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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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출생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조선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사망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
조선 전라도 정읍군 태인
사인 사사(賜死), 객사
국적 조선
별칭 자는 영보, 초명은 성뢰, 성래, 호는 우암, 우재, 교산노부, 남간노수, 화양동주, 화양부자, 시호는 문정
별칭은 대로,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
학력 1633년 생원시 장원
직업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 시인, 서예가, 교육자, 작가
종교 유학(성리학)
배우자 한산 이씨
자녀 송기태(양자)
부모 송갑조(아버지), 곽씨(어머니), 지씨(계모), 이씨(서모)
친척 송준길(친족[1]), 윤선거(사돈), 권시(사돈), 윤증(사돈), 윤휴(사돈), 송이창(친족)
유교
사상
수기치인(修己治人)
(仁) · (義) · (禮)
(忠) · (孝)
인물
공자 · 칠십자 · 맹자 · 순자 ·
동중서 · 소옹 · 주돈이 · 장재 ·
정호 · 정이 · 주희 · 왕양명
경서
사서오경 · 십삼경
역사
내성파 · 숭례파
법치주의 · 법가
성선설 · 성악설
분서갱유 오경박사
훈고학 경학
현학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
관련 항목
삼공 · 서원 · 국자감 · 과거 ·
육예 ·
사대부 · 한국의 유교 · 한·당 시대의 사상 · 송·명 시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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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2]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의정부영의정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휴와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언급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아버지 송갑조

우암 송시열은 1607년 12월 30일(선조 40년 음력 11월 12일)에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九龍里)의 외갓집에서 사옹원 주부를 지낸 은진 송씨 송갑조와 곽자방의 딸 선산 곽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송시열의 어머니인 곽씨 부인은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얻어 그를 잉태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버지인 송갑조도 송시열이 나기 전날 밤에 마침 종가에 제사를 모시러 청산 땅에 머물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홀연히 공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그 중의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아이를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시오." 라고 말한 뒤 사라지는 꿈을 꿨다고 한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태어난 이후 꿈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보았다 하여 "이 아이는 성인이 주신 아들이다." 라고 하여 성인이 왔다는 뜻의 성뢰(聖賚), 성래(聖來)라는 이름의 아명을 지어줬다. 후에 시열(時烈)로 고쳤다.

송시열 묘와 묘비

유년기와 소년기[편집]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는 마을 앞의 강물이 이유 없이 바싹 말랐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물이 불었다고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그 중의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아이를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시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꿈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보았다 하여 성인이 왔다는 뜻의 성뢰(聖賚), 성래(聖來)를 그의 아명으로 하고 뒤에 시열로 이름을 고쳤다.

송시열은 3세 때에 혼자서 이미 글자를 깨우쳤으며, 기억력이 좋고 암기가 능하였으며 5세 무렵에는 스스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7세 때에는 그의 두 형이 읽은 글을 받아 적을 줄 알았다고 한다. 기억력이 비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8세에 친척인 송이창의 제자가 되어 친척이자 첫 스승 송이창의 아들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옥천에는 신령스럽고 괴이한 무당이 있었는데, 그가 무당이 살던 곳을 지날때면 떠들어대는 일을 하지 못하고 그를 피하였다. 그러면서 무당이 하는 말이 "이 도련님이 오시면 귀신이 바로 내리지 않는다" 라고 했다 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더욱 신통하게 보게 되었다.

한산이씨인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혼인했다. 이덕사는 이덕렴의 동생이고 이덕렴은 곽자방의 사위이니 송시열은 자신의 이모부 이덕렴에게 질여서(조카사위)도 된다.[3] 12세 때에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이이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수학과 학문 연구[편집]

청소년기[편집]

평생 존경하였던 송나라의 거유 주희

아버지 송갑조는 광해군 집권 이후 인목대피 폐모론이 나왔으나 그는 관직에 있지 않음에도 홀로 의리를 지켜 1618년 서궁(西宮)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찾아가 사은숙배한 후 안부를 묻는 등 이이첨, 정인홍의 폐모론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1618년말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을 출입하다가 발각되어 금고(禁錮)되어 낙향한다.

1618년 삭직되고 금고당한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웠다. 이때 부친은 우암에게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栗谷)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격려하면서, 주자, 이이(李珥), 조광조(趙光祖), 김시습(金時習) 등의 절의를 교훈삼아 본받도록 가르쳤다.

그 중 송시열은 주자의 예론에 깊이 공감하였는데, 이후 그는 주자를 평생 사표로 받들고 신념을 지켜나갔다.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편집]

스승 사계 김장생

송갑조, 김장생의 문인으로 그 뒤로 송시열은 아버지 송갑조, 사계 김장생,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등을 비롯하여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촌 숙질 간인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동문수학하였으며, 뛰어난 학문으로 노론(老論)의 쌍벽을 이루었다.[4]

1625년(인조 3년)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이때 송준길, 윤선거(尹宣擧), 유계(兪棨), 윤휴, 이유태(李惟泰) 등을 만난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결혼했는데, 부인 한산이씨는 고려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이때 만난 윤선거는 그의 친구였으나 병자호란을 계기로 관계가 악화된다. 윤휴는 당색을 초월한 절친한 친구였으나 이후 예송논쟁으로 정적으로 돌변한다. 이후 윤휴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는 윤선도, 허목을 편들면서 감정이 더해져 원수가 된다.

그는 김장생으로부터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가례(家禮)》 등을 배웠고, 1641년 김장생이 작고하자 다시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을 스승으로 받들고 수학하였는데, 이때부터 전적으로 주자의 글을 읽으며 주자의 예학대로 생활하였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솔직담백하였으며 꾸밈이 없었다. 또한 뒤에서 남의 흉허물을 하는 것을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고, 자신의 앞에서 타인의 흉허물을 보는 자를 질타하였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그의 성격은 정적을 많이 만들었고, 윤선거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참을 것을 권고한다. 한편 자신의 친척이자 오랜 동문인 송준길과 오랜 우의를 다져나갔다. 송시열은 송준길을, 송준길은 송시열을 서로 각별히 챙겨주었다.[5]

청년기[편집]

한편 그는 1633년(인조 11년)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바로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敬陵) 참봉이 되었으나 곧 1개월 만에 사직하였고, 1635년(인조 13년) 대군사부(師傅)가 되어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그는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조선의 현실을 금나라의 침략을 당한 남송과 같이 보았고, 주자의 사상이 이를 극복하는 해답이라 보았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언급하자 효종은 '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주자이십니까'라고 반문했다 한다.

그가 대군사부가 될 무렵 윤선도 역시 세자시강원에 부임, 대군사부에 임명되어 이때 윤선도를 다시 만나게 된다. 윤선도 역시 재야에 있을 때 이이첨 일파의 난행을 규탄했고, 왕자의 사부였으며, 북벌론을 주창했으나 당색이 남인인 탓에 주목받지 못했다. 같이 이이첨 탄핵과 왕자의 사부, 북벌론 주장 등을 하였음에도 주목받지 못하자, 윤선도는 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하는 봉림대군(효종)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 대신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그는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었다. 인조가 청태조를 알현하러 남한산성을 나섰을 때 송시열이 인조를 따라 나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편집]

제자 명재 윤증
친구이자 동문인 윤선거의 아들인 그는 후일 그의 정적이 된다.

병자호란이 종결된 후 1637년 화의(和議)가 성립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지만 그는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인질로 끌려갈 때에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봉림대군(효종)이 인질기간 8년 사이에 송시열과 서신을 교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화의로 크게 실망하여 이후 별제(別提), 용담 현령(龍潭縣令), 익위(翊衛), 지평(持平) 등에 임명되었지만 출사(出仕)하지 않고 모두 사퇴한 뒤 10여 년간 고향에 은거하며 강학(講學)과 교육, 독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문인으로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이 배출되었다.

첫째 딸은 대전 탄동에 사는 권유에게 시집보냈는데 권유는 우윤을 지낸 탄옹 권시의 아들이다. 송시열은 첫째 딸을 시집보내면서 계녀서(戒女書)를 써 주었다.[3] 이후 다른 딸들과 조카딸, 손녀딸, 외손녀, 종질녀 등이 시집갈 때 혹은 결혼 이후에 손수 계녀서를 써서 보냈고, 이해하기 쉬우라고 당시 언문으로 천대받던 한글로 친히 써서 보냈다. 또한 사자소학과 사서삼경의 내용 중 핵심 부분을 한글로 정리하여 출가녀들에게 보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부탁하였다.

관직 생활[편집]

북벌론의 추진과 실패[편집]

김자점의 난과 북벌론[편집]

그 뒤 1649년(효종 1년) 인조의 뒤를 이어서 효종이 임금이 되자 부름을 받았다. 송시열은 곧 어명을 받들어 다시 사헌부 장령에 등용되었고,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입대(入對)한 자리에서 13조목에 이르는 장문의 봉사(封事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개진하였다. 이 중 9개조는 주자의 〈정유봉사(丁酉封事)〉의 조목을 원용한 것인데 그 중에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대의를 담은 조목이 있다. 바로 “정사를 닦아 이적을 물리치라”(修政事以攘夷狄)는 조목을 통해 송시열은 복수설치를 시사하고 자신의 북벌론을 제시하였다.〈기축봉사〉에서 드러난 송시열의 북벌론의 성격은 그것이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의 춘추대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준길의 상소로 김자점(金自點)이 유배되자 위협을 느낀 당시 집권당인 서인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의 일파가, 효종이 신진 사림(新進士林)을 등용하여 북벌을 꾀하려 한다고 청나라에 밀고를 하였다. 그에 따라 청나라에서 한성부에 사신을 보내 엄중 문책한 뒤, 조선의 실정을 파악하고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하게 된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당원이었으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이후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북벌론 제창[편집]

1650년 김자점이 파직되고 김자점 일파가 숙청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49년 대제학 조경(趙絅)이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따르면,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이때 김자점은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청나라에 항거하려 한다고 하자, 청나라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 추궁하였고, 이에 송시열은 또 사임하고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다.[6]

윤휴가 사물의 이치를 주자만이 아느냐며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반론을 제기하였으나 윤휴를 설득할 수 없었다. 1653년(효종 4년) 황산서원에서 '윤휴의 주장'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윤선거 등과 함께 만났다. 이 때 윤선거가 윤휴를 은근히 두둔하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과거 윤선거병자호란 때 동지들과 아내는 모두 순절하였으나 홀로 살아서 탈출한 것을 경멸하던 송시열의 윤선거에 대한 태도는 격화되었다. 황산서원에서의 토론은 의미없이 종결되었다.

