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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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박팽년(朴彭年, 1417년 ~ 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그밖에 중종 반정박원종의 일족으로, 박원종은 그의 8촌 박석명(朴錫命)의 증손이다.

본관은 순천으로 자(字)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목차

생애 [편집]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단종을 보필하였다. 세종 말년에 신숙주, 성삼문, 윤기견, 윤회, 김종서 등과 고려사절요, 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 참여하였다.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전후해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454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수양대군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 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 갔다. 세조실록 6월 2일을 보면. 김질의 지 말로 만은 성삼문김질을 불러서, 김질성삼문 집에 가니, 성삼문김질에게 한담을 하는데. 한담 내용은......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하니,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하고, 급하게 승지(承旨)들을 불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 우부승지 조석문(曹錫文), 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과 성삼문(成三問)이 입시(入侍)하였다. 내금위(內禁衛)조방림(趙邦霖)에게 명하여 성삼문을 잡아 끌어내어 꿇어 앉힌 다음에 묻기를,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하니, 성삼문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청컨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서 아뢰겠습니다.”하였다. 김질에게 명하여 그와 말하게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다 말하지 말라.”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중략).................임금이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李徽)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 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 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 성승(成勝), 박쟁(朴崝), 유응부(兪應孚), 권자신(權自愼), 송석동(宋石同), 윤영손(尹令孫), 이휘(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중략)......................이개(李塏)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 좌참찬 강맹경(姜孟卿), 좌찬성 윤사로(尹師路), 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 형조 판서 박중손(朴仲孫)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윤암(尹巖), 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 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세조실록1456년 6월2일) 세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서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였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했는지, 고문 받던 중 6월7일 사망하였다. 6월 7일 이미 죽은 박팽년, 유성원(柳誠源), 허조(許慥)와 연좌된 사람들에 대해서 논한 기록이 있다. 6월 6일 세조 실록에는 8도 관찰사에게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는 기록이 있다. 연려실기술수양대군에게 신(臣)이라고 한적 없고, 나으리라고만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후에, 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저서로 <취금헌 천자문>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

사후 [편집]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당했으나, [1] 사육신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후손이 존재한다. 그의 며느리이며 장남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는 사육신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며느리 이씨와 한 여종의 기지로 그의 아들은 무사하였다 한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내다가 성종때 자수하여 성종으로부터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박팽년의 사위 김자무(金自茂)는 단종제주목사를 역임했으나 처가가 화를 당하자 일족을 이끌고 피신하여 무장(茂長)에 정착하였다.

박중림(朴仲林)·박팽년(朴彭年)·박기년(朴耆年)·박인년(朴引姩)·박대년(朴大年)·박영년(朴永年)·봉여해(奉汝諧)의 신창(新昌) 전지는 영천 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에게 나누어 주었다. 박팽년(朴彭年)의 삭녕(朔寧) 전지, 아지(阿只)·성삼문(成三問)의 고양(高陽) 전지는 병조 판서 홍달손(洪達孫)에게 나누어 주었다. 박팽년(朴彭年)의 온양(溫陽) 전지는 한명회(韓明澮)에게 나누어 주었다. 박팽년(朴彭年)의 천안(天安) 전지, 박중림(朴仲林)의 연기(燕岐) 전지·천안(天安) 전지는 우승지(右承旨) 윤자운(尹子雲)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실록 1457년 3월23일)

글씨로 「취금헌 천자문」이 전한다. [1]

저서 [편집]

  • 《취금헌 천자문》

가족 관계 [편집]

