군, 진양대군, 수양대군, 시호는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복무 조선
최종 계급 도제조 및 중외 병마 도통사
지휘 조선 육군
기타 이력 영의정부사, 조선 국왕(1455~1468)

세조(世祖, 1417년 11월 2일 (음력 9월 24일) ~ 1468년 9월 23일 (음력 9월 8일)[1], 재위 1455년~1468년)는 조선의 제7대 임금, 시인이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이다.이씨(李氏), 는 유(瑈),본관전주(全州), 는 수지(粹之). 생전의 존호는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였고, 사후 정식 시호는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고, 약칭으로는 시호는 혜장대왕(惠莊大王)으로 불렸다. 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서, 문종의 동복동생이자 안평대군 용, 금성대군 유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기도 하다. 즉위전 호칭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초봉은 진평대군(晉平大君)이었으나 여러차례 개봉된 끝에 수양대군이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반정(反正)을 일으켜 집권한 지도자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고, 역대병요 등을 편찬할 때 만난 권람 등을 통해 한명회를 소개받고, 문종 연간에 한명회를 통해 신숙주, 정창손, 정인지, 김질 등의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여 조정을 장악해 나간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 인, 안평대군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한 뒤 스스로 정난공신 1등관에 녹훈하였다. 1455년 조카 단종으로부터 명목으로는 선위의 형식으로 즉위하였으나, 훈신들의 압력에 의한 강제 퇴위였고 이는 이후 사육신, 생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을 진압하고 사육신과 그 일족을 대량 숙청하였으나 후일 죄를 뉘우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사육신 등의 대량 학살로 공신 세력이 강성해지자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468년 9월 7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傳位)하고, 9월 8일에 수강궁(壽康宮)의 정전(正殿)에서 승하하였다.

생애[편집]

잠저 시절[편집]

출생과 왕손[편집]

세조 이유는 1417년 음력 9월 24일 당시 본궁(本宮)에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차남이자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2] 그가 소년기일 때 태종이 어린 손자들과 산책을 하던 중 한 고승이 태종을 보고 두 번째 손자분이 할아버지의 기상을 많이 닮았다고 예견하였다. 태종이 승려에게 어떻게 닮았느냐고 묻자, 둘째 손자가 할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언하였다.

그는 보통의 왕자로 여생을 보낼 운명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태종은 자신의 뒤를 이을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위치가 상당히 불안하고, 주색을 즐기는 등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 세자를 교체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2살때, 숙부인 성녕대군이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인 충녕대군이 왕세자를 거쳐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바로 입궐하지 못하였는데,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조는 궁밖 민가에서 자랐다. 그것은 당시 유아 사망의 정도와 궁실의 분위기가 그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와 더불어 큰할아버지인 정종과 할아버지인 태종의 붕어가 잇따랐기 때문에 아이가 자라기에는 아직 환경이 좋지 않은 탓도 있은 듯하다.

민가에서 성장한 것은 왕자 유에게 오히려 많은 영향을 주었다. 궁실에서 애지중지되어 귀하게 자라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라기보다는, 자유롭게 뛰어놀면서 민간의 일들을 상세히 겪으면서 활달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고귀함은 그대로 그에게 전해져 이미 남다르게 성숙하였다. 왕자로서의 고귀함과 도량이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배어져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또한 이미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후에 왕이 된다

대군 시절[편집]

입궐과 대군 봉작[편집]

사저에서 자라다가 5세 무렵 입궐하였다. 1428년(세종 10년) 6월 16일 대광 보국 진평대군(大匡輔國 晉平大君)에 봉작되었다. 1429년(세종 11년) 2월 세종이 평강(平康)에 친히 나가 무예를 강무(講武)할 때 그는 그간 익혔던 궁술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열 셋이었다.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사슴을 향해 화살 7발을 쏘았는데 이것이 모두 사슴 목을 관통하였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 후에 봉작이 바뀌어 함평대군(咸平大君), 진양대군(晉陽大君) 등으로 개봉되었고, 훗날 1445년(세종 27년) 다시 수양대군 (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중간에 함양대군에도 봉해졌던걸로 잘못 알려져있는데 함양대군으로 봉해졌던 기록은 없다.) 1428년(세종 10년) 파평 윤씨 윤번의 딸 윤씨(후일의 정희왕후)와 길례를 올렸다.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나 일찍이 글재주가 없음을 깨닫고 활쏘기와 무술 연마에 정진하였다.