1653년 다시 효종의 부름을 받아 출사하였고, 청나라를 정벌하여 존주대의를 세워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해 3월에 충주 목사로 나갔다가 사직하였다. 1654년 사헌부집의(執義), 1655년 이조 참의 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하며 송준길 등과 강학과 후진 양성 및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1656년 윤 5월 스승 신독재 김집의 부고를 접하고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3개월간 상복을 입다. 스승 김집의 상을 탈상한 뒤에 다시 이조참의로 출사하였다.

1657년 찬선(贊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해 8월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 19조'를 건의하였다.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북벌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양민이 우선이고, 기강을 진작해야 하며, 군주의 사치를 억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5조에서 군정을 서두르지 말고 민심을 얻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민심의 원고는 부역의 번거로움 때문이고, 이는 용도의 무절제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쓸데없는 경비를 옮겨 양병의 자본으로 삼으면 오랑캐의 효시할 수 있다”하면서, “오늘의 급선무는 양민 · 양병하는 것”이라 하였다. 먼저 민생안정이 이루어지면 양병도 따라올 것이라는 의미이다. 14조에서는 “근본이 강하면 정신이 적을 대적할 수 있고, 강하지 않으면 재앙을 초래한다.”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기강이 해이함을 지적하였다. 특히 군률이 엄하지 않음을 걱정하면서, 금위군이 교만하고 사나우며, 항상 도성에 모여 있어 매우 온편 사리에 맞고 원만하다. 하지 않음을 언급하였다. 군주의 사치를 경계하는 부분은 여러 조항에서 보이고 있다. 대내의 공주의 저택이 호사스러움을 지적하며, 이러한 일은 효종이 와신상담의 뜻은 없고 안일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뜻 있는 자들의 맥이 풀려버릴 것을 걱정하며 군주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희빈, 공주들과 함께 풍성함과 사치를 즐김은 성상의 마음이 방탕한 바이며 아랫사람을 단속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또 산림에 은둔한 현사로 하여금 전하께서 원대한 염려를 잊은 것으로 의심하게 되어 대궐에 나가고 싶어하지 않게 하는 이유라 하였다. 여기서 산림을 언급한 것은 바꾸어 말하면 효정의 ‘원대한 염려’를 도울 이는 바로 산림세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북벌의 추진에 조야의 도움을 받으려면 군주의 검소함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효종의 사치함에 대한 질책은 재이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 천재(天災)와 지이(地異)를 아울러 이르는 말. 에 대한 군주의 책임전가에까지 미치고 있다. 〈정유봉사〉에서 송시열의 강조하는 바는 8조와 19조에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송시열은 〈기축봉사〉 에서와 마찬가지로 춘추대일통을 강조하면서, 대통이 분명하지 못하면 인도가 어지럽고, 인도가 어지러우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염려하며, 효종의 재위에 대해 "황천이 전하에게 신성한 왕위를 부여해 주신 이유는 장차 왕리를 잡아 인심을 바루고 왕도를 밝혀 민극(백성의 중도)을 세우며, 사설을 배척하며 사추(선비의 추향)를 통일시키도록 한 것입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공자 · 주자의 공을 이을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드러난 송시열의 강조점은 ‘인심’과 ‘왕도’ 그리고 ‘사추’에 있다. 효종의 재위는 양민하고 왕도정치를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며, 선비를 추향함으로써 정통의 설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송시열이 주자학을 신봉하는 골수 성리학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고, 효종의 통치는 왕도정치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사림정치의 도학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송시열의 저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북벌에 있어서도 성리학적 사상의 틀 안에서 관념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조에서는 “사욕을 극복하여 조정을 바로잡아야 하며, 회복에 뜻을 둔 자는 결코 손바닥을 치고 칼을 어루만지는 것에 뜻을 두지 않는다”고 한 〈기축봉사〉 의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이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또한 주자의 글속에 요순 · 공맹의 도가 담겨져 있음을 주장하며, “덕업을 높임으로써 황천이 크게 명한 마음과 선왕의 부탁한 뜻에 부응할 것”을 당부하였다. 즉 효종이 유념할 것은 군사력 강화가 아니라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니, 덕업을 쌓는데 매진하라는 것이다. 1658년 다시 찬선에 등용, 이조 참의, 예조 참판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특지(特旨)를 내리자 소명(召命)하여 상경하였다. 효종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이해 7월 6년 만에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왔고, 9월에 특명으로 차헌대부 이조판서로 승진, 10월효종이 특별 선물로 그에게 초피(貂皮) 모자를 주었다. 그는 황송한 것이라며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효종은 당상관에게 초피모자를 주는 전례를 들어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1659년에 효종이 갑자기 승하할 때까지 절대적인 신임 속에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황산서원과 동학사 모임[편집]

윤휴는 주희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오히려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의 오류를 찾아낸 윤휴는 자기가 새로 주석하여 가르친다거나, 주희의 학설이라도 틀릴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 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윤휴에게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나 윤휴는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송시열과 이유태는 이 문제를 두고 1653년 황산서원에서 동료 친구들을 모아서 이 문제를 토론한다. 여기에는 윤선거(尹宣擧), 권시, 유계(兪棨) 등이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년) 윤7월 송시열은 윤선거, 유계 등 10여명의 저명한 서인 학자들(대전 부근 지역 출신)과 황산서원(黃山書院, 논산 강경)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황산서원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송시열은 이 선현들 앞에서 윤휴를 단죄하려 한 것이다. 윤선거는 윤휴를 높이 보며, 그 학문이 높고 깊다고 했다. 반면 송시열은 윤휴가 사문난적과 같다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윤선거는 "우리는 경전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물(公物; 모두가 소유하는 것)인데, 그대는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도 못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고. 주자 이후에도 경전에 대하여 조금씩 주해한 것이 많이 있지 않는가" 라며 반박하였다. 윤선거의 반박에 송시열은 '주자가 논한 바는 그 이후 지금까지 한가지 이치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글자라도 흐린 것이 없다. 만일 여기에 의심이 있으면 주자의 글에 대하여 그 분명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 될 것이지 윤휴는 왜 마음대로 주자의 [중용] 주석의 일부를 버리고 자기 주장을 대신 내세우는가?" 윤선거 - "그것은 윤휴가 고명(高明)함이 지나쳐서 실수한 것이다." 송시열이 이에 격노하여 "그대는 주자가 윤휴만큼 고명하지 못하단 말인가? 윤휴가 도리어 주자보다 더 고명하단 말인가?'라며 따졌다. 이에 윤선거는 '내가 말한 '고명(高明)'이란 말은 실수이고, 윤휴가 주석 만든 것은 다만 경솔한 소치일 것이다'라며 해명하니 송시열은 내가 사문난적이라 한 것은 바로 그 '경솔함'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대는 윤휴의 재주와 기지가 특히 고명하다고 탄복하는데, (옛날 중국의 역적들인) 왕망, 동탁, 조조 같은 무리가 다 고명했으니, 윤휴도 그들과 같은 글-도둑이다. 그대도 그와 협조했으니, 이후에 만일 임금이 춘추의 법(春秋大義)에 따라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그대가 윤휴에 앞서 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강하게 나왔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윤선거윤휴와 결별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계속 윤휴와 교제하였고, 송시열과 이유태 등은 계룡산 동학사에서 또 한차례 친구 동료들을 모아 토론하였다. 송시열 윤선거 이유태 등 몇 사람은 다시 공주 동학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다시 윤휴에 대해서 종일 논쟁하다 해가 저물게 되었다. 이에 그날 저녁 토론이 끝나갈 무렵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길게 논쟁할 것 없다. 간단히 말해서,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한마디로 말하라며 추궁했다. 윤선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옳고 그름(是非) 보다도 흑백으로 본다면 주희는 백, 윤휴는 흑이며 음양(陰陽)으로 본다면 주희는 양, 윤휴는 음이다." 라고 말하고, 이어 윤휴는 음이니 절교를 하겠다고 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에 이유태는 윤선거가 원래 비겁한 사람으로, 오늘 그의 대답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1655년 봄에 윤선거가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서, 흑백론-음양론은 표현상 그런 것이고, 윤휴의 인격을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했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해서 풀기 어려운 악감정을 가졌다. 그리고 송시열은 윤선거를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경계하게 되었다.

북벌준비 계획과 실패[편집]
효종이 그에게 내린 담비가죽 옷

1658년(효종 9) 12월 10일 효종은 송시열을 은밀히 불러 초구(貂裘:담비 가죽으로 지은 옷)를 내려 주었다.[7] 송시열은 임금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거듭 사양하자, 요하와 북경에서 함께 말달릴 때 입으라며 송시열에게 앞으로 큰 임무를 맡길 것임을 암시하고, 효종의 북벌사업에 동참할 의사가 있는지 떠 보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불세(佛世) 부처 스스로가 교화하는 시대. 의 공을 세우기는 쉬워도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보존하기는 어려우며, 중원의 오랑캐를 물리치기는 쉬우나 자기 한 몸의 사의를 제거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이것은 주자가 당시 인군에게 말씀한 지론입니다.” 라며 효종방식의 북벌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효종은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나의 책무이다. 나와 함께 이 일을 수행할 자는 경이 아니고 누구겠는가.”라며 송시열을 달래고 있다.


1659년 3월 효종은 송시열을 은밀히 불러들이면서 승지사관과 내시 등 늘 임금 곁에 붙어서서 수종하는 벼슬아치들을 모두 내보냈다. 이처럼 임금과 신하 단 둘이 만나는 것을 독대(獨對)라 하는데, 경국대전에 임금은 어떤 경우라도 독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다.[7] 효종은 규정을 어겼다는 비난을 감수하며서까지 독대를 하였다.[7] 이 자리에서 효종은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송시열이 기록하여 남긴 것이 〈악대설화〉이다. 북벌에 대해 효종과 송시열간에 구체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이날의 독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모든 신하들이 군비 확충의 중지를 바라지만 내 굳이 듣지 않음은 천시와 인사가 어느 날에 좋은 기회가 올지 모르[7]기 때문에 정병의 포수 10만을 양성하여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 모두 용감히 죽을 수 있는 사졸을 만들려 함이오.[8] 그런 뒤에 틈을 기다려 저들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내달아 곧바로 저들 관문 밖에 이르면 중국의 의사 호걸들 가운데 어찌 응하는 자가 없으리요?
관문 밖에 이르는 것은 아주 쉽소. 오랑캐는 무비를 일삼지 않아 요동, 심양 천리에 활 잡고 말 탄 자가 없어서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 같을 것이오. 또 오랑캐가 우리나라 세폐를 요동과 심양에 쌓아 두었으니 하늘의 뜻은 도로 우리가 쓰라는 것 같고, 포로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몇만 명인지 모르나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오직 실행하지 않음을 근심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려움은 근심할 것이 아니오.(송서습유).[8]

송시열은 양병을 위해서는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하였으며, 기강의 확립을 위해서는 군주의 사심을 없애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9] 이 말은 결국 북벌을 반대하는 논의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일로 신하들이 임금이 송시열과 '독대'한 것에 대해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들고 나와 오히려 분란의 빌미만 제공하고 말았다. 효종은 세자를 시켜 은밀하게 송시열에게 비밀편지를 보내는 등 은밀하게 상의를 거듭하였다.[9]

이 시기에 효종은 그에게 친히 초모(貂帽), 초구(貂裘) 등을 계속 송시열에게 하사하여 자신의 북벌 의지를 보이며 특별한 기대를 갖기도 한다. 그는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1659년) 봄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효종의 병이 위독하여 당시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더불어 그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려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병상에 들어갔을 땐 이미 왕은 붕어한 뒤였다.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효종이 갑자기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소현세자 일가 복위 여론[편집]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할 당시 산림에 있던 재야 서인들은 소현세자세자빈 강씨 등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확신한다. 결국 재야의 산림 서인들은 소현세자의 복위 여론을 주청한다.

