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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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출생 1892년 3월 4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평안북도 정주군
사망 1950년 10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강계시 인민군 군병원
직업 작가, 시인, 언론인
국적 조선
장르 소설, 시
종교 천도교

이광수(李光洙, 일본식 이름: 香山光郞 가야마 미쓰로[*],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시인·문학평론가, 언론인이었으며, 사상인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언론인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안창호, 윤치호, 김성수 등의 감화를 받아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제창하였으며,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국내 조직과 수양동우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변절한 이후에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탄받았다.

1939년 12월 이후에는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여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주관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소설가로는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고주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본관은 전주이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유년기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이종원(李鍾元)과 어머니 충주 김씨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이보경(李寶鏡)이다. 춘원이라는 아호(雅號) 외에 고주(孤舟)·외배라는 별호도 있다. 5세에 한글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1]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이광수는 일찍부터 문필과 관련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면서 도쿄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1] 그 뒤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2]

1904년 일본 관헌이 천도교(동학)을 탄압하자 진남포에서 배편으로 제물포(인천)를 거쳐 상경했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편집] 일본 유학과 문학 활동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大成)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고, 홍명희·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다.[1] 그러나 그 해,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11월에 일시 귀국했다. 1907년 2월 학비를 장만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문일평,홍명희 등과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와 논설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이때 일본에서 만난 홍명희와 친하게 지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를 소개받았다고 한다.[3]

1909년 11월 18일 밤에 일어로 쓴 〈사랑인가〉라는 단편을 탈고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그 해 12월 15일 발행된 메이지 학원 동창회지인 《백금학보》(白金學報)에 발표되었으며, 이광수가 완결한 첫 작품이자, 동시에 첫 친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야마자키 도시오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를 주제로 씌인 친일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4]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했다. 같은 해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했다가[1] 남강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 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그 해에 1년 연하의 수원 백씨 백혜순(白惠順)과 결혼하였다. 1913년 11월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을 떠나 만주로 가 상하이에 잠시 머무르기도 하였다.[5] 상하이에서 홍명희,문일평,조소앙,송상순 등과 함께 지내다가 1914년 6월 오산학교에 복직했다.

1914년 신규식의 추천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기로 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향했으나 러시아 치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행을 단념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15년 김병로,전영택,신석우 등과 교유하는 한편,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9월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7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설 '무정'.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연재되었다.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소설 무정(1917)이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다음해 1918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1만부가 팔렸다.[6] 같은 해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에 특대생으로 진급했으며, 과로 끝에 결핵을 앓았다. 1918년 폐병이 재발했으나, 허영숙의 헌신적인 간호로 건강을 되찾았다.

[편집] 독립 운동

[편집] 상하이 활동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4년 연하의 양천 허씨 허영숙(許英肅)과 재혼하였다. 그해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송계백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였다.

1919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인 『신한청년』의 창간호 표지이다. 주필은 이광수(李光洙)였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을 만나고 2월 8일 2·8 독립 선언의 선언문을 기초[1]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7] 《독립신문》 주필과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 주필로도 활동하였다.[8] 상하이에 와서 그는 다시 홍명희를 만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안창호의 권고에 감화하여, 귀국 후 이광수는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했다.

1919년부터 그는 잡지 《독립》을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이었고, 또한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임시정부의 사실을 알렸으며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9]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그는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고 말았다.[9]

[편집] 귀국

이광수와 홍명희,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 지내왔는데, 2년 뒤인 1921년 3월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10] 그 뒤 재정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던 이광수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3월까지 《개벽》에 논문 〈소년에게〉를 연재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다. 1922년 종학원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윤리학,심리학,종교철학,논리학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1923년 5월 김성수송진우의 권유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광수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들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11]

1919년경 아내 허영숙이 상하이에 이광수를 찾아왔을 때 아내와 함께 돌아오다가[8](일설에는 홀로 돌아왔다고도 한다.[1])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8][1]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8] 그 뒤 1922년 9월 30일 밤에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첫 면담을 가졌으며, 그때부터 사이토의 정치참모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와 빈번히 접촉하였고, 그들의 주선으로 월수당 3백 을 받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한다.