교육과 소년기[편집]

포은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교정치(儒敎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세자(뒤의 문종)를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이어 다른 대군들도 성균관에 입학시켜 성리학을 배우게 한다. 세종은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썼다. 이러한 세종의 특별 배려 속에 왕자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다재다능하여 일찍 배운 것을 습득하고 응용하였다.

1434년 16세 때 그는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 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李英奇) 등이 보고 감격하여“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합니다.” 하였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박식하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격구, 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

무인[편집]

세조는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다. 사람들이 궁마(弓馬)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려 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좋아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여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당시 수렵 중 가장 재미있고 호쾌한 것으로 꼽히던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자칫 궁중 생활로 약해질지도 모르는 체력을 승마를 통하여 다져나갔다. 세조는 사냥과 궁술, 마술 등을 익혀 상당한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무인 선발과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찬집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1436년(세종 18) 2월, 그의 나이 약관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書史)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형인 세자는 일찍이 수양의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라는 시를 친히 적어주기도 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정치활동 초기와 전제 개혁[편집]

부왕 세종의 병환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의 특별 지시로 그는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439년(세종 21년) 7월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면서 전제상정소 도제조(田制詳定所都提調)가 되어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부여하는 토지제도의 분배 재개혁을 주관하였으며, 세종 재위기간 중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서적의 편찬과 찬술을 감독하였으며 중국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명나라천축국에서 불서들을 구하여 불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라고고 하였다.

1444년 전제소 제조(田制所提調)에 임명되었고, 1445년(세종 27년) 진양대군에서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문종의 대리청정[편집]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세종 자신의 생각도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시켜 왕위 계승의 올바른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야심을 경계하면서도 수양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리라 확신했고, 세조의 형인 문종도 모든 면에 있어 군주로서의 능력을 십분 가지고 있었다. 수양의 역할이란 그저 왕실을 보위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문종의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세종 자신도 소갈증과 고혈압을 비롯한 질환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않고, 좀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왕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원손을 보필하라는 당부를 여러번 거듭하였다.

저작 활동[편집]

측근 신숙주, 집현전내 수양대군의 지지세력으로, 세조는 즉위 후 그를 당태종의 위징에 비유하기도 했다.
학역재 정인지, 그의 측근이자 사돈이 된다.

수양대군이 야심이 있다는 소문이 문종 즉위 초부터 확산됨에 따라 그는 철저하게 자신은 왕위에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계속 명나라인도에서 불서들을 수입하여 탐독하였고, 매사냥과 활쏘기를 즐겨하였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병약함을 기회로 일부 국정전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히 숨겼고, 정치 보다는 학문서적 간행에 힘쓰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정치를 하려는 기회를 노렸다. 이때에 그는 한명회, 권람을 알게 되고 그들로부터 뒤에 신숙주, 정인지 등의 인재들을 포섭하게 된다. 대군으로 있으면서 그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제도의 재개혁을 맡았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역대병요 歷代兵要〉·〈의주상정 儀註詳定〉 등의 책을 찬술했고 중국의 〈운회 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집현전의 학사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집현전 학사들 중 일부는 안평대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숙주정인지 등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집권 과정[편집]

왕족, 훈신들의 위기 의식[편집]

