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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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은 조선시대 초기의 왕족으로 조선 태종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 강정(剛靖). 세종, 효령대군의 친형이다. 좌의정에 증직된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1녀를 낳았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후손이었다. 양녕대군은 서예에 능하여 숭례문경회루 등의 현판에 이름을 썼다.

목차

[편집] 생애

1394년에 태어났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1] 1407년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품행이 자유분방하여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편집] 세자 폐위 배경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1] 첫째,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 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은 세자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멀리 떨어진 외방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양녕대군이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1]

[편집] 평가

김시양은 평가하기를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속마음을 감추고 이럭저럭 지내감으로 주위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여러 차례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였다. 또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매 세종이 여러 번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시니 형제간의 지극한 정의가 이를 데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1]

[편집] 바깥고리

[편집] 같이 보기

  1. 풍운아인가-처세의 달인인가 동아일보 마이다스, 박성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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