[편집] 민족개조론

도산 안창호.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받은 그는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고, 후에는 흥사단수양동우회 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민족개조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2년 잡지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을 내세워 이때부터 차츰 총독부로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국법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일본의 국법이 허하지 않는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논설이라는 비판이 있다.[12]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에서 퇴사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장편소설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재생〉연재를 끝낸 1925년 다시 동아일보에 〈춘향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편집] 수양 동우회 조직

흥사단, 신간회,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회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안창호, 윤치호 등의 감화를 받은 그는 안창호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고, 이후 그를 도와 흥사단의 국내 조직과 수양동우회의 모태인 수양동맹회 등을 결성하였다.

이광수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1922년 수양동맹회를 결성했는데, 그 전문(前文)에서 “정치[8]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주의(主義)”라고 발표하였다. 1925년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해 수양동우회로 발족시키는데 힘을 쏟은 끝에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수양동우회는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질적인 모든 사업과 실천 내용은 흥사단의 국내 조직 역할 단체였다.

[편집] 문학 활동 및 사회 활동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28년 장편소설 〈마의태자〉를 발간했다. 이듬해 1929년 단종애사를 썼는데, 이 책은 대중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13] 1931년 6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소설 《이순신》의 연재를 시작하였다.[14]

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를 나와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1936년 6월 1일 경성일보사 초대사장이자 조선 언론정책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아베 미쓰이에의 흉상 건설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이듬해 6개월 후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 《사랑》, 《세조대왕》 등을 집필하였다.

[편집] 전향

1938년 3월 10일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가 병사하자,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그 해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하게 된다.

[편집] 전향과 친일 행적

[편집] 1930년대 후반 활동

1938년 12월 14일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강연을 한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섰다. 이어 이광수는 '민족 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자'고 주장하면서 “의례 준칙의 일본화”와 “생활 방식의 일본화”를 역설했다. 그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이광수는 '이광수'(李狂獸)라는 빈축을 사게 되었다.[8] 그 해 1939년 3월 14일 '북지(北支)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을 맡는 등 문단사절 파견을 주도하였고, 7월 잡지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를 발표해 '조선민족이 일본국민이라는 견지와 감지(感地)에서 문예를 창작하거나 평론하려는 국민주의의 문인이나 문학은조선에는 전였없었다. 그런데, 지나사변을 계기로 조선민족의 황민화라는 대변혁이 일어났다. 이번 문단사절은 실로 이 변혁을 문단의 입장에서 표시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1939년 6월 30일 그는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로 1939년 11월 3일 발족한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1월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협회 주최 전선(前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2월 3일 남대문통 금천대 회관에서 열린, 조선문인협회 결성 피로를 겸한 사업계획협의간담회를 주도했다.

[편집] 창씨개명 전후

1939년 12월 12일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 개명 권고 칼럼
창씨개명, 내선일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 시행을 발표하면서 조선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15]을 선언하기도 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는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15] 그의 창씨개명 지지 주장에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일본조선총독부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16]이라고 답하였다.

39년 12월 20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반도호텔에서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공개 원탁회의가 열렸다. 일본인 측에서는 유가미, 매일신보의 이노우에, 그리고 몇몇 인사들이 참석했다. 조선인 측에서는 한상룡, 장덕수, 이광수와 윤치호가 참석했고, 최린이 사회를 보았다.[16] 매일신보 주최 원탁회의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요즈음 젊은이들을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는게 토론 주제였다.[16]

이때 이광수는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피력했다.

