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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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출생 1607년
충청북도 옥천군
사망 1689년
제주
사인 사약을 받고 죽음
국적 조선
별명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송자(宋子)
학력 1633년 생원시 장원
직업 문신, 정치인
종교 유학
부모 송갑조
친척 송준길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1] 존칭은 송자(宋子).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소년기

1607년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는 마을 앞의 강물이 이유 없이 바싹 말랐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물이 불었다고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그 중의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아이를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시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송시열은 3세 때에 혼자서 이미 글자를 깨우쳤으며, 7세 때에는 그의 두 형이 읽은 글을 받아 적을 줄 알았다고 한다. 송갑조, 김장생의 문인으로 그 뒤로 송시열은 아버지 송갑조를 비롯하여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촌 숙질 간인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동문수학하였으며, 뛰어난 학문으로 노론(老論)의 쌍벽을 이루었다.[출처 필요]

[편집] 청년기

한편 그는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敬陵)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1635년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민족적 수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편집] 관직 생활

그 뒤 1649년(효종 1년) 인조의 뒤를 이어서 효종이 임금이 되자 송시열은 곧 어명을 받들어 다시 사헌부 장령에 등용하자,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1650년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49년 대제학 조경(趙絅)이 찬술한 《장릉지문》에 따르면,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이때 김자점은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청나라에 항거하려 한다고 하자, 청나라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 추궁하였고, 이에 송시열은 또 사임하고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다.[2]

1658년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1659년) 봄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효종의 병이 위독하여 당시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더불어 그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려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병상에 들어갔을 땐 이미 왕은 붕어한 뒤였다.

회덕의 우암고택

효종 다음의 현종도 그를 신임하여 숭록대부에 특진시키고, 이조 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시켰다. 이어서 1660년 좌참찬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다. 우찬성에 올랐을 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를 에워싸고 말썽이 일어나 그는 사임하고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윤선도(尹善道) 등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이 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허적이 물러가자 1672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그의 후임으로 김수항(金壽恒)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돌아갈 때의 대왕대비 복상 문제와 장지 문제는 항상 말썽의 대상이 되어 벼슬길도 평탄치 못하였다.

마침내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 때 이르러 덕원(德源)·웅천(熊川)·장기(長鬐)·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왔다.

[편집] 예송

이 부분의 본문은 예송입니다.

그 뒤 효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자 송시열은 중국의 주례에 따라 부모상에 자녀는 3년복, 자녀 중 장남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는 1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하여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을 주장하였으며,[3]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의례 참최장의 주석을 찾아서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고 본부인 소생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서자로 간주한다는 자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남인이 계속 정치 공세를 가하자 의례의 3년조의 소에 가통(家通)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 상복을 입지 않는 사유인 사종지설체이부정, 정이부체설을 찾아서 제출하였다.[4]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1675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남인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 송시열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 《석곡봉사》를 지어 올리며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고, 분노한 숙종은 송상민을 사사했다.[5]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고묘(종묘에 고하는 일)를 계속하여 주장하였다.[6]

[편집] 만년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 김익훈 등을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였던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인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후 금강산 지방을 여행하고 사표를 낸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충청도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또 이를 허락하였다.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5년 만에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편집] 평가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충청북도 청주화양서원,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편집] 비판

송시열은 학문에의 치적은 뛰어났으나, 선진 문물의 도입을 통한 국부의 축적의 중요성은 거의 외면하였고,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송시열을 합리적으로 설득해 조선이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국부를 축적하게 하지 못한 남인도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하기 힘들지만 송시열의 독단적인 문제는 조선을 풍요롭게 만들 수 없었고, 결국 조선이 19세기 근대화의 대변혁에 적응하지 못하고 1910년 끝나게 만든 책임은 송시열에게 있는 것이다.[출처 필요]

또한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 추진에 뛰어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후세 그의 제자들이 합리화한 것이고 사실은 북벌의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북벌 문제로 효종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여야 했고, 급기야 효종은 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병조의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송시열의 위선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아 고민하던 중, 때마침 효종이 급사하면서 일단락되었던 것이다.[7]

조선왕조실록에는 송시열이 북벌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없다.(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송시열이 효종과 북벌을 논의했다는 것은 송시열 본인만의 주장이다. 효종이 죽고 16년 후인 숙종 1년에 송시열은 유배 중이었다. 예송논쟁 중에 송시열은 효종은 인조의 서자이기 때문에 3년간 상복을 입어서는 안되고 상복을 1년만 입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송시열이 유배 중에 쓴 송서습유 제7권 악대설화에서 송시열은 효종과의 단독 면담(기해독대) 중에 북벌을 논의했다고 주장했으나, 유배중에 당사자로서 주장한 그것 하나가 유일한 북벌 관련 기록이다. [8] [9]

송시열의 문집인《송자대전》이나 《효종실록》등을 보아도 송시열이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준비에 대해 기술한 것이나 조정에 건의한 사례를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단지 북벌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조청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출처: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 하권 20쪽)

송시열은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록물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을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에 남겼다.

[편집] 저서

[편집] 가족

  • 외할아버지 : 지여해 (? ~ 1636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움
  • 아버지 : 송갑조(宋甲祚).
  • 송시열의 위로 형이 2명 있음.
  • 사촌형 : 송시형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35쪽, 263쪽.
  2.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관료의 재분열〉, 송시열.
  3.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40~241쪽.
  4.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41쪽.
  5.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50~251, 262~264쪽.
  6.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60~261쪽.
  7. 조선왕조 독살사건, 이덕일 저.
  8.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조선왕조실록
  9.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서


[편집] 관련 서적

  • 김선주, 《송자소전》 (김&정, 2005)
  • 《송자대전(전8권)(주문판매) (편집부 편 지음, 보경문화사, 1985)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00, 김영사)

[편집] 바깥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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