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 (15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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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崔鳴吉, 1586년 ~ 1647년 6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외교관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며,[1]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완성군에 봉작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하였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최기남(崔起南)의 아들이다.

병자, 정묘호란 당시 척화론의 대표론자였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발하여 1623년 인조 반정에 참여하였으며, 정묘호란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론을 주장하여 주전론을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 선원 김상용 등과 맞섰다. 이항복의 문인이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반

부친은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며, 모친은 참판을 지낸 유영립의 딸 유씨다. 오성 이항복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605년(선조 3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이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전적(田籍)을 거쳐 1614년(광해군 6년)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명나라 사신 일행과 접촉 금지 원칙을 어겨 관직을 삭탈 당했다.

[편집] 인조반정

인조반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 뒤 부친 상을 당해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당시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형 최내길을 비롯하여 김류·이귀(李貴) 등과 대계(大計)를 세우고 드디어 1623년 4월 인조를 옹립했으며, 그 공으로 참의(參議)에다 1등 공신이 되고 완성군(完城君)에 피봉되었다.[2]

[편집] 정묘호란

정묘호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강화의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강화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이 물러난 뒤에도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경기관찰사로 부임하게 된다.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1635년(인조 13) 호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병조 판서로 되었으나 병 때문에 한성부윤으로 나갔다.

[편집] 병자호란

병자호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36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음력 12월 청군의 재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홀로 주전론자들 사이에서 주화론을 주장하였는데, 정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화의론을 좇는 자가 많아져 드디어 이듬해인 1637년 음력 1월 결국 인조가 직접 청 태종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이때 우의정이 되어 위로는 왕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내외가 점점 더 안정되고 좌의정에서 163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편집] 최후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다시 영의정을 역임했다.[3] 그러나 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을 하고, 조정의 반청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김상헌 등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 감금되었고, 1645년에야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2년간 더 보필하였다.

1647년 인조 25년 음력 5월 17일 오랜 병환으로 죽었다.[4]

그의 사후 조정에서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편집] 평가와 비판

[편집] 긍정적 평가

그는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고,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유명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가 평론하기를, “반정 훈신 가운데 명망 있는 자가 많았으나 그 뒤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치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수히 종묘사직을 위해 거사한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최명길, 장유, 이해 등이 그러한 사람이다.”라고 평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그가 청렴한 관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라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5]

[편집] 비판

병자호란정묘호란 당시 화의론, 주화론과 협상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협력자로 몰려 비판받았으며, 김상헌, 김상용, 김집, 송시열 등이 중심이 된 조선후기 노론 성리학자들의 비판,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화론, 협상론은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 와서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편집] 저서

  • 《지천유집(遲川遺集)》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 : 최기남(崔起南)
  • 어머니 : 유씨, 유영립의 딸.
  • 외조부 : 유영립

[편집] 관련 항목

[편집] 최명길을 연기한 배우

[편집] 주석

  1. 최명길 (1586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인조실록 1권 (1623년 3월 13일).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 조선왕조실록.
  3.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4. 인조실록 48권 (1647년 6월 17일). 완성부원군 최명길의 졸기. 조선왕조실록.
  5.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전 임
심집
제389대 한성부판윤
? ~ ?
후 임
김경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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