  1. 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우리들 대부분이-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2. 우리 어른들이야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3. 9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조선인들에겐 지금과 같은 성이 없었습니다. 김씨, 이씨, 박씨, 기타 성씨는 다 중국에서 빌려온 것입니다.[16]

또한 이 회의에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상민이 재산을 모아 양반의 족보를 돈주고 사서 혈통을 위조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신문지면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광수는 다시한번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17]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17]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그는 총독의 은혜를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창씨개명의 취지에 적극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앞장서서 창씨개명하였다. 이후 그에게는 무수한 협박과 투서, 비난이 쏟아졌다.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사설란에다가 이광수는 香山光浪(가야마 미쓰로)이라는 창씨개명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창씨개명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자신의 창씨개명을 합리화했다.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창씨와 나〉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슴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혀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1940년 2월 2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로 지원병 훈련소에 1차로 1일 입영견학을 했다. 또한, 이 무렵 소설 〈무명〉으로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최하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8월 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최로 '내지'작가인 기쿠치 칸,고바야시 히데오,나카노 미노루 등이 중심이 돼 반도호텔에서 열린 문예좌담회에 참가했다. 9월 29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지원병행가〉가 방송되었다.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로 지원병훈련소에 2차 1일 입영견학을 갔다왔다. 12월 25일 황도학회가 만들어질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0년 6월 3일 이광수의 집을 방문한 윤치호는 그의 부인에게서 "자기 남편이 창씨개명한 후 1천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같이 욕설을 퍼붓거나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6월 무렵에도 그는 하루 평균 5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8]

[편집] 1940년대 활동

1941년 1월 20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애국일의 노래〉가 방송되는 한편, 일문 산문집〈동포에 부침〉이 간행되었다. 5월 5일부터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는 현대극장 부설 국민연극연구소에서 예술개론을 강의했다. 8월 25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12월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5월 경성일보 귀빈실에서 조병상,이숙종 등과 일본인 고관들이 모인 좌담회에 출석하여 황민화를 찬양했다. 5월 15일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연재로 연설했다. 6월 10일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군인이 되는 마음 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11월 3일부터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12월 8일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했다.

1943년 2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4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김용제·최재서·김기진 등과 같이 주도해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협회,조선센류협회, 국민시가연맹 네 단체가 통합해 결성한 조선문인보국회를 결성하여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에 선출되었다. 8월 18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희망의 아침〉이 방송되었다. 8월 16일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문인보국회 제1회 이사회에 참석했다.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했다.[19]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최남선,김연수 등과 함께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1944년 2월 26일 경성 종로서가 주도한 총후 황민등에서 실무위원을 맡았다.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이 됨과 동시에 같은 날 열린 결전태세즉용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고, 8월 17일 적국 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라는 제목 아래 문학도 결전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제국의 괴뢰정부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했다.

1945년 1월 4일부터 17일까지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이 주도한 처우감사 총궐기 재성유지협의회 운동준비위원으로서 '처우감사총궐기전선대회'에 참여해 강연했다. 2월 11일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2월경 일본 신태양사(구 일본모던사)가 주관하는 제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24일 정치깡패이자 제국의회의원 박춘금이 당수인 대의당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편집] 문학 작품

이광수는 시, 소설, 평론,좌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천황제와 황국신민화 찬양,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정당화와 전시동원 독려, 그리고 문학을 통한 보국 등을 적극 선전하는데 주력했다. 작품으로는 1939년 2월호 동양지광 잡지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내선일체와 조선문학>(1940.4, 조선),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11, 국민총력),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1942.12, 국민문학), <폐하의 성업에>(1943.2, 춘추), <모든 것을 바치리>(1945.1.18, 매일신보) 등 103편의 시, 소설,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편집] 광복 이후

[편집] 광복 직후

말년의 이광수. (1946년)
백범일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13일자는 “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라며 비판하였다.[20]

1945년 광복 후 1946년 9월 이학수의 도움으로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며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1월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에서 안창호 평전 집필 의뢰받고 집필에 매달려 《도산 안창호》(1947. 5)를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했다. 당시 친일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었는데, 이 책에 '춘원'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제3판(1950년)부터였다. 이때부터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여 1947년 6월 〈꿈〉을 면학서포에서 간행했고, 그 해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가 출간될 때 윤문 작업에 참여하여 친필본 상권의 첫 문장 “우리 선조는 안동 김씨로 김자점의 방계 후손이다.”를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로 고치는 등 여러 부분에 손을 댔다.[21]

[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1월 이후 한반도의 정가에서는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제기되었다. 그는 정부 수립론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이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1948년 12월에 간행된 이광수의 자서전 〈나의 고백〉

1947년 12월과 1948년 10월에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주로 여성체험과 관련하여 표현한 〈나-소년편〉과 〈나-스무살고개〉를 간행했다. 1948년 6월에는 1946년 10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자신의 생활세계와 내면세계를 면밀하게 기록한 글들에다 상쟁(相爭)의 논리일 뿐이라며 당시 좌익을 비판하는 《내 나라》 등 3편의 논문을 추가한 《돌베개》를 생활사에서 간행했다.

