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 (15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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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 (1574년)
김집 서한
출생 1574년 음력 6월 6일
조선 한성부 정릉동
사망 1656년 음력 5월 13일
조선
사인 병사(노환)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별칭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이며, 시호는 문경(文敬)
직업 문신, 정치인, 유학자, 철학자
종교 유학
배우자 유씨, 덕수이씨(첩)
부모 아버지 김장생, 어머니 창녕조씨
친척 조카 김익훈, 종손 김만기, 종손 김만중, 종증손녀 인현왕후, 외조부 조대건, 사돈 송준길, 첩장인 이이[1]

김집(金集, 1574년 음력 6월 6일 ~ 1656년 음력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2] 학자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며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이다.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때의 서인 지도자로, 인조 반정 이후 비공신계 서인과 산림세력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등이 연이어 죽자 이들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복권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뒤 청음 김상헌, 우산 안방준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였다. 효종 초에는 안방준과, 자산의 문하인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김육대동법을 적극 반대하였다.

서인 산림의 당수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윤선거, 윤문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학문적으로는 노론소론의 공동조상이다. 숙종의 계비 인경왕후의 종증조 할아버지이며, 광남군 김익훈의 숙부가 된다. 서포만필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그의 종손자였다. 한성부 출신.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출생과 가계

아버지 사계 김장생

1574년 6월 6일 한성부 정릉동(貞陵洞)에서 사헌부대사헌 황강 김계휘의 손자이자,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창녕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僉知中樞) 조대건(曺大乾)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김은임진왜란 때 실종되었으므로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였다.

일찍부터 총명하여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작문하였으며 1581년(선조 14) 천곡 송상현과 귀봉 송익필에게 수학하였고 1586년(선조 19) 어머니 조씨를 여의고 집상하던 중 신병을 얻기도 하였다.

[편집] 초기 활동과 성리학 수학

여덟 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3] 이후 아버지 김장생으로부터 이이, 성혼성리학송익필의 예학을 전수받았다. 또한 1585년 경부터는 우계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여 수학하기도 했다.

김집은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유부인(兪夫人)은 병이 있어 부도(婦道)를 집행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실(副室)을 맞았는데, 아버지 김장생의 스승인 이이의 딸이다. 이씨(李氏)는 어질고 정숙하여 집안일을 잘 섭행하고 老先生을 봉양한지 30여년에 이르러 효도한다고 칭송이 있었다.[4] [4][5][6] 부인 유씨가 사망하자 집안 어른들은 가문의 대를 잇기위해 그가 재혼하길 원했으나 김집은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다시 장가 든다고 해도 꼭 먼저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고, 율곡 이이의 서녀와 해로하였다.[5][6]

[편집]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

[편집] 학문 연구

1591년(선조 24년) 18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었다. 이후 성혼이 사망하고 주요 학자들도 임진왜란을 전후해 대부분 사망했으므로 아버지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1596년 전란으로 가족을 이끌고 피신하였다가 1597년 4월 아버지 김장생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년)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었으나 광해군 조정의 북인들의 문란한 정치와 상궁 김개시가 전권을 휘두르는 것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후에 산림의 천거로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벼슬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덕망이 높았다.[2]

[편집] 인조 반정 직후

인조반정, 이괄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23년(광해군 15뇬) 인조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반정 직후 공신들의 월권행위와 탐욕스러움을 논하다가 반정공신들로부터 밉보이게 되었다. 이괄의 난 역시 공신들의 잘못된 논공행상이 원인이라 지적하였다. 그뒤 외직을 자청하여 5월 부여현감(扶餘縣監)이 되었다. 부여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학교를 일으키고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후 이후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갔다.

지방관으로 부임하여서는 지역 유지라는 이유로 전횡을 부리던 지방의 토호들을 잡아다가 벌을 내리고, 고을의 이방, 아전들이 전횡을 부리지 못하도록 엄격히 단속하였다. 또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등의 향약 자료집을 참고하여 향약을 정하여 시행케 하고, 전란 이후 증가한 도적들을 잡아다가 엄히 처벌하여 다시는 도적이 출몰하지 못했다.