효종 즉위 초부터 송시열은 송준길과 함께 소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공론화시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서인의 당론으로 채택, 1651년(효종 2년) 김홍욱이 주장한 바와 같이 서인은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억울하게 희생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효종은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이를 벌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1차 예송 당시 윤선도남인에 의해 효종의 정통을 부인하려는 행위로 몰리게 된다.

서인에서는 당론으로 소현세자 일가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으로 규정했다. 그는 효종 즉위 초부터 소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언급했고, 뒤에 남인에서는 이를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처럼 몰고갔다. 그러나 남인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민회빈 강씨숙종때 송시열 등의 거듭된 주청으로 복위된다. 또한 구언에 의해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복권을 주장했다가 사형당한 김홍욱에 대한 포증도 계속 청원하였다.

숙종 초 송시열은 다시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김수항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10] 그 뒤 그와 김수항이 죽고 1718년 숙종소현세자빈 강씨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강씨가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

1차 예송 논쟁[편집]

제1차 예송 논쟁[편집]
미수 허목
(윤선도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3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그 뒤 효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자 윤휴(尹鑴) 등 남인은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하였고 우암은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다. 이를 예송(禮訟) 논쟁이라 한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11]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11]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11]

송시열은 중국의 주례에 따라 부모상에 자녀는 3년복, 자녀 중 장남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는 1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하여 기년설(만 1년설)을 주장하였으며,[12]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의례 참최장의 주석을 찾아서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고 본부인 소생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서자로 간주한다는 자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남인이 그가 왕통과 종통을 나누려 한다고 공세를 가하자 그는 일단 이론으로 접수했다. 남인이 계속 정치 공세를 가하자 의례의 3년조의 소에 가통(家通)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 상복을 입지 않는 사유인 사종지설체이부정(體而不正), 정이부체(正而不體)설을 찾아서 제출하였다.[13]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대명률(大明律)》,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근거로 한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르도록 한다.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이때 남인 허목은 송시열의 주장에 반박하여 왕가의 예는 일반 사대부와 같을수 없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예를 논함에 있어서 성역이 있을 수 없다고 맞받아쳤다.

남인의 공세[편집]

1660년 4월 호군 윤선도허목을 변호하면서 송시열이 종통과 적통을 분리하려 한다며 사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종묘와 사직을 관장하는 임금(효종)에게 돌려보내고 적통(嫡通)은 기왕에 죽은 장자(소현세자)에게 돌려보내니 종통과 적통을 어찌 두 가지로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명령(父詔)과 왕명을 받았어도 정통이라고 하지 못한다면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가짜 황제란 말입니까? 고공(古公)이 비록 계력을 세웠더라도 고공의 정통은 오히려 태백(太伯)의 자손에게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다면 국인(國人)이 뜻을 바르게 정하지 못할 것이요, 나아가 계력의 자손들을 어떻게 보존하자는 말입니까?.[14]

윤선도는 기년복 주장의 논리상의 오류를 지적하며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세력이 복상 문제를 기회로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몰아 제거하려 했다.[15] 즉, 이종비주(二宗卑主, 종통과 적통을 분리해 임금을 비하시킴)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15] 그는 평소 송시열의 체이부정(體而不正)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처형 주장은 서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윤선도와 등은 예송 논쟁 때 송시열과 송준길효종에게 소현세자빈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하고, 윤휴 등도 이에 동조했다. 윤선도는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허목 등도 그가 불경한 의도로 체이부정(體而不正)을 주장했다며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은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과 송준길윤선도, 허목, 윤휴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송시열은 남인을 당이 다른 사대부로 인식하였으나, 자신을 사형시키라는 탄핵상소를 접하게 되면서 이후 남인을 위붕(僞朋)으로 규정하고 대립하게 된다.

정쟁으로 비화[편집]
남인의 영수 묵재 허적
(민유중, 민정중의 아버지 민광훈의 고종사촌 동생으로 남인 중 그의 사형을 반대하던 몇안되는 인사였다.)

1차 예송논쟁은 송시열의 승리로 끝났지만, 예송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사이에 둔 당쟁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의 주장에 패한 후 남인은 송시열이 종통(왕실)과 적통(적서, 가통)을 구별하려 한다며 송시열의 사상이 불순하다며 공격했다. 이후 윤선도가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한 이후, 허목 등이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했다. 남인은 그를 사형시켜야 된다며 비난했고, 처음 남인의 주장을 사상의 문제, 학문의 문제, 이념의 차이로 인정하고 접수했던 송시열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남인의 정치공세에 분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구(國舅)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 일가와 알력이 깊어지고, 현종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했으나, 우찬성에 재직중이던 1660년 효종의 장지를 잘못 잡았다는 비판이 다시 나타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찾았고, 송시열은 현종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올라온다. 이후 현종 재위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관직의 제수가 있었지만 사양하고, 야인의 신분으로 자문하였다.

학문 논쟁에서 출발한 예송 논쟁남인이 정치공세로 비화, 자신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하자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허목(許穆) 등은 노골적으로 송시열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송시열은 윤휴(尹鑴)는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허목은 독물(毒物)이라 불렀다.

1666년 12월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다. 1668년(현종 9년) 2월 의정부우의정에 임명되자 곧 사직하였으나 간곡한 임금의 부름에 따라 상경하였다. 곧 사은숙배하고 부임하였으나, 남인 출신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갈등과 불화로 곧 사퇴하고 낙향한다. 1671년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자 좌의정 허적과 계속 마찰을 빚었는데도 현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머물러 있다,

한편 그는 여성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며느리와 딸에게도 꾸준히 한글로 간찰을 보내며 연락을 하는 한편 한글로 서신과 간단한 서책을 엮어 교훈으로 삼도록 지도하였다.

1차 예송 논쟁의 후폭풍[편집]

윤선도를 옹호했던 권시가 파직되자, 윤선거의 형이자 송시열의 사돈인 윤문거[16]가 사직소를 올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교리 이익(李翊) 등이 송시열을 떠나게 되었고, 재야 사림들도 허목윤휴 쪽으로 여론이 많이 기울어졌다.[17]

여기에 삼조의 노신이요 판중추를 지낸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옹호하고 그의 상소를 태워버린 것은 잘못이라는 상소를 올려 이에 가세했다. 조경의 상소는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다. 송시열이유태, 그리고 부제학 유계 등은 조경을 공격했으나, 영상 정태화와 좌상 심지원(沈之源), 그리고 대사간 조수익(趙壽益) 등은 조경을 옹호했다.[17] 조경은 관직을 내놓고 재야에 물러나 있었는데 반대파들은 그를 삭직해서 내쫓자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모두 물러나겠다고 강경하게 대응했다.[17]

송시열은 조경을 삭탈관직하라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골로 내려가겠다면서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17]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남인 유생들의 윤선도 구명 운동이 계속 일어나 조정에서 끝난 예송 논쟁은 지방 유생들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15] 결국 이러한 1차 예송 논쟁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석견이 죽자 일단락되고, 서인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5]

남인과의 갈등[편집]
회덕의 남간정사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회덕의 우암고택

1659년 윤휴 등을 경연관의 적임자로 추천한다. 송시열이 윤휴를 천거하자 이후원은 후에 화를 입을 것이라며 윤휴를 추천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이유태는 윤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추천하는 일은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 이후원이유태가 여러 차례 만류했음에도 송시열은 윤휴를 경연관으로서의 적임자라고 계속 추천한다.

효종 다음의 현종(顯宗)도 세자시절의 스승인 그를 신임하여 숭록대부에 특진시키고, 이조 판서판의금부사, 지경연사를 겸임시켰다. 이어서 1660년의정부좌참찬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다. 1661년(현종 2년) 윤선도(尹善道)가 유배된 삼수는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허목 등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남인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잔인하다며 성토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그 뒤 3월 의정부우찬성에 올랐을 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를 에워싸고 말썽이 일어나 그는 사임하고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南人)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그해 병조판서, 이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662년 금강산을 여행하고 돌아오다가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애통해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55년 3월에 송강 정철의 후손과 상의하여 정철의 묘소를 충북 진천으로 이장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그해 원자(元子)의 탄생을 하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목의 공격을 받았다.[18]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허적이 물러가자 1672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그의 후임으로 김수항(金壽恒)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돌아갈 때의 대왕대비 복상 문제와 장지 문제는 항상 말썽의 대상이 되어 벼슬길도 평탄치 못하였다.

1669년 윤선거가 그에게 남인과 화해를 청하며 "예론(禮論)에 관계된 윤휴(尹鑴)·허목(許穆) 등과 화해하여 그들이 감복하게 해야 한다." 며 그들을 등용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윤증과의 관계[편집]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에서 (윤선거의 아들은)윤휴(1617~1680/남원 尹)가 아니고 윤증(1629~1714/파평 尹)이 맞습니다.즉 윤증의 아버지가 윤선거입니다. 참고 윤휴의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입니다.

친구 윤휴
(당색을 초월한 친구였으나, 예송 논쟁 때 정적으로 변신한다.)

윤휴는 종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 <대학> <효경>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19] 송시열은 처음에 윤휴의 의견을 이설로서 받아들였다.

윤휴는 주자의 해석을 그르다 하고, 장구를 멋대로 고쳤다. 심지어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하는 말로 주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19] 그러나 그의 사상이 과격하다고 본 송시열은 그를 설득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직접 찾아가 설득해 보고, 편지로 달래 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우암은 격분한 나머지 백호를 사문난적(斯文亂賊[19])이라며 규탄했다.