8월 15일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는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1948년 12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을 춘추사에서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나의 고백〉에는 친일에 대한 변호 외에 〈친일파의 변〉이라는 부록이 있다. 여기에는 〈홍제원 목욕〉,〈삼학사〉〈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미국인의 친일파관〉,〈대한민국과 친일파〉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글들에서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집] 반민특위 구속과 석방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에 체포, 구속되었다. 이어 이광수는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되었다. 1차 심문이 끝난 후 조사관에게 약속한 대로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썻다. 같은 죄목으로 같은 날 검거된 최남선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열서〉를 쓴 반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그대로 견지했다.

한편, 이광수의 가족들은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셋째 아들 이영근(당시 중앙중학 6학년)은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병이 위중하여 보석해주고 자신을 대신 담보로 수감해 달라.’라는 내용의 혈서를 써서 보냈다. 이무렵 병세가 악화되어 이광수는 1949년 3월 4일 '고혈압증' 등 사유로 특별히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22]

그는 반민특위에 심문당할 당시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23][24]

[편집] 말년

1950년 1월 다시 민족의 장래를 위한 야망을 담은 소설 〈서울〉을 태양신문에 연재했으나 좌익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문제가 되어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3월 유작 〈운명〉을 집필했고, 5월 〈사랑의 동명왕〉을 한성도서에서 간행했다. 1950년 6월 22일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져 병상에서 한국전쟁을 맞았다. 7월 5일 인민군에게 효자동 집을 차압당한 뒤 6일 내무서로 연행되어 12일 납북되었다. 같은 해 10월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 도중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1] 사인은 심한 동상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였다. 그가 이동 도중 동상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의 친구였던 홍명희김일성의 허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이광수는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5]

[편집] 사후 및 평가

1957년 11월 23일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춘원의 밤'이 개최되었다. 1959년 12월 '춘원선집'(광영사)가 발간되었다. 1963년 11월 '이광수전집'(삼중당)이 완간되어 13일에는 흥사단,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가 열렸다. 1971년 10월 신선 '이광수 전집'이 간행되었다.

1991년 셋째 아들 이영근은 북한측 초청으로 입북, 부친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였다.[26]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0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27]되어 친일 문학인으로 선정된 42인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이광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항일 민족주의자로서 35-36년을 살고 47세경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약 6년간을 친일로 살았다.”는 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8] 이들에 따르면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하기 위한 행동이였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라고 주장하고 있다.[29] 반면에 1909년 〈사랑인가〉를 탈고한 시점에서 이미 친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4]

1948년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보고서에 따르면, 이광수는 '광병적(狂炳的) 친일 급 열렬 협력자'로 평가되있다.[30]

그 외에 이광수는 사단법인 한국에스페란토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31]

[편집] 기타

[편집] 문학 세계

기독교 사상을 접하면서 이광수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했을 정도로 감동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기독교 사상이 나타나 있는 예술론에 심취하여 이같은 기독교 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도 구현하려 하였다.[32] 이광수는 1920년에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문젯점》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이광수가 당시 조선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 조선 교회는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
  2. 조선 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너무 이분화해서 교회에만 치중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인 세상 일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외면한다.
  3. 상당수 개신교 목사들의 수준이 형편없다.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들이 너무 많다. 기도가 만병통치약인 줄 안다. 한민족을 계몽하자면서 미신적 신앙을 전수하니 이게 왠말이냐?
  4. 조선교회는 개신교회천주교회 모두 합쳐서 100년이 넘는 선교역사를 가졌는데, 어째 조선에는 제 소리 하나 없이 다 가져온 것이냐?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자주성)이 없다.
  5. 선교사들과 그들이 인정하는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가졌다. 다양하고 자발적인 성서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6. 조선의 기독교는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한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의 대중들을 길들이려 한 기득권층적인 논설이라는 비판도 있다.[33] 반대로 그의 작품에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송영옥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어 있지만, 그는 기독교 사상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고 고양된 정서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도록 만들었다고 한다.[34]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편집] 작품

  • 소설 《무정
  • 《재생》
  • 소설 《
  • 소설 《단종애사》(1929)
  • 소설 《유정》
  • 《사랑》

등이 유명하다.