그는 보통의 왕자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종이 병약했고, 후사(단종)도 나이가 어렸다. 세종 자신도 병중인데다가, 문종은 부왕보다도 더 병약하여 요절할 우려도 있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또, 자신이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그 뒤를 이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1452년 문종은 병약하여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다. 조선의 왕은 왕권을 하늘이 부여한다는 왕권 신수설과 비슷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황보인 등 의정부 신하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상황 속에서 왕실과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종친들은 저마다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우 안평대군 계열이 왕위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자 수양대군 역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변 기도와 권력 장악[편집]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이어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그 뒤 안평대군의 양가[3]의 재산을 적몰하고, 성녕대군 부인 성씨 등을 폐출시킨 뒤 안평대군의 가족, 측근들을 노비로 삼았다. 이후 안평대군의 처형을 유도하여 탄핵, 그해 10월 19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한 뒤, 실권을 장악했다. 3월말에는 스스로 중외 병마 도통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고, 이어 금성대군이 그의 집권에 반발하였으나, 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 음력 6월에는 결국 단종을 강제적으로 왕위에서 밀어냄으로써 조선의 새 왕으로 등극하였다.

즉위 이후[편집]

즉위 초반[편집]

조선 세조 어진

즉위 초 그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중앙집권을 추진한다. 세조는 먼저 비대해진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했으며,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다.

각지의 수령을 국왕이 직접 임명하되, 백성들에게 수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8도의 관찰사가 일부 작은 현의 현감, 현령을 임명할 수 있었으나 현령과 현감은 왕이 직접 임명하는 것으로 바꾼다. 또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삼정승과 좌찬성,우찬성육조판서들의 정무를 결재하는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6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예조참판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와 신념을 아껴 그에게 여러번 교서를 내려 부름을 받아 예조 참판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 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먹지를 않았다 한다.[4] 그러나 하위지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세조가 즉위하자 왕권 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를 대신하여 육조가 관장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다시금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반대하고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유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4]

하위지는 즉위 초 세조가 역대병요와 병서 편찬을 도운 사람들을 승진시키려 한 것을 반대하였다. 단종 즉위 초,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역대병요≫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의 품계를 승진시키려 하였다. 역대병요와 병서의 책임자가 수양대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되었다.

한명회를 시켜서 행정기관의 개편을 추진하고 향소부곡 제도를 폐지한다. 한명회는 5가구를 1개의 통으로 묵는 오가작통법과 다시 5개의 통을 1개 리로 하고, 몇개의 리를 면(面)으로 하는 면리제를 창안하여 세조에게 건의한다. 오가작통법으로 세금의 납부가 수월해졌고 세금납부를 피하여 달아난 자들에게는 같은 통과 리에 사는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된다.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단종복위 사건과 대숙청[편집]

1455년 7월 25일(윤 6월 11일)에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의 존호를 받았다. 이후 그는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1453년 10월 25일 함길도 종성에서 일어난 이징옥의 난이 발생했으나 부하들이 이징옥을 배신하는 내분으로 쉽게 토벌했다. 1456년 2월 단종을 복위시킬 목적으로 성삼문 등이 거사를 도모하다가 세조의 측근인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일망타진되었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삼문·박팽년·유성원·하위지·이개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한다. 1456년 6월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내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사육신과 관련자들을 비롯한 그 일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유배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로 충군하였으며, 4촌 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의 대숙청을 감행한다.

그 후 1457년 9월에 일어난 넷째 동생 금성대군의 단종복위계획을 세운다. 동생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금성대군과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5] 이후 세조의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야인으로 일생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 단종복위사건으로 숙청된 사육신에 대비하여 생육신이라 한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세조로 하여금 의심을 더욱 부추기는 원인이 됐고, 조카인 단종을 죽이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세조는 결국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단종에게 죽음을 내렸고,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사림파의 등용[편집]

한편 사육신과 관련자들, 집현전학사들의 대대적 숙청과 함께 생육신 등의 문사들 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낙향, 시골과 야산에 은거한다. 사육신 등을 처형한 뒤 문사들을 억압, 탄압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그는 정몽주의 후손들과 문도들을 발굴해서 등용한다. 이때 김숙자김종직 역시 등용되는데, 이들의 정계 진출 이후 향촌에 은거하던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등용되었으면서도 후일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반정을 조롱했고, 김종직의 제자들과 그의 학파는 세조의 반정을 찬탈로 규정하고 조롱하였다.[6]

세조 즉위 초반에는 사림의 세력은 미약하였으나 손자인 성종대에 사림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정파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내정과 외치[편집]

세조는 먼저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했으며,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다.

