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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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종
朝鮮 景宗
조선의 제20대 국왕
본명 이윤(李昀)
재위 1720년 ~ 1724년
종교 유교(성리학)
왕후 단의왕후
선의왕후
부왕 숙종
모후 희빈 장씨
이전 왕 숙종
다음 왕 영조

경종(景宗, 1688년 11월 20일(음력 10월 28일) ~ 1724년 10월 11일(음력 8월 25일))은 조선의 제20대 임금이다. 이(李), 는 윤(昀), 본관전주(全州), 는 휘서(輝瑞), 시호는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이다.

숙종옥산부대빈 장씨의 아들이다. 숙종 16년(1689년), 서자인 그에게 원자(왕의 적장자)의 명호를 내리는 원자정호 사태로 기사환국이 발발하였고, 갑술환국 후 그와 그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의 처우 문제로 노론소론이 격쟁하여 영구히 절연, 경종이 즉위한 후에 발생한 신임사화노론의 원한을 얻었다. 부왕 숙종의 지병이 악화되자 1717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에 숙종이 승하하자 6일 후인 7월 17일(음력 6월 13일)에 즉위하였다. 1720년부터 172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722년부터 1724년 10월 11일(음력 8월 25일) 붕어(崩御)할 때까지 이복 동생 연잉군(훗날 영조)이 왕세제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1724년 10월 6일(음력 8월 20일) 밤에 갑자기 배와 가슴이 조이듯이 아픈 증세를 일으키고 극심한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10월 11일(음력 8월 25일) 새벽에 훙서(薨逝)하였다.

특별한 병증이 없이 급서하였기에 독살 의혹이 제기되어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이인좌의 난 및 크고 작은 난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생애[편집]

경종은 1688년 11월 20일(음력 10월 28일) 태어났다.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원자(元子:임금의 적장자)로 봉해졌다가[1]1690년 6월 3살 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2] 1717년 10월 와병 중인 숙종을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시작했고 1720년 6월 8일 숙종이 승하하자 조선 20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병약하여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와 그의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김창집 등의 노론김일경 등의 소론이 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명의 노론파 대신이 죽음을 당하였다(신임사화).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뒤에 단의왕후 심씨선의왕후 어씨 등 두 부인을 두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선의왕후노론의 추대를 받는 연잉군을 음흉한 시동생으로 간주하여 소현세자인평대군의 후손 중의 한 명을 양자로 삼으려고 물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어머니 장희빈의 왕비 책봉[편집]

1689년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생모인 희빈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으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하고 희빈장씨는 다시 빈으로 강등되어 왕세자였던 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인계되어 그녀의 법적 아들이 된다. 왕세자의 사친으로 강등된 희빈장씨1701년 인현왕후 사망 후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시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죽는다.

한편 인현왕후희빈장씨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희빈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3] 그런데 인현왕후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부왕 숙종장희빈의 사사를 결심한다. 또한 앙숙관계였던 자신이 숙빈 최씨를 투기, 괴롭힌다는 호소 역시 장희빈 사사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무고의 옥(신사옥사)[편집]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低下)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3]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李濡)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庭請: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3] 숙종은 노론의 때아닌 존호 추상 요청을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해 수락한다.

승정원을 통해 자진의 명을 내리기 전날인 1701년 10월 7일, 숙종은 후궁을 왕비로 진봉할 수 없는 규칙을 정하였다.

험난한 즉위 과정[편집]

노론은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는 천신만고 끝에 왕위를 계승했다. 사친 장희빈 사사의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이이명)과 '정유독대(丁酉獨對)'를 실시했다.[3] 이때 숙종은 이이명에게 연잉군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청을 하였는데, 사관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 독대 사건은 후일 신임옥사이이명의 발목을 잡는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3]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3]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43년 7월 28일)”

숙종이 그를 인현왕후에게 인계하였고 숙종이 죽기 전 서둘러 혼인시킨 계비 선의왕후 어씨노론 실세 가문의 딸이자 어씨의 아비 어유구김창집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노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때 대개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는 형국이었으며 때문에 소론과 노론 간의 권력 투쟁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가운데 1720년숙종이 승하하자 경종은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다. 그때 경종의 나이는 이미 33살이었고, 숙종이 아파서 누워 있던 3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면서 숙종 대신 국정을 돌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정사를 처리하는 데는 서툴지 않았다. 숙종 말년에야 비로소 강행되어 1720년에 완성된 양전사업은 대리청정 중인 경종이 민진후, 김창집 등의 노론의 극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이룩한 쾌거였다.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3]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숙종은 재위 46년(1720)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20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편집]