예송 논쟁이 격화되면서 그의 오랜 친구였던 윤휴는 참최복을 주장했고, 역시 같은 3년복을 주장한 같은 남인윤선도의 편을 들었다. 그가 3년복을 지지한 것은 당론때문이었다고 해도, 송시열을 죽이자고 거듭 주장한 윤선도허목하고 어울려 지내자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그는 윤휴와도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원시유학으로 돌아가자는 의견 중 윤휴가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알수 있느냐며 항변한 것이 송시열을 심히 불쾌하게 했다. 윤휴허목, 윤선도와 함께 서인 및 송시열에 대한 공세를 하자 그는 윤휴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윤휴중용의 주석을 놓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주자의 주석에 오류[20]가 많다고 선언했다. 윤휴는 서슴없이 자기 주장을 펴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큰소리쳤다.[21] 이 소리가 송시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송시열은 고향 회덕에서 가까운 논산군 연산의 황산서원을 찾아갔다. 여기에서 윤선거를 만났다. 송시열은 두 사람이 잘 어울려 지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윤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適)이오. 혈기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죄를 성토해야 하거니와 춘추의 법에 따르면 난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붙좇는 무리부터 다스리라고 하였으니 참임금이 일어난다면 그대가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오.[21]

송시열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미칠지라도 윤휴를 배척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19]", "만약 (내가) 윤휴의 손에 죽는다면 더 이상 영광이 없다.[19]"며 윤휴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게 된다. 허목은 유교만이 진실을 알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하였고, 윤휴성리학이나 주자의 주해만이 진실을 바라보는 열쇠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어느 강의에서 윤휴는 사서육경에서 정주가 달아놓은 주해를 삭제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해석했고 이는 송시열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2차 예송 논쟁[편집]

북벌론의 재개[편집]

1672년 동문수학한 친구이자 외6촌 형인 송준길이 사망하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1674년부터 허적윤휴 중심으로 북벌론이 계획되었다. 김석주 역시 북벌론 재개에 지지 의사를 표했고 곧 체부(도체찰사부) 부활과 만과 설치, 병력 선발 등의 안이 건의되었다. 유배소에 있으면서도 이 점에는 깊이 공감하고 지원하라는 글을 문하들에게 보낸다.

서인, 남인의 당론이 일치하면서 일시적으로 통합이 가능하였으나 남인의 당수였던 허목이 불가함을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 장정을 많이 징발하면 국가의 일꾼이 없어진다는 것과 청나라는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에다가 국론까지 분열되었는데 상대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남인 강경파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북벌론은 다시 묻혀진다. 결국 그는 같은 남인이던 윤휴의 북벌론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북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제2차 예송 논쟁[편집]

1673년 허적의 후임으로 의정부좌의정이 된다.

1674년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의 거듭된 공격으로 1675년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독서와 성리학 연구와 사물의 현상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사람이 없어도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삼가고 조심하며 한결같이 행동했다. 변방의 오지는 교통편이 불편하여 교육과 문화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외지의 백성들에게 공자, 맹자의 가르침, 주자의 가르침과 예학, 인간의 도리를 강의하였다.

학문의 연구는 진리를 찾는 길이라는 신념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그가 유배되는 유배지에는 위리안치의 예에 따라 가시울타리가 쳐져있었음에도, 양반 사대부와 평민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의식있는 선비와 평민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신분에 구애됨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숙종의 즉위와 석방[편집]
동춘당의 현판
(송준길을 추모하면서 쓴 현판)

마침내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 즉위에 이르러 영중추(領中樞)로 복직했다. 1674년 8월 23일 성균관 유생 이심 등은 송시열이 ‘덕을 쌓은 유학의 종주(宿德儒宗)’라면서 “현자(賢者)의 진퇴는 구차스럽게 할 수 없지만 군주의 정성스러운 예절이 어떠한가에도 달려 있다”며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고 상소했다. 같은 날 전 영의정 김수흥과 그를 구원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던 간관(諫官)들에 대한 처벌도 모두 무효화되었다.[22]

8월 24일에는 숙종이 가주서(假注書) 이윤(李綸)을 보냈으나 송시열은 이미 서울을 떠나 버린 뒤였다. 이윤이 뒤따라가 국왕의 말을 전했음에도 광주(廣州)를 거쳐 수원으로 가 버렸다. 숙종은 송시열을 거듭 타이르면서 현종의 능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송시열은 모두 거부했다.[22]

얼마 전 여러 신하들이 득죄(得罪)한 것은 그 근원이 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을 벌할 때 신의 죄상이 여러 번 전교에 나왔지만 특별히 그 성명을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8일).[22]

그 뒤 숙종은 그에게 다시한번 승지를 보냈으나 거절한다. 그 대신 그의 문인 이단하에게 현종의 묘지를 짓게 한다.

숙종과의 갈등, 유배[편집]

86세 무렵 초상화 (1683년)
(효종이 선물로 준 털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이후 영중추부사를 거쳐 9월 17일 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1675년(숙종 1년) 1월 13일 함경남도 덕원(德源)에 유배된 이후 이해 6월에 남인 삼사의 맹공을 받아 경상도 장기(長鬐)로 이배(移配)되었고, 1677년(숙종 3년) 3월에는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에서 부인 이씨(李氏)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덕원·웅천(熊川)·장기(長鬐)·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왔다.

1675년 5월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이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22] 그러나 허목은 형량을 가중해 송시열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22] 그러나 허목의 상소 이후 남인계열의 성균관유생, 재지인사들에 의해 송시열의 사형를 청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남인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 송시열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 《석곡봉사》를 지어 올리며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고, 분노한 숙종은 송상민사사했다.[23]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고묘(종묘에 고하는 일)를 계속하여 주장하였다.[24] 한편 송시열이 유배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서인계 유생들이 송시열의 차자기년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25]

유배지에서도 위리안치된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대부와 평민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는 위리안치의 신분이었으나 가르침을 청하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한자를 모르는 아녀자들을 위해 '사서삼경'과 '주자가례'를 한글로 번역하여 집필하기도 했다.[26]

한편 그는 김수항과 함께 김종직의 포상을 줄곧 주청하여, 1694년(숙종 20년) 영의정으로 추증하게 하였는데 비록 그는 생전에 김종직추증포상을 보지 못한다.

생애 후반[편집]

윤증과의 갈등[편집]

윤선거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우암의 제자인 윤증은 묘지명을 친히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는 윤선거의 피난을 못마땅히 여기며 비꼬았고 이는 회니시비의 원인이 된다. 한편 그는 생전의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윤선거윤휴와 계속 만났고, 윤휴는 나중에 아버지를 추도하는 제문이라며 윤증에게 제문을 보낸다.

송시열과의 관계상 받지 않으려다 받았지만 제문은 윤선거가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윤증윤휴의 추도사를 받고 탄식했다 한다.

노,소 분당[편집]

제자 윤증
(회니 논쟁과 허새의 무옥을 계기로 그와 결별한다.)
송시열 영정(1680년경)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1680년 6월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바로 그해 10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 겸 영경연사로 기용되었다가[27] 1683년(숙종 9년) 고령을 이유로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冑), 김익훈 등을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김석주김익훈허견의 옥사남인에게 지나친 처벌을 가한 뒤, 역모를 날조하여 허영, 허새를 역모로 몰아 죽인 뒤 허새의 옥사를 날조한다.

처음에 송시열은 김익훈허새의 옥사를 날조하여 죄없는 남인 인사를 죽인 소식을 듣고 처벌에 찬성하였으나, 김석주의 설득으로 의견을 번복하고 김익훈의 편을 든다. 이때 서인 내부의 소장파와 청년층이 그에게 실망하여 돌아섰다. 그 중에서도 제자였던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인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76세 때의 송시열 (1683년)

김익훈남인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허영허새의 역모 사건을 날조했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자 처음에 그는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며 분노하였으나, 김석주 등의 말을 듣고는 머뭇거렸다. 한성부 입경 초 그는 김익훈의 처벌을 주저하다가 태조 이성계의 존호 추상 문제를 먼저 언급하며 유보를 보이다가 그 뒤 신념을 바꾸어 김익훈을 옹호했다. 그가 자신의 스승인 김장생의 후손이니 목숨만은 구명해달라는 것이었다. 김익훈의 처벌을 원하던 서인 내 청년층은 실망, 반발하게 된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였다.

우선 그의 지지자였던 김수항의 처남 나량좌가 실망했다는 발언과 함께 그에게 등을 돌렸고, 윤증, 박세당을 비롯하여 서인 중진들 중에도 등을 돌리는 이가 나타났다.

만년[편집]

그 후 금강산 지방을 여행하고 사표를 낸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충청도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1688년 희빈 장씨가 숙종의 아들을 낳자 1689년 1월 이를 원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숙종의 눈밖에 났다. 또한 희빈 장씨의 아들 왕자 균이 왕세자가 책봉되자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때 남인들은 다시 그를 죽여야 된다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또 이를 허락하였다. 제주도에서 나온 그는 광양에 이르러 수제자인 권상하 등이 영접하였다. 육지에 당도한 송시열은 자신은 올바른 길을 가려다가 죽는 것이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밝혔고 수많은 문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가 한성부까지 상경하는 길을 시종하였다. 그는 신발이나 우마를 타지 않고 한성부까지 걸어서 도보로 올라왔다.

그가 전라남도 장성군을 지날 무렵 김수항의 아들들과 측근들이 그에게 찾아왔다. 이미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김수항이 유언을 남겨 '우암 선생이 나보다 나중에 돌아가시게 되면 내 묘지명과 비문을 꼭 우암 선생에게 부탁해달라'고 했고, 그 유언을 김수항의 사람들에게서 전해듣자 송시열은 즉시 묘비문을 써내려갔다. 자신도 죽음이 임박했다 하여 대충 쓰지 않고 몇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김수항은 도리와 정도를 지키려 했고 온화한 손길을 내밀었는데 사도(邪道)에 물든 자들은 그 손마저 거절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수항의 아들과 측근에게 묘비문을 지어서 준 뒤 다시 발걸음을 계속하여 전라북도 정읍군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가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국문시켰을 때의 파장을 우려한 숙종은 그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에게는 수암 권상하, 이단하, 민정중, 민시중, 김수항, 명재 윤증, 민유중, 김창협(金昌協), 김익훈, 송규렴, 직재 이기홍, 장암 정호 등의 문인들이 있었고 9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권상하는 한때 그의 수제자로 손꼽히던 명재 윤증이 그와 등을 돌린 뒤 그의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사사 (賜死)[편집]

우암 송시열 전신상
(1683년본)

남인은 그를 한성부로 압송해 국문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인 정승인 의정부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숱한 논란의 중심에 있던 83세의 노구(老軀)는 결국 사형으로 끝났다. 9년 전 허적과 윤휴의 사형을 남인들이 정치보복으로 여긴 것처럼 김수항과 송시열의 사형 역시 서인들은 정치보복으로 여겼다.[28] 지도자를 잃은 남인이었지만 송시열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은 계속되었다. 그는 의금부에 가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죽으리라고 장담하였다.