1457년에는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법전 편찬과 서적 편찬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원구제(圜丘祭)를 실시하는 등의 문화 사업을 펼쳐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

1459년 신숙주(申淑舟)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 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이듬해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圓覺經)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1459년 아버지 세종대왕과 장남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에 일부 실린 '세종어제 훈민정음'

한편 그가 며느리뻘인 귀인 권씨(貴人 權氏)와 소훈 윤씨(昭訓 尹氏)를 범하려 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후궁들이었다.[7][8] 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손 자신도 희생되었다.[7][8]김일손은 귀인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許磐)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7]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7][8]

서적 간행 지원[편집]

세종 사후 세조 때 다시 활판 인쇄술이 활기를 띠고 서적의 보급이 재확산되는데, 활자를 주조, 보급하여 활판 인쇄와 서적 출간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출판 사업 중에는 <법화경> <금강경> 등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함으로써 불교발전에 이바지한 업적도 특기할 만하다.[9]

또한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국조보감 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 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 經濟六典〉의 정비 등의 일련의 편수·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오륜록 五倫錄〉·〈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동국지도 東國地圖〉·〈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 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1461년(세조 7년)에는 자신의 친필로 '대불정여래밀인수증다라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을 간행하였다.[10] 주자소에서 세조의 친필과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을해자(乙亥字)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책으로,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과 조선 초기 활자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판본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다라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후일 보물 제1520호로 지정된다.[10] 불교 경전과 불교 관련 서적들이 시중에 대량으로 유포, 확산되었으며, 훈민정음으로 된 책들 중에는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시중에 유통되었다.

만년[편집]

현덕왕후 부관참시[편집]

1457년 음력 6월 갑자기 악몽을 꾸고 형수 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한 뒤 폐서인시켰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전설과 야사가 나왔고, 세조 사후 희극 작품의 소재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야사는 1457년 아들 덕종(의경세자)가 일찍 죽자 세조가 아들 단종의 죽음에 한을 품은 문종현덕왕후의 혼령이 사주한 것이라 착각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전한다.[11][12][13]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덕종이 사망한 것은 1457년 음력 9월 2일로, 오히려 단종(1457년 음력 10월 21일)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사망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세조 시기인 1457년 음력 6월 26일에 서인으로 격하되었지만, 그것 또한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처형당해 현덕왕후(1457년 음력 6월 26일 폐서인)가 아버지 권전(1456년 음력 7월 7일 폐서인)과 함께 연좌된 것이었다. 폐서인된 왕후의 능은 평민의 격에 맞도록 작게 재조성되었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게 된다.

이후 중종 때부터 현덕왕후의 연좌제 적용이 합당치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에 따라 1513년 음력 3월 12일에는 중종현덕왕후를, 1699년 음력 7월 15일에는 숙종이 현덕왕후의 아버지 권전을 명예 회복시키게 된다.

문둥병[편집]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불교에 귀의[편집]

만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신륵사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수종사(水鍾寺)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한다.[9] 강원도월정사, 상원사 등에도 적극 시주, 후원하였고 파주 보광사, 남양주수종사양평 용문사, 합천해인사 등도 그가 후원하는 사찰들이었다.

그가 지원하던 사찰 중에는 양주수종사도 있었다. 그런데 수종사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시주해 세운 곳이기도 하다.[9]

또한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의 사찰들에 (시주로) 지급하도록 지시한다.[14]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들에 나눠주기도 했다.[14]

한편 그의 사후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에 그의 영정이 봉안되기도 했다.[14] 합천 해인사에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는데[9], 이 해인사 영정은 2000년대까지도 전하고 있다.