  • 전기 《안창호》
  • 논설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
  • 《애욕의 피안》
  • 자서전 《나의 고백》

그 밖에 《개척자》, 《방황》, 《혁명가의 아내》, 《이순신》, 《무명》,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등이 있다.

기타 불교 소설로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도 썼다.[35]

[편집] 가족

이광수의 가족사진. (1940년 8월 27일자 매일신보에 실렸다.)
  • 아버지 : 이종원(李鍾元)
  • 어머니 : 충주 김씨
    • 누이 : 2명
  • 처 : 백혜순(1918년 이혼)
  • 처 : 허영숙(許英肅, 1946년 이혼)
    • 큰 아들 : 이봉근(8살때 병사.)
    • 둘째 아들 : 이영근(미국으로 이주.)
    • 첫째 딸 : ?
    • 둘째 딸 : 이정화(미국에 거주, 1998년 미국 시민권 취득,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 역임.)[36]
  • 사촌형제 : 이학수(李學洙, 1921년 스님으로 출가)

[편집] 기타

  • 김도연에 의하면 그는 몸이 병약했다고 한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이광수를 연기한 배우

[편집]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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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주석

  1. 이광수”.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2008년 10월 12일에 읽어봄.
  2.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7) 조선일보 1998.01.08자
  3.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26쪽.
  4.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86~87쪽쪽. ISBN 89-7199-036-8
  5.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25쪽.
  6. 이는 당시로 엄청났다. 당시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25만명의 인구였고, 거의 70~80% 이상이 문맹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얘기다.
  7. 1918년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8.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99~101쪽쪽. ISBN 89-7199-036-8
  9.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25~126쪽.
  10.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27쪽.
  11. 이광수, 《무명 : 다시 읽는 이광수 11》(맑은소리(동반인), 1999) 연표편
  12.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130쪽쪽. ISBN 89-7199-036-8
  13. [언중언] 단종애사. 강원일보, 2008년 3월 14일자 기사.
  14. 오늘의 소사-6월 26일, 대전일보, 2008년 6월 26일자 22면 기사.
  15. 일제때 산 사람은 다 친일파이고 '척결' 주장에 정치적 고려 있다고? - 오마이뉴스 2002년 05월 30일자
  16.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1페이지
  17.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
  18.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5페이지
  19. 편집부 지음,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한길사, 2004) 328페이지
  2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5쪽.
  21. [책과 길] 출간 60년된 백범일지 감춰진 얼굴, 쿠키뉴스, 2008년 7월 25일자 기사.
  2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95쪽.
  23. [그때 오늘] 침략전쟁 참여 독려한 이광수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 변명- 중앙일보 뉴스
  24.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황국신민 대우를..."
  25.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30쪽.
  26.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30쪽.
  27. 김재용 (2002년 8월).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67호): 123~148쪽.
  28. 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동아일보 (연합뉴스)》, 2007년 10월 2일 작성. 2008년 6월 7일 확인.
  29. "춘원은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
  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 [BizⓝCEO] ㈔한국에스페란토협회 ‥ 국제 공용어 `에스페란토` 대중화 앞장, 한국경제신문, 2008년 2월 27일자 기사.
  32.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이광수·김동인의 기독교 문학,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7월 16일자 기사.
  33. 인물과 사상, 2004년 11월호.
  34.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춘원 작품의 기독성 : 독자의 감동을 통해 기독교적 사상을 깨닫게 했던 춘원,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7월 24일자 기사.
  35. '울진원전에서 불교와 문학 학술심포지엄'이 열리다, 연합뉴스, 2008년 6월 26일자 기사.
  36. NHK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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