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단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 단종
朝鮮 端宗
조선의 제6대 국왕
본명 이홍위(李弘暐)
재위 1452년 ~ 1455년
종교 유교(성리학)
출생일 1441년 8월 9일
사망일 1457년 11월 7일 (16세)
왕비 정순왕후
부왕 문종
모비 현덕왕후
이전 왕 문종
다음 왕 세조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는 홍위(弘暐)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폐위되어 죽어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했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묘호와 시호가 올려져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현덕왕후의 외아들이며, 조선 왕조 최초의 왕세손이기도 하다.

1452년부터 145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52년부터 1453년까지 김종서섭정하였고 1453년부터 1455년 퇴위할 때까지 숙부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섭정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441년 8월 9일(음력 7월 23일)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후가 죽자 어린 세손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세종의 후궁으로 조모뻘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병중이었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요절하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김종서·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즉이[편집]

세자와 즉위[편집]

1450년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한 그 해에 단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문종은 수양대군을 관습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1452년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의정부의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어린 단종의 즉위 이래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계유정난[편집]

수양대군은 종친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영풍군, 정종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써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에 의하여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사사되었다.

양위와 사육신 사건[편집]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영월 청령포의 어소

1454년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1455년(세조 1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 음력 6월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삼문·유성원·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하여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1]

최후[편집]

세조의 측근 공신들은 단종을 사사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고, 삼사는 단종 사사를 주청하게 된다.

1457년 음력 10월 21일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17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사약을 받았다고도 하고, 교살당했다고도 한다. 단종이 죽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2], 영월군의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지를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보고, 그 곳에 가매장하였다. 단종을 매장한 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지만 사망 직후 정보, 이수형 등은 복상하고 3년상을 치루기도 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다. 사망한 지 224년 만인, 1681년(숙종 7년)에 우의정 김구의 상소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에는 복위되어 묘호단종이라 하였다.

능묘[편집]

단종은 1457년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59년 후인 중종 11년 1516년 12월 15일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능은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사대문 밖 80리[3] 이내에서 벗어난 능 중의 하나이며,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이 설치되어 있다.

기타[편집]

동학사[편집]

사육신생육신을 비롯한 관련자 및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물들을 모신 사당이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현 공주시 반포면)에 세워졌다. 동학사 내 숙모전(肅慕殿)에 단종과 신하들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동학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무속에서 신격화된 단종[편집]

민간과 무속에서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진다. 노산군지신(魯山君之神)이라고도 부른다. 영월읍에 있는 영모전(永慕殿) 서낭당을 비롯하여 영월·정선군, 삼척군 등 태백산 인근의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고 있다.

가족 관계[편집]

단종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문학[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 《세조실록》에는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복위 당시 단종의 묘를 애써서 찾아야 했다는 기록에 미루어 《실록》의 기록이 조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아츠뉴스》, 2009년 11월 8일 작성.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