[편집]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인조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
삼전도비 사진
병자호란, 정축하성, 정묘호란, 남한산성, 삼전도비, 삼전도의 굴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29년 7월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했다. 1634년(인조 12) 선공감첨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1635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年(인조 14) 5월에 사헌부 장령, 6월에 종친부 전첨, 7월에 집의(執義), 8월에 용양위 부호군, 10월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사헌부 지평(持平)·집의를 거쳐 1639년(인조 17) 다시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출사하였다. 그해 5월 통정대부로 승진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었다. 이어 우부승지에 임명하니 또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6월 행 호군으로 전임된 뒤 연산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7월 12월 다시 승정원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다가 다시 승정원우부승지에 임명되자 출사하였다. 이후 공조참의 ·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했다. 그뒤 대사헌에 천거되었지만 고사하였다.

이후 청음 김상헌, 우산 안방준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였다. 그는 북벌의 방법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허례허식을 폐지하고 공신들에게 지나치게 부여된 특권을 감축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인조 반정 공신들의 강한 반발에 부딛쳤다.

1645년 10월 세자시강원의 사부가 되어 세자를 보도하였다. 그해 11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반려되고 이듬해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반려되었다. 1647년(인조 25) 세자시강원찬선에 제수되었다. 1648년 특명으로 다시 세자시강원찬선이 되었다. 이후 다시 공조참의가 되었으나 인조 후반 반정공신세력인 김자점이 집권하자 그해 11월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2월에 부친이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다시 간행했다. 이후 오직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정홍명(鄭弘溟), 제자이자 저명한 유학자인 송시열, 윤선거(尹宣擧) 등과 함께 태극설과 상례(喪禮)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의례문해(疑禮問解)를 발간하였다.

그뒤 김육 등에 의해 대동법이 주청되자 그는 대동법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그는 안방준,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대동법의 실현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편집] 생애 후반

[편집] 효종 즉위 초

북벌론, 효종의 북벌, 대동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49년(인조 27) 1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가 효종으로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청서(淸西)의 김상헌과 함께 등용되어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고, 그해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정의 개혁을 논한 시무 7조를 올렸다.[7]

대사헌·이조판서가 되었으며, 효종, 김상헌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했다. 이후 왕명을 받아 소학의 주(註)와 중용의 구두(句讀)를 교정했다. 그해 7월대사헌을 제수하였고, 9월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9월 공조참판이 되고, 10월에 사직상소를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후 경연에 참가하여 중용을 강술하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 왕에게 강론하였다. 그해 11월에 귀향을 간청하니 대신, 홍문관, 성균관 유생 들까지 상소를 올려 머무르도록 청원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조카인 승지 김익희(金益熙)로 하여금 설득하여 왕명에 따르게 하였다. 이후 대사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 세 번 대면해서 말씀드리고 사양하였다. 12월에 왕의 간청에 못 이겨 조정에 들어가 시무를 하였다.

김육대동법을 추진하려 하자 김육을 규탄하며 반대하다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650년 1월 왕의 간청에 따라 인물을 전형 선발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나 재상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효종의 거듭된 부름과 대신과 대학 유생들의 소환상소에 겨우 응했고 4월 호분위 사직(虎賁衛司直)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다. 그러나 유배지에 있던 김자점이 북벌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문책으로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사임하였다. 그뒤 김자점 일파가 숙청된 뒤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뒤 김홍욱민회빈 강씨의 복권과 경안군 석방을 요구하다가 장살당하자 관작을 사퇴하였다.

[편집] 만년

제자 우암 송시열
(효종이 선물로 준 털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1650년(효종 2) 11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어 복직했고, 이조판서가 되어 김육대동법을 반대하여 갈등하였다. 이때 재야에서는 안방준대동법을 반대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그를 지원하였다. 1651년(효종 2) 다시 대사헌이 되고, 제자이자 저명한 학자가 된 우암 송시열과 서신으로 국상변복지제(國祥變服之制)를 논하였다.

1651년(효종 3)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거듭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취임하였다. 그뒤 대사헌을 거쳐 1652년정헌대부로 승진한 뒤 다시 이조판서가 되고, 호군을 거쳐 숭정대부로 가자했으나 사양하였다. 그뒤 1653년 특명으로 숭정대부가 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행좌참찬을 거쳐 좌찬성으로 승진한 뒤 다시 판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1655년 의례경전(疑禮經傳) 11권을 출간하였다.