왕자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말년[편집]

파일:세조존영도 1.jpg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에 봉안되었던 세조영정

1467년에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카 귀성군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강순을 파견하여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는 무장들을 신뢰하여 귀성군, 남이, 강순 등을 측근에 두었는데, 이들에 대한 총애에 반감을 품은 왕세자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을 모두 숙청했다.

만년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15] 반면 적장자였던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행위가 유교의 시각으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만큼, 세조의 불교 융성 정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했던 세조 나름의 성리학자 견제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16]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음력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다. 바로 명나라에 고부사신 황중(黃中)·김계박(金繼朴)을 파견하여 그해 12월 혜장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당시 나이 향년 52살이었다.

사후[편집]

그의 사후 단종을 암군으로 보고, 그가 과단성있게 반정을 일으켜서 국정을 안정시켰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나,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본격 정계에 진출하고 도학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1910년대까지도 사사로운 탐욕으로 어린 조카를 폐출한 폭군, 비정통 군주로 평가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광릉(光陵)이다. 후에 정희왕후가 안장될 때 동원이강형의 봉분으로 조성된다. 본래 빈청(賓廳)에서는 묘호로서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 셋을 추천했으나, 아들인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표현해야 한다며 세조를 제안했고, 이대로 정해졌다. 또한, 원래 추천된 시호는 열문영무신성인효(烈文英武神聖仁孝)인데, 예종의 의견을 더해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의숙인효(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懿肅仁孝)로 정해졌다. 능호는 경릉(景陵), 창릉(昌陵), 정릉(靖陵) 셋이 추천되었는데, 예종은 이를 태릉(泰陵)으로 하도록 했다가 신숙주의 의견을 참조하여 광릉(光陵)으로 정했다.

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여러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다.[17] 이 당제는 조선시대에는 제관이 열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일제 시대에 제관이 5~6명으로 줄었다. 1978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17] 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사상과 신념[편집]

육조직계제[편집]

세조 존영도

그는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서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의정부 서사제나 6조의 판서와 한성부 판윤->의정부 좌,우찬성->삼정승을 거쳐서 왕에게 하달되던 것을 왕이 직접 6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에게 결재를 받고 직접 인사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공신 견제[편집]

사육신의 숙청과 생육신 등의 축출로 공신들의 권력이 비대해지자 그는 재야에 있던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들의 월권행위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명회신숙주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수종사 복설[편집]

1459년 세조에 의해 복설된 수종사 전경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려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 밤이 되어 양수리에서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옆에 있는 운길산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절터가 있고,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9]

이 사실을 접한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마침내 발심하여 절터에 절을 복원케 하고 이름을 수종사라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9] 수종사는 1459년(세조 5) 왕명에 의해 중창되었다. 종각 밑에는 세조가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만큼이나 굵은 나이테를 간직하고 있다.[9]

무속 신봉[편집]

유교사회에 속했으면서도 그는 무속과 불교를 신봉하였다. 왕위찬탈을 모의하고 있던 수양 대군이 하루는 시중의 민심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글자판, 한자로 판을 놓고 글자로 점을 치는 점쟁이를 만났다. 수양대군은 아무 생각없이 밭전(田)자를 고르자 점장이가 '허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왕이 많은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놀란 수양대군은 무슨 얘기인지를 물어본 즉, 밭전자는 임금 왕(王)자 두개를 수평과 수직으로 겹쳐놓은 글자라는 것이다. 얼마 후 수양 대군은 다시 점장이를 찾아 똑 같이 밭전자를 골랐다고 합니다. 그러자 점장이가 '첩첩산중'이라고 예언하였다. 다시 궁금증이 생긴 수양대군이 점장이에게 이유를 묻자 뫼산(山)를 사방으로 겹쳐놓은 것과 같은 글자이므로 산중의 산, 첩첩산중이라는 것이다. 점장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의심한 수양 대군은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요량으로 허리에 칼을 차고 다시 점장이를 찾아가 칼 끝으로 다시 밭전(田)자를 골랐다고 한다. 죽음을 느낀 점장이는 말없이 밭전자의 좌우를 치더랍니다. 밭 전(田)자에서 좌우를 없애면 임금 왕(王)자가 된다. 그리고 좌와 우를 치우라고 예언했는데 이에 크게 깨달은 수양대군은 좌와 우를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판단, 좌의정 김종서와 우의정 황보인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논란과 의혹[편집]

사육신에 대한 가혹한 숙청[편집]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했던 한 사람인 성균관사예(司藝) 김질이 실패의 두려움 또는 장인 정창손의 회유로 장인 정창손에게 거사를 알리고 함께 세조를 찾아와 반역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즉시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세조는 사육신을 친국하였다.