6월 3일 육지에 도착하자 수많은 문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죽림촌사에서 자손들과 질손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썼다.


아래는 그 유서 내용이다.

주자(朱子)는 음양(陰陽)·의리(義利)·백흑(白黑)을 판단하는 데 있어 용감하고도 엄격하기가 마치 한 칼로 두 조각을 내듯 하여

감히 조금도 의위(依違 마음이 확정되지 않아 이럴까 저럴까하는 것)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의 일이다.
이러했기 때문에 그가 끝내 아성(亞聖)의 지위에 이르러 만 길이나 되는 굳은 절벽과 같은 자세로 공(功)이 만세에 미쳤으니,
도리어 자사(子思)·맹자(孟子)보다도 더 훌륭한 점이 있다. 그러나 지성으로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함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이 바로 《대학》에서 격물(格物)·치지(致知)를 반드시 먼저 가르친 이유이다.
대체로 선·악의 사이에 의위(依違)하는 자는 끝내 반드시 음(陰)과 리(利)와 흑(黑)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대개 인정(人情)이 이를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의[義]와 리[利]가 있으며, 물건에는 백과 흑이 있는데,(음-양, 흑-백은《논어論語》의‘자리가 바르지 못함[席不正]’과,
《소학小學》의‘사악한 맛[邪味]’을 가리킴) 이는 일상생활 속에 늘 서로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여라. 엎어진 전철(前轍)을 가까이서 보면 두려운 마음이
더욱 깊은 법이니, 너희들은 이윤(尼尹; 윤선거)을 보지 않았느냐. 흑수(黑水; 윤휴)가 주자(朱子)를 공척(攻斥)할 때에, 윤선거가 처음에는 대체로 이리저리 망설이다
가 끝내 그와 심신(心神)이 융회(融會)되어 겉으로는 배억(排抑)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를 도와 세력을 이루어서 마침내는 큰 화(禍)가 하늘에 창일하고
가국(家國)이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죽도록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털끝만큼의 어긋난 것도 나중에는 천리 거리만큼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더구나 처음부터 크게 어긋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그 사람[渠 윤선거]인들
종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는 변변치 못한 하찮은 사람으로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한 일을 본받아,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든지 그를 죄줄 수 있다는 교훈을 
독실히 믿은(篤信)한 소치로 결국 유배되는 참사(慘事)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주: '黑水'(검은 물)는 여강(驪江)을 비하하는
말이다. 여강 가에 살았던 윤휴를 욕하는 말이다. 송시열의 지독한 증오심이 담긴 말이다.)
대체로 흑수(黑水)는 ‘공자(孔子)의 이름도 못 부를 것(諱)이 없다.’ 하였고, 주자를 공척하는 것을 사업(事業)으로 삼았으며, "자식으로서도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다" 하여 성모(聖母; 현종顯宗의 비妃이며 숙종肅宗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헐뜯고 공격(侵毁)하였다. 그 여파가 서로 서로 이어져 마침내는 공자를
조롱하고 업신여긴[譏侮] 말을 시제(試題)로 삼아 대성전(大成殿) 아래 내거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효묘(孝廟)의 세실(世室)을 너무 빨리 작성했다고 칭탁하여 기의(譏議)를 하였고, 성모(聖母)도 재차 비방을 입어 선인(宣仁)의 화(禍)가 있게 되었으며,
양현(兩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성무(聖廡; 문묘文廟)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성모를 높여 두둔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하였고,
타우(打愚, 이상李翔)는, 흑수(黑水)가 윤이흠(尹以欽)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게 여기다가 방금 투옥(投獄)되었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의
폐모(廢母)를 극력 찬성했던 자는 은혜를 입어 방환(放還)되었고, 그리고 감히 말하지 못할 대사(大事)는 또한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진정 이때에 죽었더라면
이것이 욕(辱)이 될지, 당연한 일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주자가 선성(先聖, 공자)의 소상(塑像)이 허리가 끊기고,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도학(道學)이 금제(禁制)를 받는 때를 당했을 적에, 주자를 베 죽이자는
소장(疏章)이 끝내 한탁주(당시의 권력자, 주희를 탄압함)의 무리에게서 나왔고, 조자직(趙子直; 송宋의 재상 조여우趙汝愚)·여자약(呂子約; 여조검呂祖儉)·
채계통(蔡季通, 채원정蔡元定; 이상 둘은 주희의 친구) 등 제현(諸賢)이 서로 이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주자 문인(門人) 중에는 혹 안면(顔面)을 바꾸어
(한탁주 편에 붙어) 과거(科擧)를 보기도 하였다. 어떤 이가 주자에게 화를 당하지 말고 남몰래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우회적으로 충고(諷諫)하자, 주자가,

"내가 만일 만 길이나 되는 절벽처럼 굳게 서 있다면 어찌 우리 도(道)를 빛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우돈장(遇遯章; 한탁주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문)을 지었는데, (길흉을 점쳐 보고, 죽을까 두려워) 비록 이 글을 상소하지는 못하였지만 오히려
(짓고 나니) "가슴 속이 후련하다." 하였으니, 결코 후회하지 않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체로 주자의 학문은 이치를 궁구하고 심성(心性)을 존양(存養)하여 이를 몸으로 실천해서 확충(擴充)시키는 것을 주(主)로 삼고, 공경[敬]으로써
시종(始終)을 통관(通貫)하는 공(功)으로 삼았던바, 임종시(臨終時)에 이르러 문인(門人)에게 진결(眞訣)을 주었으니, 즉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내는 것과 성인(聖人)이 만사(萬事)에 대응하는 것은 곧음[直]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문인이 또 청(請)했을 때는,
"도리(道理)가 다만 이러할 뿐이니, 모름지기 괴로움을 극복하고 굳게 지켜야 한다."하였다. 대체로 공자는,
"사람이 사는 것은 곧음뿐인데, 곧지 못하게 사는 것은 요행히 재앙을 면한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맹자가 호연(浩然)의 기(氣)를 기른 것도 다만 이 직(直) 한 글자뿐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자·맹자·주자 세 성인이 똑같은 법칙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어서 이치에 밝지 못하면 곧지 못한 것을 곧게 여기는 자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문(師門)의 교훈은 이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선덕(先德 조상의 덕)으로 말하자면, 유씨(柳氏) 할머니가 어린 시절 굳은 절행(節行)을 지킨 일과, 쌍청부군(雙淸府君, 송유宋愉)이 자취를 감추고 
은둔한 일과, 서부부군(西阜府君, 송귀수宋龜壽)이 금조(禽鳥) 같은 미물을 감동시킨 효성과, 문충공(文忠公)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선생이 목숨을 버리고
충성을 다한 것과, 이씨(李氏) 할머니가 얼첩(孽妾)을 사절한 일과, 습정(習靜, 송방조宋邦祚) 선생이 간흉(奸兇)한 무리를 척절(斥絶)하다가 비명횡사한 일과,
나의 선부군(先府君)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 선생이 몸을 돌보지 않고 절개를 세워 포전(褒典)이 빛난 것과, 충현공(忠顯公)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이
대의(大義)를 부식(扶植)하여 백세를 용동시킨 일 등은 모두가 주문(朱門; 주자의 문하)의 정법(正法)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아, 너희들은 힘써야 한다.

법도(法度)를 가까운 데서 보면 공(功)을 거두기가 쉬운 것이니, 너희들이 모름지기 가까이는 선덕(先德)을 지키고 멀리는 주문(朱門)을 본받는다면,
나는 죽더라도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숭정(崇禎) 기사년(1689, 숙종15) 6월 3일에 선암(仙巖)의 죽림촌사(竹林村舍)에서 쓰다.

수제자이자 계승자인 권상하

국문 받기 위해 상경하던 6월 3일 정읍에서 만난 금부도사가 건넨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제주도를 나와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28] 곧이어 권상하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과 의복을 그에게 유품으로 물려주었다.

6월 3일 도성에 3배를 올린 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당시 그의 나이 87세였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솔직담백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장희빈의 왕비 책봉과 폐출[편집]

송시열이 사사되기 직전 그를 광양에서부터 정읍까지 육로로 도보수행하던 권상하가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하자, 송시열은 그의 손을 잡고 존주대의를 실천하고 도를 밝힐 것과 항상 '곧을 직'을 행실의 사표로 삼아야 된다고 유언하였다.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孝宗)의 대의(大義)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송시열은 권상하에게 결별을 고하는 유서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곧을 직(直)’ 자의 의의에 대해 거듭 설명, 누누이 강조하며 유도(儒道)의 맥을 이으라는 유언을 그에게 남겨주었다.

그가 사사될 무렵 하늘에서 문곡성이 떨어지고 해일이 일었다는 전설, 그가 사사될 때 하늘에 일식 혹은 월식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놀랐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남인들은 그가 사약을 받지 않으려고 효종현종의 유필을 핑계삼아 억지부렸다는 전설을 지어냈다.

송시열이 사사되자 숙종희빈 장씨 소생 원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고, 희빈 장씨도 왕비로 격상시킨다.

이미 숙종은 후궁 장씨를 왕비로 올린다고 선포했으므로 장씨가 사실상 왕비였으나 숙종 14년에 사망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왕비책봉식만 거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숙종은 재위 16년(1690)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10월 22일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권을 노린 남인과 왕비 자리를 노린 장옥정의 결합이 성공한 것이었다.[28]

사사된 송시열의 시신은 대전 회덕으로 운구되었고, 대전과 서울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숙종실록』은 “송시열의 상(喪) 때 서울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 모여 곡한 사람이 수천 명을 넘었는데, ‘각자 그 종 5, 6인씩만 내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0년 4월 1일)”고 전한다.[28]

사후[편집]

그 후 5년 만에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1694년 수원(水原), 정읍(井邑), 충주(忠州) 등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 뒤 문정(文正)의 시호를 내렸다. 1697년 송시열, 송상민, 권상하의 위패를 모신 남간사를 건립했다.

