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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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년 ~ 1801년 5월 29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조선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의 서장남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장조의 아들 중 정조, 은전군과 함께 성년기까지 살아남았다. 철종의 할아버지로 철종은 그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었다.

생애[편집]

불우한 소년기[편집]

생애 초기와 가족사항[편집]

조선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명흥(明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영조의 손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아버지는 장조이며, 어머니는 숙빈 임씨(肅嬪 林氏)이다. 부인은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이다. 장조의 서장남으로 1754년(영조 30) 탄생하였다.[1]1764년(영조 40) 10세에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지고, 1765년(영조 41) 11세에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인 군부인 송씨와 관례를 행하였다.

정치와 사회적 물의[편집]

사도세자의 사후 출궁되었으며, 이후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1769년 김귀주(金龜柱) 등이 이를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탄핵을 당했다.

1768년(영조 44) 2월 3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官)에 제수되고, 이해 4월 20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다닌다 하여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이복동생 은신군과 함께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되었다. 이해 이복동생 은신군은 제주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혼자 버티다가 1774년(영조 50) 안치된 지 3년 만에 은언군은 석방되어 다시 서용되었다.

정치 활동[편집]

복권과 관료생활[편집]

이후 한성부로 돌아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가 1776년(정조 즉위년) 5월 8일 종부시제조(宗簿侍提調)에 제수하고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었고, 이해 8월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고, 이해 8월 24일 수덕대부(綏德大夫)에 가자되었다.

1777년(정조 1) 3월 5일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이해 8월 28일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778년(정조 2)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팔았다는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탄핵을 당했으나 정조가 무마시켰다. 1779년(정조 3) 6월 28일 다시 종부제조(宗簿提調)을 거쳐 이해 12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상계군의 세자 지목[편집]

1778년(정조 2) 홍국영(洪國榮)이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원빈 홍씨(元嬪 洪氏)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이듬 해인 1779년(정조 3)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준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상계군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는 것을 수용하고 만다.

생애 후반[편집]

유배[편집]

홍국영은 완풍군(完豊君 : 완(完)은 왕족의 본관인 완산(完山)을 가리키고 풍(豊)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키며 후에 상계군(常溪君)으로 개칭함.)이라 부르면서 가동궁(假東宮)이라 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이 계속 역모를 꾸며고, 상계군 담은 자기가 연루되자 1786년 음 11월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였으나 정조가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강화도에 처자와 함께 유배시켰다.

노론 계열에서는 은언군에게도 흑심이 있었을 것이라며 그에게 사형을 처해야 한다는 탄핵 상소를 거듭해서 올렸으나, 정조는 이를 거부하였다. 계속해서 노론계 대신들의 탄핵이 폭주하자, 정조는 비밀리에 변복하고 출궁하여 은언군에게 연락, 변복하고 썰매를 타고 강화도 입구로 나왔다. 그러나 이 사실이 노론 벽파계 대신들에게 알려졌고,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당장 돌아오라며 연락을 보낸다. 정조의 은언군 구하기 항의성 시위는 일단 벽파대신(僻派大臣)들이 정조의 체신을 생각하여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탈출 실패와 정조의 죽음[편집]

1797년(정조 21) 비밀리에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병졸에게 적발, 체포되어 다시 그곳에 안치되었고, 그뒤로도 벽파대신들과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로부터 역모의 화근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자 상황이 뒤바뀌게 되었다. 순조 즉위 초부터 다시 은언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죽음[편집]

절두산에 있는 은언군과 그의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의 묘비

그는 사도세자의 자손들 중 정조, 은전군과 더불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몇 안되는 자손이기도 했다. 또한 은전군이 19세에 사사당함으로써 40세 이상 생존한 혈족은 정조와 그가 유일했다. 1801년 5월 27일 새벽 비가 오는 틈을 타 아들 이철득(李鐵得)과 함께 도,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강화 유수 황승원(黃昇源)으로부터 탄핵을 당한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순교하자, 삼사로부터 가족이 사교(邪敎)에 물들도록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기차게 탄핵을 받다가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이때 그의 향년 48세였다.

사후[편집]

1849년(헌종 15) 손자 원범(元範)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고, 이해 9월 12일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의하여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으며, 1851년에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에 의하여 신유사옥 때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이 지어 올려졌다.

명예 회복[편집]

1871년(고종 8) 2월 21일 왕족 은언군과 은전군의 시호를 의논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은언군(恩彦君)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다. 증시(贈諡)의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세 때문에, 중간에는 겨를이 없어서 못하였으니 모두 까닭이 있었으나, 선대왕(先大王)의 성충을 우러러 체득하고 있는 만큼 의당 숭보(崇報)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고, 은전군(恩全君)에게 증시하는 은전도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일체(一體) 시호를 의정하게 하라." 하였다.

이해 2월 25일 은언군 등의 시호는 행실과 업적에 따라 짓게 하고, 전교하기를, "시호(諡號)는 행적에 대한 자취이니, 그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받은 사람으로도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번 시호에 대한 의논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찬양한다면 이것이 어찌 옛 법이겠는가? 안면에 구애되지 말고 청탁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실제 행실과 업적에 따라 정함으로써 옛날의 규례를 회복하도록 홍문관(弘文館)에 분부하라." 하였다.

이해 3월 16일 시호를 충정공(忠貞公)으로 추증하였다.

가족관계[편집]

  • 1정부인 :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년 - 1801년),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
    • 장남 :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년 - 1786년)
    • 2남 : 이창순(李昌順)
    • 3남 : 이창덕(李昌德)
    • 4남 : 풍계군 이당(豐溪君 李瑭, ?년 - 1826년), 숙부(淑父)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년 - 1778년)에게 출계.
    • 딸 : 참봉(參奉) 한각신(韓覺新)에게 출가.
  • 2정부인 : 전산군부인 이씨(全山郡夫人 李氏, 1764년 - 1819년), 전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
    • 5남 :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785년 - 1841년), 철종의 사친.
  • 기타
    • 서자 : 이철득(李鐵得, 1801년 5월, 초 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 도주하려다 실패했다.)
    • 서자 : 이쾌득(李快得)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장조의 아들로는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