세조가 유응부를 향해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고 묻자 유응부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18])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19])에게 고발을 당하였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20]” 하니 세조는 노하여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21] 불에 뜨겁게 달군 불판위에 올렸으나 유응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고 비명소리를 내지 않았다.

세조가 온갖 고문을 직접 가하며 그 정상(情狀)을 신문하였으나 유응부는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하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그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20] 세조는 더욱 화가 나서 달군 쇠를 직접 가져와서 유응부의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20]

회유와 박팽년의 조롱[편집]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21] 하위지에게도 그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다른 사육신과 함께 정변을 일으킨 것을 시인하고 사죄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위지 역시 그의 회유를 뿌리쳤다.

세조는 여러번 박팽년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21]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21]

박팽년이 보낸 장계와 상소를 모두 갖다보니 신하 신(臣)이 아니고 클 거(巨)로 되어 있었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21] 박팽년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정·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하위지 역시 1456년(세조 2)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그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鞫)을 받게 되었다.[4] 하위지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산 세조는 여러번 하위지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하위지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4]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거절한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形,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4]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4] 이때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4] 다른 사육신은 아들, 아버지, 형제, 조카들까지 처형하였으나 하위지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사육신의 유래[편집]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21]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21]

평가와 비판[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이 있다.

건국 초기라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개국공신에게 집중되었던 토지를 환수하는 토지법을 시행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9]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9] 그밖에 호불(護佛)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9]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불문율에 붙인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해준 공신들을 대부분 죽인 할아버지 조선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조선의 당파 싸움을 최초로 시작한 훈구파의 형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측량 의상(儀象)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천문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부정적 평가[편집]

정변으로 조카를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하려 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형인 문종을 독살했다는 설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문종의 의관 전순의(全循義)를 시켜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이 사망할 경우 큰 벌을 받는게 일반적이었으나 의관 전순의는 작은 형벌에 그쳤다가 다시 복귀받았으며 수양이 왕이 된 이후에 일개 의관 신분으로 일등공신으로까지 책봉을 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혹을 주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여러가지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단종의 어머니. 단종을 낳은지 3일만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남)의 능을 파헤치고 부관참시하는등 잔인한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문종 독살설

태종과의 비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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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조에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 세력들이 왕실보다 오히려 높은 곳에 있으면서 왕실을 조정하려고 한 경향이 있었고, 세조조에는 김종서나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권(臣權)이 강화되어가는 점에 대한 왕실의 반발이 고조되고 있었다.

태종이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 등 신하들이 왕권의 위에 있으면서 강력한 신권을 넘어 왕실을 조정하려고 한 경향이 있었고, 문종 때에는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김종서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권(臣權)이 강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왕족들과 일부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에 왕권의 강화를 표명하고 나서고 있음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세조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왕권의 행사가 왕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이 어린 단종과 고명대신인 김종서와 황보인, 그리고 안평대군의 모호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의 해결은 점진적인 개혁책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 그들이 그것을 허용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이 왕다움을 행사하는 것을 되찾기 위한 것은 바로 이들에 대한 단호한 결단만이 가능할것이라고 하여 `계유정난'을 통해 이룩해 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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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 夜中聞松風
뚫린 창 너머로 별을 헤아려 본다 / 穿窓見天星
탄식한다. 나의 노둔한 재질을 / 歎我駑劣才
학업에 진력한들 어이 능히 이루랴? / 服業安能成
한없는 고요 속에서 박명을 알지만 / 窮靜知薄命
그 누가 이 심정을 위로해 주리 / 誰能尉此情
나는 생각한다, 그 옛날의 사람들을 / 我懷古之人
행하신 바가 성실 않음이 없네 / 所用無不誠
성실은 도를 행하는 방법 / 誠以履道方
옛 것을 익혀서 더욱 정진하리라 / 業故用彌精
큰 근본이 잘 정해져야 / 大原旣克定
온갖 인재들이 많은 영화를 누리리라. 百才享多榮