생전의 행적에 대해서 칭송과 비방이 엇갈리지만 서인 정권 하에서 1744년 영조(英祖)에 의해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세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효종(孝宗)의 묘정에 추향(追享)되었다. 또한 정조는 그를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추대하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대전 광역시 동구 소제동에 있던 우암 별당 기국정을 1926년 남간정사에 옮겼다. 대전시는 남간정사 옆에 우암사적 공원을 조성하여 공원 안에 남간사를 새로 지어 남간사의 위패 등을 모시고 있다. 장판각에 [송자대전] 목판이 보관되었다.

1756년(영조 32) 2월 23일 왕명으로 (贈) 의정부영의정추증되었다. 그해 송준길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후일 송시열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친히 편찬한 앙현전심록에서 정조는 송시열을 마침내 주자에 비견될만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현대[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당쟁을 일으킨 인물의 한사람으로 매도되고, 북벌론은 공상으로 취급되어 비판받아오다가 해방 이후 1970년대부터 재평가,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이 국사편찬위원회 주도로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했다.

1984년 7월 5일우암 송시열 집터》가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충북대학교에 우암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평가[편집]

일제는 조선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우암 폄하작업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우암은 '사대주의의 표상', '수구보수 사상의 원조', '사색당쟁의 원인 제공자' 등으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것은 우암의 사상과 기호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부진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29]

긍정적 평가[편집]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충청북도 청주화양서원, 경기도 여주대로사, 수원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우암은 송익필, 율곡과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학맥을 계승한 기호 사림의 중추적 인물이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사상가, 정치가였다. 북벌론으로 국가의 자존감을 고양하고 조선중화사상을 정립하여 문화국가로 나아가는 방향타를 제시하여 영정조시대의 문화적 르네쌍스의 토대를 마련하였다.[29]

임동철 충북대학교 총장은 "옥천에서 출생한 우암 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충북의 화양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우암의 학문을 연구하는 일은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통의 맥을 잇는 차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29]

=== 부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의 대부분은 역사를 허구를 가미한 드라마 수준으로 생각하는 비정통사학자인 이덕일의 소설에서 다룬 내용 등에 기초하고 있는바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됨.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이나 <효종실록> 등을 보아도 송시열이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준비에 대해 기술한 것이나 조정에 건의한 사례를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에 의하면 그는 단지 북벌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조청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30]라는 시각이 있다.

또한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 추진에 뛰어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후세 그의 제자들이 합리화한 것이고 사실은 북벌의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북벌 문제로 효종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여야 했고, 급기야 효종은 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병조의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송시열의 위선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아 고민하던 중, 때마침 효종이 급사하면서 일단락되었던 것이다.[31]

송시열과 허목자의대비의 복상을 1년상을 입느냐, 3년상을 입느냐는 상복문제로 피 터지는 예송논쟁 벌여 주도권 싸움을 벌인 것은 예학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성리학이란 학문을 내세워 기득권 싸움을 했다는 증명밖에 되지 못한다.[32]는 비판도 있다.

사상과 신념[편집]

송시열 영정 (1697년작)

그는 충과 의를 인간의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정실부인으로 승격되었을 때, 한번도 찾아가지 않은 자신의 친할머니 이씨 부인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자신의 서모와 서자, 서녀, 서얼 출신 친족, 친족의 서자, 서녀 등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깎듯하게 대하였다. 이는 서자와 서얼을 천대하던 다른 조선의 일반적인 사대부와 달랐다. 또한 자신의 부인 한산이씨에게도 깎듯이 존댓말을 쓰고, 출타와 복귀 시 부인에게 인사 또는 맞절을 하였다. 이 역시 아내를 땅이나 아래로 내려다 보는 다른 조선의 사대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괄 때문에 역모로 몰릴 뻔한 서모를 배려하여 서모의 친정을 대전으로 피신시키고 그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이기 일원론[편집]

그는 이기 논쟁에서 이와 기는 하나라고 하는 이기일원론을 계승하였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이와 기는 하나라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다.

산림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후 그의 견해를 시험하고자 많은 문인들이 이황이이, 조식 중 누구의 사상이 정통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주자의 뜻을 정확히 계승하는 학자를 나는 정통으로 본다 하며 학문 연구에 있어서 당론이나 당색에 구애받지 않음을 스스로 입증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율곡 이이뿐만 아니라 이황의 학설도 존중하였다.) 그러나 윤선도가 그가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는 상소와 허목이 그를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연이어 올리면서 그의 태도는 경직된다. 그럼에도 당색을 떠나 주자의 학설을 올바르게 계승한 학자만이 정통이라는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

주자가례[편집]

그가 예송 논쟁에서 1년을 고집한 것은 주자가례에서 주희가 장남 이외의 모든 자녀를 서자(庶子), 뭇 서(庶)로 해석하여 장남 이외의 모든 아들들은 중자(衆子)로 간주하여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은 이를 송시열이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와같이 남인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론의 문제를 왕까지 끌어들여 정쟁으로 비화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사대부답지 않은 행동으로 일관하였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윤휴의 이론을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반론도 제기했으나, 윤선도 등이 정치공세를 하면서 이는 학문적 논쟁에서 정쟁으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윤선도허목이 송시열을 사형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윤선도는 송시열 자신이 가르친 효종의 정통성을 송시열 자신이 부정했다는 인신공격성 비난을 하여 송시열을 분노하게 했다. 제1차 예송 논쟁에서 패한 이후 남인들이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그는 남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 편견을 갖게 되었고, 윤휴는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주자학만이 진실이 아니며 주자만이 진리를 아느냐고 주장한데 이어 윤선도, 허목을 옹호하여, 윤휴에 대한 개인적인 미움과 증오를 싹틔우게 되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흑수黑水, 적휴'라 부르며 극렬하게 증오한 이유는, 윤선도나 허목 등이 예 이론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배후가 윤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편집]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의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절개를 지킬 것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하여 양반부녀자들의 개가와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양반들이 군비부담을 회피하자 양반들의 군비 부담을 연구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하는 것이었다. 군포를 납부하면서 납부 수를 대장에 기록, 문서화하여 군비 부담의 비리, 폐단을 없앴다.


정치적 대의[편집]

그는 반역과 배신, 훼절을 미워하였고 경멸했다. 의리를 저버리는 것, 배신하는 것, 절개를 훼손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가 자신의 친구인 윤선거를 경멸했던 것은 그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혼자 살아나온 것을 의리를 저버린 것, 배신행위 또는 훼절하여 절개를 더럽힌 것으로 인식한 것이 이유였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고, 사육신의 신원과 명예 회복, 생육신의 포상을 주장하였으며, 노산대군여산군부인을 다시 왕과 왕비로 복위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때 그는 노산대군도 옳고, 세조도 옳다는 유연한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노산대군세종의 적장손이고 문종의 적장자이니 옳고, 세조세종대왕의 차남으로 왕통을 이었으니 옳다는 것이었다. 일부 남인들은 여기서 다시 그가 세조의 정통을 부정한다는 비판을 시도했으나 남인 당내에서조차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서 묻혀지고 만다. 그는 자신의 유배를 순교라고 확신했다. 자손들과 질손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죽도록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털끝만큼의 어긋난 것도 나중에는 천리 거리만큼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더구나 처음부터 크게 어긋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그 사람[渠 윤선거를 가리킴]인들 종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는 변변치 못한 하찮은 사람으로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한 일을 본받아,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든지 그를 죄줄 수 있다는 교훈을 독신(篤信)한 소치로 결국 유배되는 참사(慘事)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유배와 1689년 사형에 이르러서는 그는 자신의 사형을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고 의를 위한 당연한 순교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덕왕후 복권 운동 주관[편집]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 복위가 건의되었다.[33] 서인은 당론으로써 신덕왕후를 복권시켜야 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신덕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강씨였다. 그녀는 자기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세우려 했다. 그녀가 죽자마자 방원이 그녀 소생의 자식 둘과 정도전 등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켜 후에 태종이 된다. 태종은 그녀를 증오해서 그 무덤인 정릉을 헐어버렸다.)

태종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시니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다고 사변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참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34]

형식은 송시열의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잡는다고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34] 서인들은 만장일치로 지지를 보냈고, 남인이나 기타 군소집단도 반대할 수가 없게 됐다.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34]

단종, 사육신 복권 운동 주관[편집]

1680년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여론이 조성되었다. 노산군을 추복하는 근거로 노산군이 세조에게 양위하였고, 세조가 노산군을 상왕으로 모신 것이며 쫓아낸 것은 아니다. 또한 단종을 죽게 한 것도 세조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조사육신을 “당대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忠臣)”이라한 것 역시 단종 복위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결국 송시열의 그와 같은 노력으로 1691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복권되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직후에는 노산군이 대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곧 추복되었다. 노산군은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만동묘 설립의 취지[편집]

우암은 1689년에 제주로 유배의 길을 가면서 수암 권상하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울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35] 그 편지의 마지막에 '만동묘에서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임진왜란조선을 도와준 신종에게는 멸망하는 나라를 지켜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義理)를 다하는 것이요, 의종에게는 나라가 망하면 국왕이 죽음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도(正道)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35]

북벌론[편집]

명나라를 정벌한 청나라를 원수로 보았고, 이는 그가 죽을때까지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수제자인 권상하에게는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제사지내고, 중국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도록 유지를 내려 만동묘화양동 서원을 건립케 하였다.

명나라를 정벌한 만주족(여진족)을 원수로 여겼으며, 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백성들이 도륙되자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극대화시켰고, 그는 척화론과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공공연히 북벌론을 주장했고, 인조 때의 친청파 김자점은 이를 문제삼아 그를 제거하려 했다.

효종과 함께 병력 양성과 북벌을 준비했으나,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예송 논쟁에 휘말려 북벌론을 실행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김석주가 북벌론을 주장한 윤휴의 강군 양성론과, 윤휴의 강군 양성설을 받아들여 도체찰사부를 부활시킨 허적을 역모로 엮여서 죽일 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후 북벌론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임종때까지 북벌에 대한 신념을 유지했다. 한편 북벌론을 공리공담이라 주장하는 허목김자점과 동류라며 공격하였다.

인간관[편집]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깎듯이 대하였고,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로 대하였다. 신분에 구애됨 없이 누구에게나 편견 없고, 사심없이 대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이나 주자, 공자맹자를 비판하거나 유교사상을 부정하는 자는 원수로 여기고 거침없이 공격하고 규탄하였다.

그는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이를 평생 신념으로 삼았다. 그는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배움, 교육이 중요했고,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길이 성리학에 있다고 봤다.

그는 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자신의 몫을 다해야 된다고 봤고, 그 자신의 의무를 다 하는 방법 역시 성리학에 있다. 그는 양반 사대부에서부터 평민, 당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상민들과 여성들에게까지도 성리학을 가르쳤다. 배움을 구하는 자에게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문하에 출입시켜 가르쳤다. 그가 유배된 뒤에는 유배지까지 그에게 배움을 청하러 문도들이 따라왔다.