  • 증조부 :
  • 조부 : 박안생
    • 숙부 : 박종림(朴終林)
      • 사촌 : 박사제(朴斯梯, 경북 경주 기장으로 귀양 갔다.)
  • 아버지 : 박중림(朴仲林, ? - 1456년)
  • 어머니 : 김익생의 딸
    • 형 : 박대년(朴大年, 박사, ? - 1456년)
    • 큰형수 : 윤정수(尹貞守), 박대년이 정강이의 피를 가지고 “원컨대 서로 잊지 말고, 사람으로 수치수러운 짓은 하지 말자.”고 혈서를 써서 옥졸에게 붙여주니. 글자를 알고 쓸 줄 아는 아내 윤정수(尹貞守)가 “밝은 해와 같음이 있을 것이다.” 답했다. 동지중추원사 봉석주의 종으로 주라고 되어 있다. 해평윤씨. 윤연령의 딸[2], 봉석주의 첩이 되었다
    • 동생 : 박인년(朴引年, 교리, ? - 1456년)
    • 제수 : 내은비(內隱非. 박인년의 아내)는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라고 되어 있다
    • 동생 : 박기년(朴耆年, 수찬, ? - 1456년)
    • 제수 : 무작지(無作只. 박기년의 아내)는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라고 되어 있다
    • 누이 : 박씨
    • 매부 : 봉여해(奉汝諧)
  • 처 : 아내 옥금(玉今)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주라고 되어 있다.( 세조실록 1456년 9월 7일)
    • 아들 : 박순(朴珣, ? - 1456년, 사형당함)
    • 자부 : 이씨(李氏, ? - ?)
      • 손자 : 박일산(1457년 - ?)
    • 딸 : 박씨
    • 사위 : 김자무(金自茂)
    • 딸 : 군부인 박씨
    • 사위 : 영풍군, 세종의 서자, 혜빈 양씨의 둘째 아들. 1455년 9월16일 세조실록에 박팽년이 관찰사로 가 있는 동안, 귀양 간 영풍군 이전의 딸인 외손녀를 같이 유배지에 가 있는 어미에게 돌려 보낼 것을 청했으나 거절 당한 기록이 있다
    • 둘째 딸 : 17살 때 시집을 갔는데, 시부모님를 뵙기도 전에 성균 사예 김질, 의정부 우찬성 정창손의 배반, 밀고 사건이 일어남. 시부모님이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게 했음. 다른 어떤 집에서는 사육신 딸이면 오히려 친정으로 돌려 보냈다고 함. 슬하에 8명의 아들을 뒀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구, 경, 곤, 3아들만 생존했음. 시부모님이 우리 집안 맏며느리가 잘 한다고 모든 집안 일을 맡기고, 많은 칭찬 받음
    • 둘째 사위 : 이공린 (李公麟 1437-1509. 연좌로 14년 귀양 살음. 30년간 연좌로 벼슬 못함. 평안도 관찰사 재임 중에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그 동네 관찰사 집에 신주 모시는 정성이 날마다 울음이 통곡이라고, 어머니 홍씨가 절부로 표창되어서 연좌가 풀림. 세조실록, 세조 14년(1468년) 7월 21일 이공린(李公麟 )을 방면하라는 기록이 있다. 46세에 무과급제 해서 창평현령. 무오사화,갑자사화로 셋째 아들이 참형의 죽임을 당하고, 연좌로 또 전라도 해남으로 귀양 가서 중풍. 사화로 풍지박산 되어서 8형제 자손 뿔뿔이 흩어짐. 중종 반정으로 사면 복권됨. 전라도, 평안도 관찰사 이윤인 외아들이자 이윤인, 유인(李有仁, 대사헌), 존인(李存仁), 재인(李在仁), 4명 형제들의 장손. 조부 참판. 자라 먹지 않는 8별집 시조. 이제현의 6대손. 이제현의 둘째 아들 이달존 후손)
      • 외손자 : 오(李鼇.호조좌랑). 구( 李龜.예조좌랑). 원 [李黿. 재사당. 박사. 호조 좌랑. 글 읽는 선비들이 무리지어서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곤장 80대 맞고, 도성에서 15일 걸리는 길 밖으로 귀양 감. 평안북도 곽산으로 귀양 감. 곽산에서 전라도 나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무오년에 부모 형제가 연좌 되고도, 빠진 사람 있다고 갑자사화로 가산 적몰하여 관부에 적게하고. 한양에서 연산군때 34살로 참형의 죽임을 당함. 종이 준비해 놨다고, 죄 없이 죽지 말고, 후일을 도모하고 피하자고 했는데도. 왕이 왕 답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피하지 안 했음. 1504년, 갑자년 10월 24일, 초경, 밤 8시에서 10시 사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 아들이 왔는가" "보고 싶다"하고 물었음. 처남 최명창(崔命昌)이 벼슬을 버리고, 시신을 거두어, 8월17일 먼저 별세한 부인 최씨와 합장해서 장례를 모심. 연산군이 물었는데. 형을 집행하는 내관에게 물었을 때는 "즐겁다” "내 아들이 왔는가" " 보고 싶다”라고 했다고 하고. 다시 의금부 낭청에게 물었을 때는 "내 아들이 왔는가” “보고 싶다”라고만 했다고 함. 같은 날 참형의 죽임을 당한 최부(崔溥)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고 하고. 연산군의금부 낭청에게 다시 물어서 "즐겁다"고 했는지. 안 했는지. 곧바로 말하지 않으면 고문해서 알아내게 했음. "즐겁다" 고 했으면, 남아 있는 가족들한테 죄를 더 줘야 되고. 글 읽는 선비들이 또 모인다고. (연산군일기 1504년 갑자 10월 25일) 김종직 문인. 중종반정 후 도승지 추증. 수(洙), 하(河), 강(江), 발(渤)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발(渤)은 넷째 숙부 생원공 타에게 양자 가고, 둘째 아들 하(河)는 다섯째 숙부 별에게 양자 감. 재사당공(再思堂) 휘 원( 黿) 묘갈(墓碣)을 미수 허목(許穆)이 찬한 것이 있다]. 타(李鼉. 사마시 진사. 갑자사화 후, 연좌로 성균관 생원 그만 두고, 벼슬 접고, 충청도에서 후학 양성. 중종 반정후 한양에서 불러도 안 감. 후손 형조판서. 생부 원). 별[李鼈.장육당. 갑자사화 때 형이 참형의 억울한 죽임을 당해서, 황해도에서 비가 와도 집에 가지 않고, 비를 맞고, 소 타고, 울고 불고, 장육당육가 지어서 부르고 다닌 사마시 진사. 마을 사람들이 장육당육가 따라 부르고, 마을 어른들은 이별 진사가 운다고 달랬음. 중종 반정후에도 황해도에서 나오지 않음. 6수 중 4수 만 남음.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진사(進士) 이별(李鼈)이 소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으로 먼저 내려온, 큰집 이지대(이제현 4대손. 이제현의 첫째 아들 이서종의 후손. 한성판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된 양동마을 이언적의 외고조부. 한양에서 내려올 때 은행나무를 가지고 와서 심었는데, 천연기념물 64호로 지정 되어 있다. ) 판윤공파 후손들과 양월방 월성 이씨됨.] 벽(李鼊. 사마시 진사). 경(李鯁.사마시 진사). 곤 (李鯤 막내). 집을 몇 채 살 수 있는 돈이지만, 그 돈으로 집을 안 사고, 소 달구지에 책을 싣고 내려옴. 내려 오다가 비가 와서 책을 반이나 버림.