기타[편집]

안평대군과 이현로(李賢老)의 집에 있던 글과 작품들이 많았는데, 세조는 이 작품들을 보지도 않고 '괴상한 글과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22]

그는 자신의 인척이기도 한 남이구성군 준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차남 예종의 질투심을 유발하여 남이구성군은 예종 즉위 초 숙청된다.

단종의 비참한 죽음을 소재로 한 《단종애사》를 지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다시 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세조대왕》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가계[편집]

작품 속에 나타나는 조선 세조[편집]

드라마
영화
연극

저서와 작품[편집]

저서[편집]

작품[편집]

문학[편집]

같이 보기[편집]

관련 서적[편집]

  • 李浩權, “석보상절의 서지와 언어”, 國語學叢書39, 國語學會, 2001년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0)

주석[편집]

  1.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9월 8일(갑자) 7번째기사 백관과 함께 태상왕에게 사은하였는데 그날 밤에 태상왕이 훙하다
  2. Life History and Sermon of Buddha Abstracted from Buddhist Scriptures (1447년). 2013년 5월 24일에 확인.
  3. 안평대군은 후사 없이 죽은 삼촌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4.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3698 하위지)
  5.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6.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고, 숙종 때인 1681년(숙종 7년)에 우의정 김구의 상소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7. 歷史 왜곡과 조선의 史官 서울신문 2001년 7월 14일자
  8. 아는 만큼 힘들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일손(金馹孫): 당신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⑥ 프레시안 2007년 11월 12일자
  9.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8498
  10. '경국대전'·'영산회상도' 등 보물 지정 노컷뉴스 2007-07-20
  11. 《조선의 왕실과 외척》(박영규, 김영사, 2008) 214 페이지
  12.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웅진닷컴, 2007) 155 페이지
  13. 《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 1》(최범서, 가람기획, 2006) 187 페이지
  14. "금강산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 - 오마이뉴스 2005년 03월 11일자
  15. 김상재, 《명당은 순환한다》 답게, 2001, p.225, ISBN 8975741478
  16.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p.149, ISBN 8901047543
  17.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민화의 세계로 - 오마이뉴스 2006.09.06
  18.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
  19. 김질 또는 신숙주를 가리킴
  20. 유응부
  21. 박팽년
  22.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10월 25일(무신) 7번째기사 "세조가 이용과 이현로의 집에 있는 글을 모두 불태워 버리다"
  23. 윤번(尹璠), 조선 중종의 외척세력의 뿌리가 된다. 의 고조부이다. 즉 윤번의 아들에서 갈라져 그 각각의 증손자이므로 8촌간이다.
    참고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4등에 책록되어 정국공신이 되었고, 장경왕후의 부친인 윤여필#가계(尹汝弼)에 자세히 서술되어있다.
  24. 정현조는 의숙공주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이징의 딸과 재혼한다. 이 문제를 훗날 첩으로 논정하느냐 여부를 놓고 중종때까지 논쟁이 지속되었다.
  25. 세희(世嬉), 야사 《금계필담》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존재로, 야사에 기록된 이름은 '세희(世嬉)'이다. 실록에서는 공주 작호를 받은 것은 물론, 실존여부 자체가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록의 세종 28년(1446) 기록에 "수양대군은 윤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고 있다"라고 한 부분이 있다.
  26. 세조실록 31권 9년(1463) 11월 24일 1번째 기사

바깥 고리[편집]

조선영의정부사
1453년 10월 11일 ~ 1455년 6월 11일
후 임
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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