김집의 영의정 추증 교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도성에 체류하였고, 조정의 중대의논이 있으면 왕이 낭관을 보내어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벼슬에 있기보다 초야에 묻혀 학문에 힘쓰려 노력하였다. 저서로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1656년(효종 7년) 윤5월 13일에 병으로 졸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향년 83세였다. 효종은 그의 죽음을 특별히 애도하여 '김집은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에서도 중망이 있었도다' 하고 일주일간 조회를 파하였다.

[편집] 사후

왕명으로 예장하여 충남 논산군 벌곡면 양산리에 안장되었다. 그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충남 연산의 둔암서원, 임피의 봉암서원, 옥천의 창주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서인 노론소론은 모두 그에게 뿌리를 두므로 그를 김자(金子), 김부자(金夫子)라 하여 성인의 반열에 올리려 하였으나 남인북인에서 계속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이·성혼·송익필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을 이어 그 학문을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3] 1882년(고종 20년)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과 더불어 부자가 문묘에 배향되어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후에 그의 묘소는 충남문화재자료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편집] 저서

  • 《신독재문집》
  •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편집] 가계

  • 할아버지 : 김계휘(金繼輝)
  • 할어머니 : 평산신씨
  • 서조모 :
    • 서숙(庶叔) 김연손(金燕孫)
  • 아버지 : 김장생
  • 어머니 : 창녕조씨
  • 서모 : 이름 미상
    • 서제 : 김규
  • 부인 : 기계유씨(송당 유홍의 딸)
  • 부실 : 덕수이씨(율곡 이이의 서녀)

[편집] 평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과 견해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다. 왕조실록에는 그가 '성품이 겸손하여 평생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편집] 사상과 신념

[편집] 예학 보급과 전파

5경의 학문을 밝히고 논어를 강하고 성리학의 근본을 정하고 다듬었으며 아버지 김장생과 스승 성혼 등의 학문을 계승, 이를 더 깊이 연구하고 가르쳐 예학의 체계를 조선사회에 보급, 확산시켰다.

[편집] 소현세자 복권 노력

그는 당대에 소현세자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천명하였다. 민회빈 강씨가 사사되자 그는 인조에 의해 제거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는 아무 잘못이 없이 억울하게 죽었으며 김자점귀인 조씨를 비롯한 반정공신들, 친청파들의 소행이라며 억울히 죽은 세자와 세자빈의 복권을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이후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은 서인 공신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 사림세력의 당론이 되었고, 숙종 때에 그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과 우암의 문인 김수항의 적극 상소로 복권되었다.

[편집]

봄날 새벽

虛室人初覺(허실인초각) / 빈 방에서 잠을 깨니
春天夜已란(춘천야이란) / 봄날 밤이 이미 무르익었고
孤雲依水宿(고운의수숙) /외로운 구름은 물 위에서 자고
殘月映松閒(잔월영송한) / 새벽달은 소나무 사이에 빛난다.

心靜都忘世(심정도망세) / 세상 일 잊으니 마음 고요하고
夢恬不出山(몽념불출산) / 산을 나가지 않아 꿈도 편안한데
緬思故園竹(면사고원죽) / 고향 정원에 있는 대나무는
長得幾何竿(장득기하간)/ 줄기가 지금 얼마나 자랐을까.

[편집] 기타

송시열,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수항, 김수흥, 김익훈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또한 송시열의 후대에서도 윤증, 박세당 등의 소론계 학맥으로도 분화, 계승되었다. 위로는 아버지 김장생이이(李珥), 성혼을 거쳐 조광조, 정몽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리학 학문을 이어받아 송시열(宋時烈)과 윤증 등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시켰으며 예학(禮學)을 체계화하였다. 이들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에 김집을 스승으로 하면서 보통 김집을 스승님으로, 김장생은 노스승님, 큰스승 으로 불렀다.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서인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이는 남인북인계 예학의 근간이 된 정구의 학파와 대립을 초래한다.

그의 문하생들 중에서 송시열을 당수로 하는 노론과 또다른 문인 윤선거의 아들 윤증을 당수로 하는 소론이 나뉜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외부 고리

[편집] 주석

  1. 그의 서녀가 김집의 첩이다.
  2. 김집 (1574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4. 이종묵 (2007). 《조선의 문화공간 2》. 휴머니스트, 460쪽
  5. 정연식 (2008).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청년사, 171쪽
  6. 이용선 (2007). 《청백리 열전(하)( 지음, , 2007》. 매일경제신문사, 193쪽
  7. 이를 본효종이 탄복하여 그 소장을 늘 옆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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