시조 [편집]

사인증사의 (謝人贈簑衣) - 하위지가 그에게 증정한 시다.

도롱이 받은 것을 사례함-河緯地(하위지)

남아득실고유금(男兒得失古猶今) / 남자의 성공과 실패는 엣날과 지금이 같아


두상분명백일림(頭上分明白日臨) / 머리 위에는 준엄한 해가 빛나네


지증사의응유의(持贈簑衣應有意) / 도롱이를 보내준 뜻을 어찌 모를까


강호연우호상심(江湖煙雨好相尋[3]) / 강호에 물러나서 조용히 살 것을


제목 미상의 시 - 박팽년이 지은 시[4]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쫓을 건가.

기타 [편집]

왕조실록에 의하면 그의 형 박대년(朴大年)의 아내 윤씨(尹氏)는 해평(海平)의 거족이었다.[5]

처음에 박대년이 옥(獄)에 있으면서 정강이 피를 가지고 글을 지어서 옥졸에게 부쳐 주니, 이르기를, “원컨대 서로 잊지 말고, 사람으로 수치수러운 짓은 하지 말자.” 하였다. 윤씨가 조금 글자를 알아서 다시 글을 쓰기를, “밝은 해와 같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뒤에 공신(功臣) 봉석주(奉石柱)의 여종[婢]이 되었는데, 봉석주가 그 용모의 아름다움을 보고, 위세(威勢)로써 구속하고 좋은 말로써 돋구니, 윤씨가 즐겨 응락 하거늘, 봉석주가 사람을 시켜 맞이하는데, 윤씨가 아양을 떨며 말하기를, “타는 말이 준마(駿馬)가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 하니, 봉석주가 그가 탈 말을 바꾸어서 맞이하였다. 봉석주가 윤씨에게 말하기를, “네가 아직도 혈서(血書)를 생각하느냐?” 하니, 윤씨가 말하기를, “지금은 이미 잊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5]

형수 윤씨는 진무부위(進武副尉) 윤연령(尹延齡)과 고성박씨(지합천군사를 지낸 박취신(朴就新)의 딸)의 딸[6]로, 윤근수, 윤두수의 증대고모가 된다.

또한 중종 반정을 일으킨 박원종의 조부 박기소는 그와 8촌간이었다.

관련 항목 [편집]

주석 [편집]

  1. 글로벌 세계대백과》〈박팽년
  2.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hl=en&newwindow=1&q=cache:OkZrVER3SdUJ: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8891+%ED%95%B4%ED%8F%89%EC%9C%A4%EC%94%A8+%EB%B0%95%EB%8C%80%EB%85%84&ct=clnk
  3. 또는 오호연우호상심(五湖煙雨好相尋)
  4. '육신사', 사육신의 혈통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네 오마이뉴스 2011년 02월 08일자
  5.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4%89%EC%84%9D%EC%A3%BC&keyword=%EB%B4%89%EC%84%9D%EC%A3%BC
  6. 오음선대고성박씨묘표(梧陰先代固城朴氏墓表)

참고 문헌 [편집]

바깥 고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