경종이 즉위한 직후, 선왕이었던 숙종이 희빈 장씨의 작호를 거두지 않았고 천장과 망곡례[4][5][6][7][8]를 허가했던 것은 경종이 즉위한 후에 그녀를 추존할 수 있도록 한 숙종의 은밀한 뜻이었으니 희빈 장씨에게 마땅히 명호를 올려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쳐 올라왔다. 노론의 격렬한 반발 속에 경종은 선왕의 국상 중에 논할 일이 아니라며 상소를 올린 자 중 유학 조중우를 유배보내지만 노론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중우와 그 무리들을 압송해 국문하여 기어코 죽이기에 이른다. 그 직후, 성균관 장의 윤지술(인현왕후의 조카 민우수의 처남)이 장의의 권한으로 권당을 선언하며 '숙종희빈 장씨를 죽인 것은 빛나는 업적이니 지문에 명기하여 만백성과 후세인이 알 수 있도록 하라'는 장계를 올렸고, 이에 경종의 즉위와 함께 국구로 행세해온 민진원(인현왕후의 둘째 오빠)을 주축으로 한 노론은 윤지술의 의기를 칭찬하며 그를 보호한다. 경종 2년에 신임옥사민진원과 노론을 축출한 경종은 비로소 어머니 희빈 장씨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할 수 있었다. 경종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경종의 재위 기간 4년은 노론과 소론의 정권 다툼으로 정치가 잠잠할 날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특별한 업적 또한 남기지 못했다. 이 시기에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종의 치세 중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20여 명이 처형 당했고 옥사를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죄인의 아내 등 52명이 죽었고, 유배형을 받은 이는 114명이었다.

사망과 능묘[편집]

재위한 지 4년 2개월 만인 1724년 8월 25일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37살의 나이로 훙(薨) 하였다. 경종은 평생 자식을 두지 못했다. 능은 의릉이다. 경종의 태실비(탯줄을 묻은 곳)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소재에 있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각공왕(恪恭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가족 관계[편집]

독살설[편집]

1724년 그는 갑자기 최후를 맞이한다. 특별히 병세를 앓지 않은 상태에서 세제인 연잉군이 보낸 게장생감을 먹었다가 고통을 호소하면서 죽어갔는데, 소론 일부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일경, 목호룡 등의 김일경의 난이나 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인좌의 난 당시 난군은 영조의 경종독살설을 보다 구체화시킨다. 경종 독살설은 널리 퍼져, 신치운(申致雲)은 영조가 자신을 친국할 때 '신은 갑진년(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한 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라며 경종 독살설을 비꼬아서 대답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가 분통하여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10]

주석[편집]

  1. 원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다 -숙종15년 1689년 1월 15일 1번째 기사
  2. 원자를 왕세자로 봉하다-숙종16년 1690년 6월 16일 1번째기사
  3.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4. 《조선왕조실록》숙종 28년 1702년 1월 30일 기사 中 "장씨(張氏)를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장사지냈는데, 발인과 하관(下棺)할 때 세자와 빈궁(嬪宮)이 금중(禁中)에서 망곡(望哭)하였다."
  5. 《조선왕조실록》숙종 45년 1719년 3월 12일 中 "희빈 장씨의 묘를 천장하매 전에 정한 바대로 망곡례를 거행하게 하다."
  6. 《조선왕조실록》숙종 45년 1719년 3월 24일 中 "세자가 이날 장씨의 묘를 판다 하여 빈궁과 대궐 안에서 망곡례를 행하다"
  7. 《조선왕조실록》숙종 45년 1719년 4월 5일 中 "인장리에서 영구가 발인하매 세자와 세자빈이 망곡례를 행하다."
  8. 《조선왕조실록》숙종 45년 1719년 4월 7일 中 "진해촌에 장씨의 관을 하관하니 세자와 세자빈이 망곡례를 행하다."
  9. 조선왕조실록 : 경종대왕묘지문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ta_200001&tabid=k)
  10. 신치운을 신문하다 - 영조 84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5월 20일(계사) 2번째기사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