율곡 이이에 대한 관점[편집]

인조 반정 이후 율곡 이이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두고 서인남인 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36] 그러나 허목윤휴가 율곡 이이불교 승려이자 노장 사상을 가진 위학자로 몰고 가자 송시열은 이이를 두둔하며 그들에 대한 감정적인 비판을 하게 된다.

이이는 19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과 아버지가 바로 재혼해서 얻은 계모와의 갈등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승려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정적들은 이를 두고 그가 학자의 탈을 쓴 중(불교 승려)이라고 비난하였다. 율우(栗牛)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율우(栗牛)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허목이 율곡 이이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명목은 그의 학문이 유교가 아닌 불교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36]

학문에는 차례가 있고 공(功)에는 순서가 있다.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그는 '먼저 중요한 길을 찾아 문정(門庭)을 훤히 연 뒤에라야 정해진 방향이 없이 널리 배울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도(道)를 보는 것을 먼저 하고 학문을 뒤로 돌린 것으로 학문 방법을 거꾸로 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돈오법(頓悟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다.[36]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울곡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서문에서 말하기를 '먼저 요로(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확실히 연 후에 정해진 방향 없이 널리 배우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이하 중략)... 율곡의 말처럼 한다면 근본을 세움이 확실하지 못하고 방향이 정해지기도 전에 요로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 ...(이하 중략)... 이는 불가(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방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36]

허목윤휴에 의하면 율곡은 유학자가 아니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에 불과한데 승려를 어떻게 문묘에 종사하느냐는 비난인 셈이었다. 허목의 비판은 결국 율곡 이이의 출가 경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그의 문묘종사를 막으려는 당파적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36]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36] 어린 시절 한 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36] 허목, 윤휴 등이 이율곡학자가 아니라 불교 승려라고 몰고가자, 분노한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를 이단 사이비라고 규탄하였고, 이들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와 적개심을 품게 된다.

서예관[편집]

주자의 명언을 병풍으로 제작한 '주자명언 십곡병풍'
서예작 각고

그는 서예 역시 하나의 도학으로 생각하였다. 글씨에 대한 미학적 입장 또한 동춘당과 우암은 창고(蒼古)함을 추구한 미수 허목과는 뚜렷이 차이가 난다. 즉 동춘당과 우암은 글씨를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간주하면서 기교가 아니라 마음수련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글씨를 도학(道學)연마의 연장으로 보는 이황이나 이이 등과 같은 입장이다.[37] 실제 송시열은 이황의 서첩을 보고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하고 감탄하였다.[37]

유배, 사사에 대한 관점[편집]

송시열 자신은 자신의 사약을 순교로 해석했고, 유배생활을 정도를 걷는 자에 대한 사도의 탄압으로 여겼다. 이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송시열의 사후 그의 제자였던 권상하 역시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였다.

권상하는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며 윤증허목, 윤휴가 술수를 꾸며 송시열을 죽게 했다고 굳게 확신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묘비문을 쓰면서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글귀가 문제시되어 다시 노론, 소론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윤휴와의 관계[편집]

송시열은 윤휴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이자 친구였다. 예송 논쟁 초반까지만 해도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를 당이 다른 양반 정도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예송 논쟁이 터지면서 둘은 원수로 돌변한다.

송시열과 윤휴는 비록 멀지만은 같은 문중과 혼인한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의 증조부였던 송구수(宋龜壽)는 윤휴의 조상인 윤형(尹衡)과 함께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원(李原)의 후손이었던 군수(郡守) 이구연(李龜淵)의 딸들과 결혼하여 동서지간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같은 진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해 왔고, 두 집안 모두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내 비추자 주자(朱子)의 열렬한 숭모자인 송시열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윤휴가 또 윤선거, 허목 등과 같이 활동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틀어지고, 윤휴에게 적개심을 품게 된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종통과 적통을 부정했다는 비판을 하여, 효종의 스승이자 북벌론의 기수인 송시열을 인신공격했다. 이후 윤선도허목의 송시열 사형 주장과 남인의 거듭된 공격으로 감정이 악화되었고, 윤휴윤선도허목을 옹호하면서, 절교하게 된다. 이때 그는 윤휴가 성리학과 주자가례, 주자의 사상을 비판한 바 있었으므로 학문상 이유로 절교(絶交)를 선언하였다.

절교 이후 그는 윤휴를 가리킬 때 이름이나 성 대신 참적, 적휴, 흑수(黑水) 등으로 불렀다.[38]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39]가 현재 전한다.

윤선거, 윤증 부자와의 관계[편집]

윤증 초상

윤증([40]尹拯)과도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개인적으로 친구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 혼자 빠져나온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윤선거를 경멸하면서 윤선거와의 관계가 멀어진다. 이는 윤증과의 관계 악화로까지 이어져 회니논쟁과 노론, 소론 분당의 원인이 된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고, 윤선거는 송시열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그런데 윤선거의 할아버지 윤창세(尹昌世)는 윤황(尹煌)과 윤전(尹烇) 형제와 딸 1명을 두었는데, 윤창세의 사위인 은진송씨 송희조(宋熙祚)는 송시열의 5촌 당숙이 된다. 또, 윤창세의 아들 윤전의 딸이 사촌 형 송시형(宋時瑩)과 결혼한다. 송시열의 사촌 형수는 윤선거의 사촌 누이가 되고, 송시열의 당숙모는 윤선거의 고모였다.

팔송 윤황(尹煌)은 윤문거(尹文擧)와 윤선거 형제를 두는데, 윤문거의 아들 윤박(尹搏)이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선거의 손자이자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는 다시 은진송씨 송기후(宋基厚)의 딸과 결혼하는데, 송기후는 송시열의 5촌 조카이자, 사촌동생 송시염(宋時琰)의 아들이다.

여성 교육[편집]

유교적 이념사회에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 남자(남편)를 여자(아내)의 상위에 두었고, 부부관계도 군신관계, 주종관계와 같은 수직적인 관계로 해석했다. 따라서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성들에게도 인간답게 살게 해야 되고, 인간답게 살려면 자기의 몫을 다해야 되며, 예의와 염치와 도리를 알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우암은 여성들에게도 같이 문자(천자문)를 가르치고, 효와 충과 신의를 강조하였으며, 사자소학에서부터 사서 육경을 가르쳤다. 배움이 짧아서 혹은 오래 한학을 교육받지 못하여 한문의 어려운 뜻을 해석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배려한 그는 사서 육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만들어 여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39]를 보냈고, 출가녀들에게도 여성으로서 지켜야 될 의무를 서신과 서책 등으로 손수 써서 보냈다.

부부관계조차 군신관계, 상하, 주종관계로 해석하여 여성들을 일종의 불완전한 존재로 해석하던 사회에서 세인들은 여성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으나, 그의 앞에서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정조의 각별한 존경심[편집]

송시열 영정
(왼쪽 상단이 송시열의 친필 '자신을 경계하는 글'이고, 중앙 상단이 정조의 친필 어필이다.

정조는 평소 우암 시열을 존경하여 그의 영정에다가 친히 어제시를 남겼다. 이는 송시열 생전인 1683년에 작성된 영정들 중 송시열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경계하는 사자성어를 쓴 영정의 중앙부 상단에 친필로 기입하였다. 즉위 후 정조는 송시열을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41])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으로 간행하였다.


송부자(宋夫子 우암 송시열) - 정조대왕 御製시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송자도 또한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아니면 공자의 도를 전할 수 없었고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41]

후에 정조가 송시열을 추모하며 지은 어제시 한수가 전한다. 이 시에서 정조는 송시열이 아니면 주자공자를 알수 없다고 표현하여 송시열이 아니고서는 바른 학문을 알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송시열의 문하 사람인 김종수 (1728년)김종수가 세손 시절의 정조의 스승으로 그를 지도하였고, 노론의 당론에 저항하여 세손을 보호한 바 있다.

성격[편집]

송시열은 성격이 솔직하고 과격하여 꾸밈이 없었고, 한번 옳다 확신하면 바꾸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적을 많이 두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인척인 윤선거가 혼자 살겠다고 강화도에서 피신한 것을 비겁하게 생각했는데, 이 때문에 제자이자 인척인 윤증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저서와 작품[편집]

저서[편집]

  • 우암집(尤庵集)》
  • 《우암선생후집(尤菴先生後集)》
  • 《우암유고(尤菴遺稿)》
  • 《주자대전잡억》
  • 송서습유(宋書拾遺)》
  •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
  •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 정서분류(程書分類)》
  •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 《심경석의(心經釋義)》
  • 《삼방촬요(三方撮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송시열 저서 모음집, 사후 편찬

작품[편집]

  • 《장릉지문(長陵誌文)》
  • 《영릉지문(寧陵誌文)》
  • 《송준길묘지명》
  •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가족 관계[편집]

부인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이색(李穡)의 후손인 도사(都事) 이덕사(李德泗)의 딸이었는데 아들 2명이 요절하여 사촌 형인 송시형의 아들 송기태를 양자로 삼았다. 형제들도 자식이 없어서 차남 이하의 조카들을 너도나도 양자로 들여버려 늦게 송시열이 양자를 들이려 했을 때는 친조카 중에 양자로 갈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종형제의 자녀 중에서 양자를 물색하다가 송기태를 입양하는데 당시 송기태는 당시 자녀를 5명을 둔 30대의 젊은 아버지였다.

  • 5대조 : 송여해(宋汝諧)
    • 고조부 : 송세량(宋世良)
      • 증조부 : 송구수(宋龜壽)
        • 종조부 : 송응광(宋應光)
          • 종숙 : 송희조(宋熙祚)
      • 조부 : 송응기(宋應期)
      • 조모 : 이씨(李氏)
        • 백부 : 송방조(宋邦祚)
          • 사촌 : 송시영(宋時榮)
          • 사촌 : 송시형(宋時瑩, 당숙 송응광의 양자로 입양, 양자 송기태의 생부)
          • 사촌 : 송시염(宋時琰)
            • 당조카 : 송기후(宋基厚)
              • 조카사위 : 윤행교(尹行敎, 본관은 파평(坡平)윤증의 아들)
        • 아버지 : 사옹원 주부 증 의정부 영의정 송갑조(宋甲祚, 호는 수옹(睡翁), 1573년 - 1628년 4월).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선산 곽씨. (善山郭氏,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 ? - 1655년 3월)
          • 형님 : 송시희(宋時熹, ? - 1627년 3월)
          • 형수 : 김씨, 김성진(金聲振)의 딸
          • 형님 : 송시묵(宋時默, 현감(縣監) 역임)
          • 형수 : 이씨, 이시생(李蓍生)의 딸
          • 동생 : 송시도(宋時燾, 현감(縣監) 역임)
          • 제수 : 이씨, 이복익(李復益)의 딸
          • 동생 : 송시걸(宋時杰, 선공감감역(監役)역임)
          • 제수 : 권씨(權氏)
          • 누이 : 송씨, 윤간((尹侃)에게 출가
          • 누이 : 송씨, 이경(李憬)에게 출가
          • 부인 : 정경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 ? - , 1677년 3월,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
            • 아들 : 송순(宋純, 1626년 - 1637년 12월 14일)
            • 아들 : 요절
            • 아들 : 요절
            • 양자 : 송기태(宋基泰, 1629 ~ 1711). - 생부 송시형(宋時瑩)
            • 자부 : 증 정부인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의 후손 도정궁 이정한[42]의 딸)
              • 손자 : 송은석(宋殷錫)
            • 자부 : 증 정부인 문화 류씨 - 류신오(柳愼吾)의 딸
            • 장녀 : 은진송씨, 현감 권유(權裕)에게 출가
            • 차녀 : 은진송씨, 사인 윤박(尹博)에게 출가(윤선거의 조카)
          • 측실 : 이름 미상
            • 서녀 : 은진송씨, 민주경(閔周鏡)에게 출가.
        • 계모 : 증 정경부인 충주 지씨. 지여해(池汝海)의 딸
        • 서모 : 고성이씨, 이괄(李适)의 친족의 서녀[43]
    • 친척 : 송세영(宋世英)
      • 친척 : 송응서(宋應瑞)
        • 친척 : 송이창(宋爾昌)
          • 친척 : 송준길(宋浚吉), 정치가 겸 유학자, 호는 동춘당
        • 외조부 : 곽자방(郭自防)


가족관계중 할머니 이씨는 광주이씨이나 송시열선생 또한 말년 어록중 할머니 이씨라고만 언급하고 본관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당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노론과 남인과의 갈등이 원인이 된듯 하며, 할머니 이씨는 광주이씨 숭덕제 이윤경(병조판서)의 여식으로 혼인한 우암 조부 송응기 이며, 동고 이준경(영의정)은 친제이며, 우암은 소론당파 윤휴, 남인당파 허목 그리고 광주이문의 이원정, 이담명과 대립한 원인으로 할머니 본관을 언급하지 않은것으로 추정함.

기타[편집]

그는 송준길과 함께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보통 송시열의 제자가 후에 나은 가르침을 받으러 송준길을 찾아가기도 했고, 송준길의 제자가 후에 송시열을 찾아가서 사사하는 일도 있었다. 후에 석곡봉사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한 송상민 역시 송준길과 송시열의 제자였다.

예송 이후 송시열은 윤휴를 적휴(賊鑴), 참적(斬賊), 허목을 독물(毒物), 독극물, 흉목(凶穆)이라고 불렀다. 이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도 계승되어, 권상하윤휴를 지칭할 때마다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지칭할 때는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권상하는 공문서와 다른사람의 묘지명, 묘갈명, 신도비문 등에서도 윤휴를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송시열은 정도전 역시 혐오하였다. 정도전은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44]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이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선비의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자신이 왕위계승에 깊이 관여하는 등 권신이 되었기 때문이다.[45]

공물변통[편집]

공물변통에 대한 논의는 크게 대동법공안개정 두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효종때에 일어난 김육대동법 주청은 결국 호서대동법으로 피어나고, 이것이 퍼져 호남연해까지 퍼지게 된다. 하지만 김육이 주청한 대동법에 반대한 인물이 없지않았다. 그 중에서도 김집이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김육김집이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 차이[46]로 인하여 결국 김집은 정계에서 나오는 일이 벌어진다. 이 때 제자였던 송시열 역시 함께 나오게 된다.

김집이 누구인가, 당시 산림의 대표였던 사람이다. 산림의 수장이었던 김집이 반대하는데, 이것이 산림 전체의 뜻이었을까?

상이 이르기를, “호서의 대동법은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편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좋은 법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효종 9년 무술(1658) 7월 12일

호남대동법연해에 한정되어 실시하게 되었을 때, 나눈말이다. 송시열은 대동법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로 보고 있다. 또한

신:잠곡(潛谷:김육)이 대동법(大同法)을 만든 일은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신독재(김집)가 이론(異論)을 제기하고 국정(國政)에서 떠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생(송시열):이 점은 신독재(김집)가 당초에 대동법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송자대전 부록 권17, 어록; 최신록(崔愼錄) 上, 30

제자인 최신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인데, 김집이 대동법을 몰라서 정계에서 물러났다고 말하고 있다. 송시열의 대동법에 관한 관심은 현종 즉위년에 호남산군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올리는 상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47] 이보다 2일 앞선 3일에 당시 호조 판서였던 이시방이 찾아와 협의를 하고 간 결과였다.[48]

송시열의 공물변통대동법에 대한 관심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종이 즉위한 이후로는 공안개정에 대한 일을 시작한다. 목적은 방납의 폐단을 잡기 위해 공안개정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현종 후반에 이르면 현실성 또한 사라져 개혁론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49]

공안개정에는 허적의 반대가 있었는데, 이 둘의 견해의 차이는 공물가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허적송시열이 도라지와 산삼의 공물가를 줄이고 생강의 공물가 마저 줄이려는 것에 지적했다. 허적 자신도 도라지나 산삼의 공물가를 줄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지만 경각사(京各司) 공물들을 줄이는 것은 잘못이라 말했다. 공안에 규정된 물품의 공물가는 높으나 공물방을 경영하는 공물주인들을 보존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해 송시열 역시 경각사공물을 줄이려는 것이 아니라 심한 것을 줄이려하는 것이라 하여, 전면적인 공안개정이 아니기에 공물주인들이 피해 입는 것에 문제 없을 것이라 하였다. 더하여 송시열은 공물주인들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송시열과 허적공물가의 내용과 공물주인들의 역할을 각자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공물주인들이 공물가가 높기도하고, 공물주인들이 횡령하고 있다 보았고, 허적의 경우 공물가를 순수한 공물의 가격만 아니라 인건비사의 운영비가 더해진 값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각사는 운영비와 노동력에 대한 예산을 조정에서 지원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견해의 차이는 송시열이 관직생활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과, 허적이 관직생활 중 오랜 시간을 재정쪽에서 보냈다는 점에서 존재한다.[50] 

허목과의 비교[편집]

송시열은 조광조와 율곡 이이의 학풍을 계승한 김장생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기호학파의 학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사전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에 더 역점을 뒀으며, 정통 주자 성리학의 입장에서 통치자의 덕성 확립을 강조했다. 더구나 예는 유교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므로 왕과 일반 사대부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믿었다.[51]

허목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 받아 영남학파의 학풍을 계승했다. 더불어 그는 도가와 장자사상까지 섭렵해 송시열과는 다른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허목은 이러한 자신의 도덕적 이념을 왕권강화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예를 적용하는 것도 왕과 일반 사대부를 구별하였다. 즉 예로써 왕권을 강화시켜 요순시대와 같은 성군정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허목은 송시열과 같은 예치의 이념을 가졌지만, 그 방법을 다르게 본 것이다.[51]

영정, 초상화[편집]

1689년 사사 직전 제자 김창업이 그린 초상화

1683년에 제작된 입상 영정과 좌상 영정 2개 본, 1680년경에 그려진 영정, 제주도 유배지에서 육지에 올라왔을 무렵 그려진 김창업[52]이 친히 베껴 그린 영정 등이 전한다. 이중 1683년에 그려진 영정 1본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후손[편집]

송시열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부계로는 13촌 숙부뻘이지만 외가 쪽으로는 6촌 형이 된다.
  2.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35쪽, 263쪽.
  3.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189
  4. 은진송씨 울산종친회
  5. 그들의 우정은 송준길이 죽은 뒤에도 그의 자녀와 제자, 조카들을 송시열이 직접 챙기고 그들을 가르치는 등 평생토록 계속되었다.
  6.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관료의 재분열〉, 송시열.
  7.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89
  8.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90
  9.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91
  10.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163쪽.
  11.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
  12.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40~241쪽.
  13.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41쪽.
  14.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44페이지
  15.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22
  16.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51페이지
  17.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52페이지
  18.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 제2-12권 송자 연보
  19. 송시열은 왜 윤휴를 두려워하였는가:한국일보
  20.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122
  21.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123
  22. 민생 무너지는데, 임금·사대부 눈엔 송시열만 보였다
  23.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50~251, 262~264쪽.
  24.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1997, 석필) 260~261쪽.
  25.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23
  26. 그는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데는 남녀 구분이 없다고 보았다.
  27. 따라서 영부사라고 불리게 된다.
  28. 중앙선데이, 애욕에 눈먼 임금 정치보복을 許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29. 충북대 우암 연구 거점대학 부상 조선일보 2007년 09월 30일자
  30.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 하권 20쪽
  31. 조선 왕 독살사건, 이덕일 저.
  32. 왕보다 화려한 왕비 능,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 오마이뉴스 2005년 03월 29일
  33.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27
  34.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28
  35. 화양서원과 만동묘
  36.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
  37. [서예가 열전](15) 조선중기 -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
  38. 송자대전 참고
  39. 옛것을 돌아보고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배운다 - 오마이뉴스
  40.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와 비문 문제로 앙숙이 되었다.
  41. 우암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42. 조선 선조의 큰형인 하원군(河原君)의 봉사손(奉祀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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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조선 역사의 56가지 진실 혹은 거짓》 (21세기북스 2009) 202페이지
  45.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푸른역사, 1997)338
  46. 김육이 대동법을 적극 주장한 반면, 김집은 산림의 정계 진출을 위해 인사권 개혁을 주장했다.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47. 조선왕조실록현종 즉위년 9월 5일 기사
  48. 조선왕조실록현종 즉위년 9월 3일 기사
  49.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공안개정론은 왕실 수요의 대폭출소를 전제로 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둘째로 공안개정론은 공물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50. 승정원일기 212책, 현종 10년 1월 10일 기사
  51. 효종대왕의 1년 복상은 그가 차남이었다는 뜻입니까?" 조선일보 2009-02-05
  52.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관련 서적[편집]

  • 김선주, 《송자소전》 (김&정, 2005)
  • 송자대전(전8권) (편집부 편 지음, 보경문화사, 1985)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2000)
  • 호사카 유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김영사, 2007)
  • 송시열 이인상 저, 《빈 방에 달빛 들면:조선 선비 아내 잃고 애통한 심사를 적다》 (유미림 강여진 하승연 역, 학고재, 2005)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관련[편집]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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